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장. 점령지를 돌파하다 (1)
다음 날 아침이 되고.
상호는 모처럼 바깥에서 노숙을 하지 않고 따뜻한 구들장에서 자서 개운한 모습으로 눈을 떴다.
“으으, 잘 잤다.”
“기상하셨소이까.”
“아, 임 무관님.”
창호지를 바른 문 밖에는 임충이 서 있었다.
정식으로 상호의 호위가 된 그는 무관 복장을 입었던 어제와는 다르게 푸른색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무관이라 그런지 펑퍼짐한 의복이 아닌 소매가 짧고 활동하기 용이한 복장이었는데, 이것이 상호의 눈에 확 들어왔다.
“저, 임 무관님.”
“편하게 뭐든 말씀하십시오.”
이전에는 하대를 했었지만 광해군의 명에 따라 그의 호위가 된 지금은 말투를 바꿔 존대를 하는 임충이었다.
상호는 이런 변화가 낯설었지만 굳이 존대를 해오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어 그냥 그대로 넘어가고 원래 하고픈 말을 꺼냈다.
“혹시 임 무관이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한 옷을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상호가 입은 옷은 빈 집이 된 곳에서 훔쳐 입은 옷이다. 당연히 제대로 맞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대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밀리터리 룩을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요청을 한 것인데 임충은 이것을 바로 들어주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관청에 소속된 여종이 잘 개어진 옷을 전해주었다.
환복을 하고 다시 나온 상호는 임충의 안내를 받아 관청 한 쪽에 자리한 방을 찾게 되었다.
나무 마루로 된 방 안엔 책상에 하나 있고 서적을 잔뜩 끼워 넣은 책꽂이가 벽마다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안에는 초록 관복을 입은 젊은 관리가 있었다.
“오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예.”
광해군의 명이 있었던 모양인지 초면임에도 관리는 깍듯하게 상호를 대했다.
상호가 이 방에 들어온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
“세자 마마의 명에 따라 필요한 문서를 여기 준비해두었습니다.”
“이게 다 말입니까?”
“네.”
상호는 책상 가득 쌓여있는 문서들을 보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기록 덕후 아니랄까 봐, 작은 사항 하나 빠트리지 않고 분조로 올라온 장계 모두를 정리해서 기록해 둔 것이다.
생각보다 방대한 양도 그렇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상호가 한자를 전혀 읽지 못한다는 문제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러한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내용을 살피기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말이죠. 괜찮다면 이것을 기록한 사람에게 직접 중요한 내용만 전해 듣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작성을 한 사관을 불러 오지요.”
관리는 그리 말하고 잠시 방을 나섰다.
잠시 뒤, 관복을 입은 40대의 남성이 상호를 찾아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홍문관에서 수찬을 지내는 강수홍이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적은 내용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다고 말을 들었네만.”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하하, 괜찮고말고.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다행히 강수홍이라는 이름의 사관은 서글서글한 성격에 말이 잘 통하는 인물이었다.
각자 자리에 앉고 상호가 먼저 용건을 이야기했다.
“우선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전황에 듣고 싶습니다.”
“최근의 상황만 얘기해달란 것인가.”
“네.”
“알겠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왜군이 무서운 속도로 한성을 점령하고 1차 평양성 전투라고 역사에서 부르는 전투가 벌어져 평양성이 함락된 게 2주 전이었다.
이 싸움으로 승리를 거둔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선조가 있는 의주까지 진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지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되어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바로 수군의 이순신과 각지에서 발호한 의병들이 그 이유였다.
전라 좌수사인 이순신은 초기 어이없게 무너진 경상도의 해군과 다르게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끝내고, 서해안을 끼고 북상하려는 왜 함대를 상대했다.
첫 전투인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연달아 해전에서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해상에서의 보급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의병들도 후방에서 출현하기 시작해 겨우 선으로 이어진 왜군 점령지 사이를 돌아다니며 보급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니, 북쪽으로 올라가는 군량이며 무기 물자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고니시의 1군은 평양성을 함락한 뒤에 바로 선조가 몽진한 의주로 바로 진격하지 못하고 발이 묶였다.
그런 반면, 또 다른 선봉인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2군은 강원도를 통해 북쪽으로 진격해 벌써 함경도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한산도 대첩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모양이구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은 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꾼 중요한 전투이다.
날짜까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평양이 함락되고 난 뒤에 한산도 대첩이 일어났다는 것은 역사 드라마를 통해 기억하고 있는 상호였다.
‘지금까지는 원래 역사대로 상황이 흘러간 것 같지만······.’
이대로 원래 역사처럼 한산도에서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을 크게 격파하면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문제는 역사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하게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당초 존재해선 안 될 몬스터의 출현이 역사 재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라면 어지간한 변수가 생기더라도 전투에서 패배할 리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전투 자체가 일어나지 못할 만한 변수가 작용한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한산도에서 전투 자체가 일어나지 않아 역사상의 한산도 대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나비효과로 전쟁 자체가 어떻게 변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인 거다.
여기까지 생각한 상호의 표정은 매우 심각해졌다.
‘이 또한 그냥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몬스터로 인해 과거의 조선이 망하는 것도 문제지만 본래 역사가 크게 바뀌어 미래에도 악영향이 생겨나는 것도 문제다.
다시 돌아간 미래가 바뀌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원래 역사대로 사건이 진행되게 만들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내가 가서 상황을 살피고 변수를 최대한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간을 잘 맞출 필요가 있었다.
어제 파악하기로 현재 상호가 있는 시간은 음력으로 임진년 6월 말에 해당되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한산도 대첩은 대략 이 때쯤 일어났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출발하면 때를 맞출 수 있을 거다.’
상호는 사실 상 이것으로 자신의 첫 목적지를 결정짓게 되었다.
물론 이 결정엔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길 고대하는 영웅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흑심도 약간 작용하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가?”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가 너무 넋을 놓고 있었군요.”
상호는 강수홍의 말에 뒤늦게야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곤 아직 묻지 못한 질문을 하였다.
“여기 올라온 장계 중에는 요괴에 대한 내용이나 해괴한 것이 목격되었다는 것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들 중에서 최초로 올라온 기록이 뭔지 알고 싶은데요.”
“그거라면 내가 잘 기억하고 있지.”
워낙 인상적인 부분이라 직접 기록을 담당했던 강수홍은 해괴한 이변에 대한 부분을 보고로 올린 첫 번째 장계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오월 중하순에 음성에서 그 장계가 올라왔지.”
음성에서 올라온 장계에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윤 아무개라는 피난민이 목격한 것으로, 컴컴한 밤중에 산 정상 부근에서 대낮의 햇빛보다 밝은 빛을 목격했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밭에서 일하던 아녀자 셋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음성의 군수인 유길상은 맹수 토벌대를 조직해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사람 비슷한 두발로 걸어 다니는 괴물을 목격했다.
그 괴물의 머리는 흡사 돼지와 비슷했고 창칼을 든 이 괴물들은 토벌대를 상대로 한 점 망설임도 없이 덤볐다.
‘오크로군.’
상호는 강수홍이 해준 이야기에 나온 요괴의 정체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오크는 고블린보다 체격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은 상대하기 힘들다.
실제로 장계를 올린 유길상이 이끄는 토벌대는 오크와 싸워 많은 사상자만 남긴 채 도망치듯 후퇴를 하고 말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장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네.”
오크나 고블린 같은 인간형 몬스터와 조우한 경우도 있었고 다이어 울프나 하피 같은 마수형 몬스터와 만난 사례도 있었다.
그 외에도 해괴한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도 여럿 존재했다.
‘이 정도 수치라면 초창기 대한민국 영토에 게이트가 발생했던 빈도랑 얼추 비슷한 것 같네.’
그렇다고 하면 조선 땅에 발생한 게이트의 숫자는 약 300곳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발생한 게이트 중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역을 확장해 Ⅰ단계 이상 되는 게이트가 되어버린다.
‘게이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장되고 그만큼 이쪽 세계로 넘어올 수 없는 강력한 몬스터가 그 문을 통해 넘어올 수 있다.’
그리고 확장된 만큼 더 넓은 지역을 몬스터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린다.
상호가 있던 미래에서 전 국토의 3할이 그런 식으로 몬스터에게 먹혀버렸다.
‘최초 발견이 약 한 달 전이라면 아직은 시간이 있다.’
보통 Ⅰ단계에서 Ⅱ단계로 게이트가 확장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두 달에서 세 달 사이다.
아직까진 Ⅱ단계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지금이라도 서두르지 않는다면 위험이 점점 커진다고 봐야했다.
“많은 정보를 들려줘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
이제 필요한 정보도 얻었으니 행동을 할 차례였다.
용건을 끝내고 상호는 임충을 통해 광해군과 다시 만남을 가졌다.
“갈 길을 정하였다고?”
“예, 세자 저하. 먼저 남쪽부터 상황을 살펴가며 요괴 토벌에 나설 의병들을 모아볼 생각입니다.”
“남쪽부터인가. 하긴 왜군 점령지에서 의병들이 주로 활동한다고 하니 그리하면 옳겠지.”
“꼭 좋은 성과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자네만 믿겠네.”
이렇게 광해군에게 떠난다는 말을 하고 바로 오후에 출발을 하게 되었다.
“길 안내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임충은 고개를 숙였다.
이 시대의 길을 모르는 상호에겐 그 말은 천금처럼 귀하게 들려왔다.
이어서 상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행장을 꾸리고 남자처럼 변복한 율을 보았다.
“진짜 나를 따라올 참인가?”
“네!”
아비의 장례를 광해군의 도움으로 치른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끝까지 상호를 따라나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사실 검술도 쓸 만하고 실력도 있는 율이라면 데려가지 못할 것도 없다. 오히려 한 사람의 실력 있는 헌터를 키워내는 것이 목적 중 하나인 상호로선 그녀의 참가는 반길 만한 일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녀가 고작 16살의 어린 소녀라는 점이다.
이 일에 대해 여러모로 고민했지만 딱히 갈 곳도 없는 율을 그냥 두고 가는 것보다 같이 곁에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결국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떠날 준비를 끝낸 상호는 광해군으로부터 받은 말들을 가리키며 율에게 말했다.
“말은 탈 줄 알아?”
“조금은 탈 줄 아옵니다.”
의외로 율은 말을 탈 줄 안다고 답했다.
아무래도 무인으로서 말 타기를 배웠던 모양이다.
“끄응! 못 타는 것은 나뿐인가.”
한 번도 말을 타본 적이 없는 상호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갈색마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과연 이 여정에서 저 말을 타는 것을 잘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된 것이다.
그리고 출발을 하게 되면서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으아악.”
“말을 몰 때는 하체에 힘을 단단히 줘야 합니다.”
“끄응, 알겠는데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군.”
여행 초반, 상호는 생전 처음 해보는 말 타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고생을 해야만 했다.
어렵게 말을 타는 법을 배우며 이천 땅을 벗어나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 와중에 임충은 한 가지 당부를 잊지 않고 하였다.
“이대로 남쪽으로 가다보면 필경 왜군 점령지를 지나쳐야 할 것입니다. 자칫 왜군과 만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 되도록 큰 길은 피하고 산길을 따라 이동하도록 하지요.”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죠.”
출발지인 강원도 이천에서 전라도 여수까지 가려면 왜군 점령지들을 지나가는 일을 피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임충의 말대로 하는 것이 더 이롭다는데 상호의 생각도 같았다.
다행이라면 아직 임란 초기이고 왜군이 한양 함락과 선조를 붙잡기 위해 선으로 점령을 하며 나아갔기에 점령지는 그렇게 넓지 않은 편이었다.
그곳들만 조심한다면 목적지까지 가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서두르죠.”
“알겠습니다.”
어설픈 기마술이지만 상호는 열심히 앞서 달리는 임충과 율을 쫓았고 길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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