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장. 전쟁에 뛰어들다. (1)
전라도 지방 공략을 맡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은 금산 지방을 점령한 뒤로 전주를 공략하고자 했다.
이대로 두면 전라도까지 왜군에 손에 떨어질 지경이었기에 전라도에 남아 있는 조선군은 급히 병력을 모아서 이를 막고자 했다.
여기에 왜군 침략에 맞서 막 거병한 고경명, 곽재우 등의 의병장들이 이끄는 의병대도 같이 동참했다.
병력이 모이고 왜군을 막기 위한 작전이 수립되었다.
먼저 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김제군수 정담과 동복현감 황진이 부대를 이끌고 왜군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큰 웅치 고개를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뜻밖의 변수로 초장부터 어긋나게 된다.
한편, 여수를 출발한 상호 일행은 꼬박 이틀을 달려 전주 지역에 도착했다.
“분위기가 꽤나 어수선하군.”
“곧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에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피난을 서두르는 사람들을 지나쳐 상호 일행이 도착한 곳은 전주성 내에 있는 관청이었다.
큰 전투를 목전에 앞둔 상태라 경계가 최고조인 관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상호는 광해군이 준 마패를 통해 신분을 확인시키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드르륵.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이 열리고 갑옷을 입은 노년의 장수가 상호 일행이 대기하고 있던 방에 들어왔다.
그를 본 상호는 옆에 앉은 임충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들이 세자 저하께서 보냈다는 사람들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상호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관직이 있을 만한 자는 아닌 것 같군.”
상대의 말에 상호는 순간 뜨끔해졌다.
백발의 머리와 근엄하게 기른 수염.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성성한 그의 모습에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권율 장군이다.’
바로 전에 만났던 이순신도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권율 또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하기야 임진왜란에서 그 이름을 떨친 명장이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광주 목사로 재임하던 문신이었던 권율은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으로 전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던 전라도에 있던 그는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앞서 용인 전투를 치렀고 이어 지금부터 벌어질 이치 전투에도 참가하게 된다.
상호는 시선에 존경의 빛을 띄우면서 말했다.
“사실은······.”
이순신 장군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고스란히 권율에게도 해주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요괴라니! 그런 해괴망측한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것인가.”
“여기 보시면 알겠지만 세자 저하의 보증이······.”
“무언가 잘못 아신 것이겠지! 지금 왜적이 도성을 침탈하고 국토를 유린하는 이 마당에 그깟 허무맹랑한 일에 내 신경 쓸 여유가 없네!”
단호하기 짝이 없는 말에 상호는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보다 훨씬 완고한 것은 무신이 아니고 유학을 더 심층적으로 공부하고 그 사상에 깊게 빠진 문신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 이야기가 허사로 돌아갔지만 이대로 만남을 끝낼 수는 없었다.
“저도 강요를 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차후에 그런 존재를 만나도 놀라지 말고 대처하시길 바랍니다.”
“커흠!”
“아,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수천의 왜군이 이곳을 노리고 진격 중이라고 들었는데 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요?”
“전라도 군영의 모든 병력이 나섰고 의병들도 합류했네. 곧 장계를 보낼 테지만 이쪽은 염려하지 말라고 세자 저하께 전하게.”
“다행입니다.”
상호는 권율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권율의 태도가 뭔가 이상한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냥 모른 척하기엔 마음에 걸려 상호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뭔가 잘 풀리지 않는 게 있으시기라도 한 겁니까?”
“그런 것 없네.”
대답하는 권율의 목소리가 방금까지보다 훨씬 높았다.
이러한 반응은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반증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집요하게 캐물었다.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만, 저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선계에서 온 자입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싶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바로 경을 쳤겠지만 자넨 세자 저하의 친필 서신을 가져온 자이니 일단 말은 해주겠네.”
탐탁지 않은 듯, 한참을 망설이던 권율은 그리 말하고는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후우! 실은 왜군이 이치 고개가 아닌 웅치 고개 쪽을 노리고 병력을 움직인다는 첩보를 받고 그쪽으로 서둘러 병력을 전개하려 했네. 그런데 그 웅치 고개에 문제가 생겨버렸네.”
“문제라니요?”
왠지 여수에서의 일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하지만 상호의 이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진을 치기 위해 갖던 아군 병사들이 처음 보는 괴수들에게 습격을 받아 많은 피해가 났다는 것이야.”
“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요괴의 존재를 부정했던 권율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미 장계를 통해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니, 솔직히 충격이었다.
자신을 보는 상호의 시선에 권율은 다시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마도 늑대나 승냥이 떼의 습격을 오인한 것이겠지. 고작 짐승 무리 때문에 고개를 선점하지 못했다고 하니 문책을 하고 다시 고개를 점령시키게 하려던 참이네.”
“안 됩니다, 그건.”
상호는 권율의 말에 남들이 보면 무례하게 보일 태도로 맞받아쳤다.
이치 고개가 아니라 웅치 고개라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지만 결코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에 이르는 군대를 공격하는 짐승 무리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마수 타입의 몬스터일 가능성도 있다.’
해당 지역이 몬스터 게이트가 발생하기 쉬운 산들이 있는 지역에 속한다는 점도 이러한 의심을 키웠다.
또다시 몬스터의 개입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상호는 권율에게 질문하였다.
“그 웅치 고개가 왜군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까?”
“이곳 전주성을 왜군이 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지나야 할 길목 중 하나이네. 그만큼 왜군이 그곳을 통과하기 전에 막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지.”
“그렇군요.”
상호는 권율의 설명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이치 전투의 전장이, 이치 고개뿐만 아니라 웅치 고개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웅치 고개 방어가 이치 전투의 일부라고 하면 더욱 이 상황을 그냥 방관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엔 이곳 전주성이 떨어지고 전라도 지방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그리되면 역사는 크게 뒤틀리게 되고 말겠지.’
그런데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현재 웅치 고개에는 몬스터라고 생각되는 존재들이 있다.
만약 왜군과 몬스터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까.
확실한 양쪽이 충돌하면 서로 큰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그리만 된다면 조선군에게 있어선 호재일 것이다.
‘왜군에게는 생소한 몬스터의 존재. 분명 큰 피해를 줄 수야 있겠지만······.’
왜군의 규모가 수천 명에 이른다고 들었다.
그 정도의 군대라면 어느 정도 피해를 입어도 결국 몬스터를 섬멸시키는 것은 큰 어려움이 아닐 터였다.
이후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계속 진격해온다면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장군!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인가?”
“왜군보다 먼저 고개를 차지할 수 있게끔 그 나타났다는 괴수를 토벌하겠습니다.”
“자네가 말인가?”
권율은 상호의 말에 잠시 생각을 취하였다.
상호에게 그런 일을 맡겨도 될지 고민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바로 이때, 옆에서 가만히 있던 임충이 말을 꺼냈다.
“여기 있는 이 부위는 이미 두 번이나 요괴 토벌에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충분히 한 말을 지킬 자이니 한번 믿고 맡겨보십시오.”
“으음.”
상호의 능력이나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믿는 게 아닌 권율이었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웅치 고개를 확보만 할 수 있다면야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상호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웅치 고개를 다시 한 번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보낼 예정이기도 했다.
마침내 권율은 이와 같이 말했다.
“좋네. 어디 한번 자네가 뜻한 대로 해 보게나.”
“감사합니다, 장군.”
예상보다 쉽게 권율의 승낙이 떨어진 사실에 상호는 심히 만족해했다.
이어서 상호는 권율에게 다음과 같은 요청을 했다.
“고개에 나타난 괴수와 싸운 병사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들을 만날 수는 없겠습니까?”
“그것이라면 내 부관에게 말해두지.”
권율은 흔쾌히 상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후, 부관의 안내를 받아 상호는 몇 명의 사람을 만나게 됐다.
“세상에 그런 괴물도 없시유. 황소만 한 게 휙 하고 지나가더라니깐유.”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범은 아니었습니다.”
“시뻘건 게 늑대처럼 생겼더이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본 결과 웅치 고개에 자리 잡은 몬스터는 ‘헬하운드’일 가능성이 컸다.
헬하운드라고 하면 지옥의 개라는 이름답게 영역에 들어온 인간들을 그냥 두는 법 없는 대단히 흉포한 몬스터였다.
덩치도 어지간한 대형견의 두 배 이상 되고 입에서 불길도 뿜어내기에 접근전에서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였다.
참고로 상호는 헌터로 활동하면서 헬하운드를 직접 상대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구경이 큰 대전차 소총으로 장거리에서 조지고 남은 것들은 박격포로 정리했었지.’
현대에서야 화기의 힘을 빌려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몬스터였지만 지금 시대에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창검만으로는 늑대 무리처럼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헬하운드 무리를 잡는 것이 무척 어렵기에 준비가 필요했다.
‘시간이 많다면야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잡으러 가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럴 시간이 없어.’
시시각각 왜군들이 오는 마당에 여유 있는 사냥은 무리였다.
상호는 이순신에게 받았던 가르침을 떠올려봤다.
‘적을 상대할 때는 먼저 상대에 대해 잘 아는 게 첫 번째요, 그들을 상대할 아군의 힘을 파악하는 게 두 번째네. 그리고 적을 무찌를 방법을 생각할 때는 늘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말고 열 가지를 떠올려 그중 가장 나은 것은 선택하는 게 좋네.’
이 말대로 단순히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만 생각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산길 곳곳에 깔린 헬하운드들을 찾고 쫓아다니면서 싸우는 것보다, 그들을 한곳에 모아서 일거에 소탕할 수 있는 방도를 찾던 상호의 뇌리에 번뜩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이에 상호는 다시 한 번 권율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직접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상호가 말한 것에 권율은 곧바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기야 아무리 이번 전쟁이 벌어지고 세자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자라고 해도 일개 종 9품의 하급 관리, 그것도 스스로 다른 세계에서 온 자라고 떠벌리는 자에게 병사의 지휘권을 준다는 것은 쉬운 선택은 아닐 것이었다.
이러한 부분을 모르는 바가 아닌 상호는 재차 말했다.
“절대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로 그곳에 있는 게 자네가 말한 그 요괴가 맞는 것인가?”
“네, 거의 확실합니다. 그것들을 피해 없이 토벌할 방도도 이미 갖고 있으니 믿어만 주신다면 반드시 고개를 탈환해 보이겠습니다.”
이러한 상호의 확언에 권율은 그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대신 권율은 상호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이야기했다.
“만약 약조한 대로 고갯길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빌려간 병력에 많은 피해가 생긴다면 군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네. 그래도 괜찮겠나?”
권율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자칫 잘못하면 이 시대에서 목을 댕강 잘리는 일을 경험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와 말을 물릴 수는 없는 노릇, 해볼 수밖에 없다.’
이 정도로 물러날 것이면 애초부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상호는 똑바로 권율을 보며 대답했다.
“제 목숨을 걸고서 성공시켜 보이겠습니다.”
“제법 당찬 대답이로군. 아까 내가 한 말도 있고 하니 한번 끝까지 믿어보지.”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로써 병력 문제도 해결되었다.
남은 건, 권율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웅치 고개의 몬스터들은 한 시 바삐 토벌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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