253화
“쏜. 어떻게 되었나?”
“오, 마침 왔군.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오랜만에 드워프의 용광로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망치질을 하던 쏜은 땀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준 사슬 말이야. 이거 정말 재미있더군.”
“뭔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나?”
남궁은 쏜의 주위에 엉망이 된 망치들을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사슬에는 아무런 흠집도 없었지만 그것을 내려쳤던 망치의 머리는 모두 움푹 들어가 부서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야. 알아낼 것이 없어.”
“그게 무슨 뜻이지?”
“태초의 위상의 물건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더군.”
쏜은 앞에 놓여 있던 사슬을 남궁에게 건넸다.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대답인데. 나는 당신이 유능한 대장장이라고 믿고 있는데 말이야.”
“클클…… 유능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걸세. 허접한 놈들이었다면 겉면에 새겨진 온갖 조잡한 술식에 속아서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믿었을걸.”
“흐음…….”
남궁은 사슬을 집어 들었다.
차르릉―
사슬은 기다렸다는 듯 두 개로 나뉘었다가 그의 양팔에 각각 스며들었다.
“인간이 아니라 위상이기 때문인가? 마치 사슬들이 주인을 찾아 돌아가는 것 같군.”
“딱히. 주인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나를 주인으로 생각할 리 없지.”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말했잖은가. 사슬을 아무리 두들겨 봐도 알아낸 것이 없다고. 그 말은 반대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네.”
쏜은 남궁을 바라봤다.
“가능성이란 언제나 반전을 품고 있지.”
“무슨 뜻이지?”
“꼭 이 사슬의 주인이 란과 우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말이지.”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남궁은 그다지 희망을 가지지는 않았다.
“사슬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분명 우의 사슬이라고 적혀 있어.”
“물건의 정보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이야. 그것을 맹신하지는 말게. 자네가 있기 전까지 우가 사슬을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라도 설명엔 그렇게 나올 수 있지. 혹시 이후에 사슬의 정보를 본 적 있나?”
“…….”
남궁은 쏜의 말에 사슬을 불러냈다.
차르르릉…….
두 개의 사슬을 불러내자 그것들은 다시 뒤엉키며 하나가 되었다. 남궁은 묵색의 사슬을 살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보창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렇군. 사슬은 이제 이 세계에 적용된 모양이야. 대장술로 사슬을 분석할 수 없었던 이유도 아마 그런 맥락이겠지.”
“이 세계에 적용되었다는 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이 세계의 물건이 되었다는 말이지. 카니발의 규율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야.”
남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가능한가?”
“특이한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블랙 루트처럼 말이야. 카니발 지형이 이 세계에 나타나며 이 세계의 지형이 던전화되는 것처럼, 반대로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면서 카니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도 있지.”
쏜은 자신을 가리켰다.
“탑 속에 있는 자들도 비슷하지. 자네가 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카니발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우리는 카니발에 관여하지 않았을 걸세.”
“……내가 사슬을 깨웠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사슬의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 당신에게 부탁한 입장인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수천 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들도 주인이 되지 못했는데. 이 짧은 시간에 주인으로서 인정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
“난감하군. 나는 당신이 이 사슬로 위상을 죽일 수 있는 무구를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말이야.”
“클클, 그런 걸 만들 수 있었다면 패배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오히려 내가 만들지 못하기에 기대되지 않은가?”
쏜은 벽에 세워둔 망치를 남궁에게 건넸다.
드워프 왕가의 보구였다.
“자네가 만들게.”
“……내가?”
“그래.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만이 사슬을 변형시킬 수 있는 법이니까. 정말로 이 사슬이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자네의 부름에 응하겠지.”
“난감하군. 검은 숱하게 휘둘러 봤지만 철을 두들기는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이건 무구를 만드는 일이 아닐세.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지. 행위는 그저 의식에 불과하니 마음이 통한다면 사슬이 알아서 자네에게 답을 줄 걸세.”
쏜은 남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는 용광로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쩐다…….”
[언제부터 답지 않게 고민을 했다고 그러느냐.]
[그래, 일단 한번 내리쳐 봐. 망치가 부서지든 사슬이 부서지든…….]
[아니면 새로운 뭔가가 일어나든. 시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지.]
무명과 라테아, 그리고 레오릭이 남궁에게 말했다.
[회귀 이전에 우리는 기껏해야 마족을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모든 마족을 섬멸한 것도 모자라 자넨 마왕을 수족으로 두고 있지.]
[……여기서 왜 날 끄집어내는 거야?]
마왕, 나타스는 레오릭의 말에 삐쭉거리며 중얼거렸다.
[인류가 멸망하고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때와 달리 자네 주위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자넨 더 이상 살아남기 급급했던 그때가 아닌 신의 영역에 발을 내디딘 인간이야.]
화르륵……!!
모습을 드러낸 레오릭은 남궁이 들고 있던 망치의 손잡이를 함께 잡았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망치가 순간적으로 가볍게 들렸다.
[고민보단 행동이 먼저. 그게 자네답지.]
레오릭은 남궁의 머리 위로 망치를 들어 올렸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결정은 자네의 몫일세.]
남궁은 그의 말에 옅게 웃었다.
“행동이 먼저라며?”
그는 거리낌 없이 사슬을 내리쳤다.
* * *
-모든 마물이 소탕된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려했던 것과 달리 더 이상 지옥문은 열리지 않고 각 국가들은 과거의 평화를 재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던 것만큼 분명 과거와 달라진 점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능의 힘을 얻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지금껏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한층 더 위대해졌습니다.
-과거와 달리 이제부터는 능력자들의 유무에 따라 국력의 차이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세계정세가 크게 변하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시민들은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세계 연합은 각국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후우…….”
“고생하셨습니다.”
“고맙다.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쉽지 않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명훈을 보며 경인이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넸다.
“연합에 소속되어 있던 능력자들도 대거 탈퇴를 하고 각 국가로 돌아갔다면서요?”
“아무래도 이곳에 있던 자들은 우리가 선별해서 모집했던 자들이니까. 그들에게 제시한 몸값도 어마어마할 거야.”
“맞아요. 저랑 아버지한테도 연락이 왔었어요.”
“그래?”
“이란 쪽에서 스카우트를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거절했죠. 카니발이 끝나자 강대국들의 능력자 수집으로 난리도 아니네요.”
명훈은 경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능력자가 곧 국력과 직결되니까. 지금 많은 능력자를 확보할수록 미래에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걸 정부의 수뇌부들이 모를 리 없지.”
“형님, 협정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 옆에 있던 호준이 물었다.
“쉽지 않아. 협회에 능력자들이 빠지다 보니 각국을 통제할 수 있는 힘도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미 협회보다 많은 능력자들을 보유한 국가들도 있고.”
“인간은 정말 끊임없이 싸움을 원하네요.”
게임기를 두들기던 찬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짜식, 중학생이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중학생도 아는 걸 어른들은 왜 모르는지 모르겠네요.”
“……사인이 형이 부르지 않더냐?”
“오늘 따로 할 일이 있다고 괜찮다던데요. 출장 가신다고 하셨어요.”
“출장?”
호준은 입술을 씰룩이며 입을 가린 채 명훈에게 말했다.
“쟤는 진짜 어린애 같지 않다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형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들 해산해. 왜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거야?”
명훈은 호준을 향해 손을 저으며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협회의 회장실에는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잔뜩 있었다.
“왜긴요. 이유야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각국에게 협회의 발언권이 무시당하는 이유도 사실 능력자들의 부재 때문은 아니잖습니까.”
“아빠가 안 계셔서 그렇죠.”
소민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세계의 재건? 평화의 시대? 다 좋아요. 사이판에서 소환된 마물을 모두 소탕했을 때 육방 다리의 연결자가 카니발의 마지막을 열었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세계는 대위기에 빠질 뻔했어요. 그걸 막은 게 아빠죠. 하지만 뭐죠? 그 누구도 아빠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잖아요.”
“소민아. 형님을 찾지 않으려는 게 아니야. 방법을 찾고 있는 것뿐이지.”
“어떻게요?”
“그게…….”
명훈은 난감한 표정으로 소민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형님께서 죽은 건 아니란 걸 알았잖아. 우(无)가 풀려났다고 했으니까.”
“그래, 그래. 형님께서 뭔가 계획이 있으신걸 거야.”
호준이 소민을 달래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더 걱정인 거예요. 아빠는 뭐든지 혼자서 하려고 하시니까…….”
“하지만 현재로서는 형님을 기다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아니죠.”
그 순간 찬호가 게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찾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죠.”
“무슨 말이야?”
“단서를 찾아야죠.”
내려놓은 게임기의 액정엔 [CLEAR]란 단어가 선명하게 보였다.
“어디서 단서를 찾을 건데?”
“그야 남궁 아저씨가 사라진 시발점에서부터죠. 육방 다리의 연결자가 아저씨를 데리고 갔잖아요. 그렇다면 그와 연관이 있는 사람부터 조사해야죠.”
“육방 다리의 연결자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네, 미카엘. 그 사람을 조사하면 적어도 육방 다리의 연결자에 대해서 알 수 있겠죠.”
찬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남궁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 미카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그를 다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육방 다리의 연결자가 카니발의 남은 마물을 소환했던 행위로 인해, 미카엘 역시 인류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여론의 몰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섬에 있었던 사람들은 미카엘이 자신의 위상을 상대로 처절하게 싸웠다는 것을 알고 반론했지만,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수많은 시민들은 그를 적으로 몰아세웠다.
또한 카니발이 종결됨과 동시에 세력 확장에 급급해진 각국의 정부는 오히려 시민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그를 이용하기까지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소식이 끊어졌고,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지이이잉…….
그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명훈의 핸드폰이 울리고, 액정엔 주사인이란 이름이 떴다.
“네, 형님. 찬호 말로는 출장을 가셨다던데 갑자기 왜 출장입니까?”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사인의 거친 숨소리에 명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미카엘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