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 낙원의 신, 루(淚)의 혜택이 시작됩니다.
▶ 태초의 빛이 열립니다.
▶ 빛이 길을 잃은 모든 이들을 인도합니다.
남궁의 발아래 빛무리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상의 혜택을 잊고 있었다니…….]
린은 무너지는 차원 속에서 그 빛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드리고 말았다.
[마지막 희망은 내가 아니라 그로군. 루 역시 인간이니……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승리인가.]
“돌아가자. 길은 열렸다.”
레오릭은 남궁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또 빚을 지는군.]
“빚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야. 네가 나를 끝까지 돌려보내겠다 다짐한 것처럼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남궁은 루가 만든 빛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왜지?”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고개를 돌렸다.
문을 지나치기 직전 자신을 우두커니 서 있는 린을 향해 그가 물었다.
[나는 이곳에 있을 거야. 나 역시 위상의 일부. 란과 우가 사라진다면…… 나 역시 그리 해야 하는 것이 맞아.]
“그들과는 다르지. 너는 인간을 위해 온전한 위상이 남겨둔 것이잖아.”
남궁의 말에 린은 옅게 웃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역시 란과 우가 있기 때문이었어. 더 이상 너희 세계엔 신이 필요 없어. 희망은 너희들에게 존재하고 있으니까.]
린은 둘을 떠밀듯 빛을 뿌렸다.
[인간의 번영은 어쩌면 신이 만들어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행복은 결코 신이 만들어줄 수 없다. 나는 너희를 보고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지. 부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그대들의 손으로 이루길…….]
남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더 이안 그는 린을 막지 않았다.
사라져야 할 것은 사라지고, 남아야 할 것은 남아야 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가게.]
새하얀 빛이 그를 감쌌고, 린의 목소리가 마치 저 멀리 메아리처럼 흩어졌다.
“……아빠!!”
심연 속에 가라앉는 듯한 의식을 뚫고 들리는 소민의 목소리에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와락 안기는 딸을 남궁은 꼭 껴안았다.
“소민아.”
죽음의 공포 앞에 뒤늦게 떨리던 두 팔이 딸의 숨소리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돌아왔구나.]
요르와 루는 남궁을 바라봤다.
“당신 덕분에 무사히 나올 수 있었어.”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저 너의 계획대로였을 뿐이지. 솔직히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텐데.]
루는 위상의 시체를 가리켰다.
마치 거대한 슬라임을 보는 것처럼 녹아내린 위상의 시체는 더 이상 신이라 불릴 수 없는 잔해에 불과했다.
“끝난 건가…….”
막상 위상의 시체를 보자 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25년의 전생.
그리고 돌아와 지나온 현생의 시절이 마치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갔다.
“아빠.”
그 순간 소민이 그를 불렀다.
“끝난 게 아냐.”
“……?”
소민의 말에 남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솨아아아악――――!!
그때였다.
맑은 바람이 일며 폐허가 된 회랑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연기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형님!!!”
연기가 걷히자 남궁의 눈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최명훈, 강호준, 박효주, 전경인…….
그들을 본 순간 남궁의 가슴을 짓눌렀던 공허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남궁은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그러자 소민은 웃으며 남궁의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한마디 해야죠! 안 그래요?”
소민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
생각지 못한 딸의 행동에 남궁은 어리둥절했지만, 그 순간 소민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요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그럼. 자고로 서사의 마지막은 영웅이 끝내야 하는 법이니까. 아주 센스 있는 훌륭한 딸을 뒀어.]
“……네가 시킨 거지?”
[뭐 하느냐. 인간들아! 그가 없었다면 너희의 미래도 없었다는 것을 모두 알 것이다.]
요르는 자신을 흘겨보는 남궁을 향해 재밌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모두 그의 말에 귀 기울여라. 기다긴 축제를 끝내고 드디어 인간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노라.]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요르의 말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모두 너를 믿고 걱정하던 사람들이다. 거창하지 않아도 감사의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형님!!”
“한마디 해주셔야죠!!”
눈을 빛내는 사람들을 향해 남궁은 잠시 그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남궁은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한 명 한 명 눈에 새겼다.
“살아가자.”
그는 말했다.
“지금처럼.”
* * *
[여기서 뭐 하십니까?]
“까, 깜짝이야!”
건물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박효주는 규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또 훔쳐보고 계신 겁니까?]
“훔쳐보긴…… 누가 훔쳐본다고 그래?”
[짝사랑도 아름답지만 당사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보기엔 마음이 아프니까 어서 끝내십시오.]
“말이 쉽지…….”
그녀는 규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카니발이 끝나고 3개월.
세상은 조금씩 부서진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지만 과거와 많이 변해 있었다.
찌링…… 찌링…….
박효주는 자신의 주위에 날아다니는 정령들의 목소리에 쯧― 하고 혀를 찼다.
“나도 알거든? 하지만 어떻게 해. 틈이 없는데.”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사라지지 않은 이능.
그리고 카니발에 존재했던 많은 종족들까지 모두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탑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고 그 안에선 많은 일족들이 여전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니발을 관장했던 대리자 일족들까지 이곳에 머무르고 있으니, 지금 이곳은 인간만의 세상이 아닌 수많은 종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형님 표정이 어두운 것 같습니다. 왜 그러시죠?]
“……그 얼굴로 형님이라고 하는 거 이상하지 않아?”
[왜 그러십니까. 자기보다 강하면 다 형님이죠.]
“오늘이 수아 언니 기일이래.”
[아…….]
규류는 박효주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 날은 아니네요.]
“다, 당연하지!! 고백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박효주는 인상은 찡그리며 그를 노려봤다.
“수아 언니가 아니었으면 위상을 죽이지 못했을 거야. 언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은인이라고. 내가 끼어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냐.”
그녀는 남궁을 바라봤다.
“혼자서 너무 마음고생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지.”
남궁이 성채를 나서려 하자 지켜보던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앞에 섰다.
“준비 다 되셨어요? 명훈 씨께 들었어요. 협회 일 때문에 바쁘신 것 같아서 대신 제가 모실게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왜?”
“그, 그야…… 언니한테 고마우니까요.”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에게 박효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 자. 어서요. 소민이도 기다리고 있다고요.”
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딸을 본 남궁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카니발이 끝나면 이런 세상이 올 거라고 진짜 상상도 못 했죠. 안 그래요?”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카니발이 끝난 건 아니지. 카니발을 관장한 건 팔위상들이고 내가 소멸시킨 건 그들과는 별개인 과거의 위상이니까.”
이능이 사라지지 않고 대리자 일족이 소멸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설마…… 마물들이 다시 나타나진 않겠죠?”
[걱정 마라. 이 카니발의 마지막 남은 위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마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그 순간 뒷좌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요르.”
[제법 재밌는 세상이지 않느냐. 온갖 종족들이 모두 모여 함께 산다라…… 낙원이 될지 지옥이 될지는 이제 너희들의 몫이겠지만.]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흠? 누구보다 세상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니었나.]
남궁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나는 가족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뤘으니…… 앞으로의 세상은 내가 관여 할 것이 아니라 맡길 일이지.”
[맡겨? 누구에게?]
“아이들에게.”
소민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세상을 구했는데 바라는 것 하나쯤은 있을 것 아니냐.]
“글쎄…… 소민이가 살아 있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있으니 이 이상 바라는 것이 뭐가 있겠어.”
[아쉬운 것도 없느냐.]
남궁은 요르의 말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거라면 하나 있지.”
[뭔데?]
“수아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것.”
꽈악―
그의 말에 박효주는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어. 가장 많은 것을 참고 희생했는데…… 자신이 지킨 세상을 볼 수 없다니…….”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가운 걸까.
남궁은 눈을 감았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하고 싶은 말? 바보 같은 질문이군. 평생을 해도 못다 할 말들이 잔뜩 있는데.”
남궁은 요르의 물음에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수아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영혼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사령술로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지.”
끼익―
차가 멈추고, 남궁은 저 멀리 수많은 꽃으로 뒤덮여 있는 비석을 바라봤다.
“다만 정말로 내게 한 번의 기회가 주어져 그녀에게 딱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남궁은 입술을 깨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을 보며 소민은 그의 팔을 꼭 잡았다.
[그럼 해야지.]
“……뭐?”
[아무리 위상이라도 소멸한 영혼을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위상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지.]
요르는 소민에게 윙크했다.
[카니발의 규율.]
그의 행동에 그녀 역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위상의 혜택이 카니발의 모든 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라면 오직 단 한 명, 자신의 계시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있지.]
그 순간 남궁은 앞을 바라봤다.
“……루.”
[전설급 퀘스트.]
루는 소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남궁, 네가 위상의 몸속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너의 딸을 나의 계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퀘스트를 하나 내주었지. 아주 어렵고 힘든…… 충분히 전설급 퀘스트라 할 수 있는 것을 말이야.]
루는 싱긋 웃었다.
[카니발에서 살아남는 것. 그리고 지금 그것을 이룬 나의 계시자에게 퀘스트의 보상을 내어주려 한다.]
남궁은 그를 바라봤다.
[소중한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기회.]
“……!!!”
솨아아아악―――!!!
그 순간 루의 발아래 강렬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 전설급 퀘스트의 보상이 이뤄집니다.
[영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단 한 번의 기회를 줄 순 있다. 그대들이 해낸 위업에 대한 보상이라기엔 한없이 부족하지만…….]
“아니. 충분해.”
남궁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빛무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그는 마치 뺨을 어루만지듯 빛무리에 손을 가져갔다.
“사랑해, 수아야.”
그는 자신의 딸과 아내를 꽉 끌어안았다.
『회귀한 아포칼립스의 폭군』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