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장. 이치 전투 (2)
고바야카와 군의 회군 소식이 알려지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요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긴급 지휘관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본래라면 참가가 힘들겠지만 세자인 광해군의 이름을 빌려 상호도 말석이나마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어찌 왜적들이 이렇게 빨리 돌아온단 말인가.”
“아무래도 웅치 고개의 방어가 튼튼하다고 여겨 그쪽으로 전주성을 향해 가겠다는 뜻을 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이대로 간다면 우리 군은 앞뒤로 포위되게 되오. 당장 이치 고개 쪽으로 넘어 후퇴를 해야 하오.”
“허어!”
방어사 곽영의 말에 고경명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토록 금산성을 함락시키려던 그의 의지가 이런 식으로 허망하게 무너진 것에 대한 상심이 컸던 탓이다.
그렇지만 고경명도 현 상황이 아주 위중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후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후퇴에 대한 얘기가 논제로 나눠지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후퇴한다면 무사히 이치 고개 너머로 후퇴할 수 있소.”
“하지만 우리가 군영을 철수하고 후퇴하면 금산성에 있는 왜군들이 낌새를 알아채고 뒤를 치고 올 수도 있는 일이오.”
군대가 후퇴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후미를 노리고 오는 적이다. 적어도 하나의 부대가 위험을 각오하고 뒤를 지켜줘야만 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역할이기에 모인 지휘관 중 누구 하나도 선뜻 자원하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던 때에 고인후가 자원했다.
“소자가 최후미에서 적의 추격을 막아보겠습니다.”
“인후 네가 말이냐.”
“네.”
결의를 보이며 고인후는 말했다.
이 모습을 본 상호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을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지어냈다.
‘하필이면 저 사람이 그런 위험한 역할을 자원하다니.’
자신의 계획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인 고인후가 스스로 자처해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역할을 맡는 것이 상호로선 속 쓰린 일인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이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기에 속으로 앓아야 했다.
한편, 자신의 아들이 위험한 일을 자청했음에도 고경명은 오히려 대견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내 아들이니 마땅히 그래야지.”
“소자, 목숨을 걸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겠사옵니다.”
이렇게 해서 고인후가 최후미에서 적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금 후퇴한다고 해도 남쪽에서 오는 고바야카와 군과의 충돌을 완벽하게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나왔지만 괜찮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지금 바로 철수를 준비한다는 것, 하나만 결정되었을 뿐이었다.
상호는 회의 내용을 들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좋지 않은데.”
당초 생각대로 일행만 대동하고 이 부대를 떠나 왜군이 없는 길로 은밀히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전멸할 위기에 놓인 고경명 부대를 모른 척하고 간다는 게 양심을 찔리게 했다.
특히 고인후 같은 이를 잃는다는 게 너무 아까웠다.
“적어도 참패해서 전멸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단순 전력만 놓고 보면 고경명 부대는 1만이 넘는 고바야카와 군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야전이라면 조총 부대를 거느린 왜군에게 필패할 확률이 컸다.
뭔가 피해를 최소화할 방도가 필요했다.
“으음.”
전쟁이라고 하면 상호도 경험한 바가 있다.
바로 갑자기 세계에 출현했던 몬스터와의 전쟁 말이다.
몬스터 게이트를 거점으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군은 다각도로 작전을 펼쳐 그들을 상대하였다.
특히 초창기에는 위험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작전이 주로 전개되었는데 그 일련의 과정을 뉴스를 통해 접한 바 있었다.
퇴로가 하나뿐인 상황이지만 그곳을 지나려면 몬스터들의 습격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군은 피난민의 안전을 위해 기동력이 뛰어난 경전투 차량을 필두로 소규모 병력으로 몬스터들을 공격해 자신들에게 주의를 향하게 하고 그 틈에 피난민들을 실은 차량 대열을 무사히 탈출시켰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그 뉴스에서의 상황과 흡사하지 않은가.
상호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외인이 함부로 나서다니······.”
외부인인 상호가 끼어드는 것에 대해 몇몇이 떫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고경명은 말을 해 보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이에 상호는 생각한 것을 말하였다.
“지금 상황이라면 왜군과의 충돌을 피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적과 야전에서 맞붙는다면 신립 장군이 이끄는 관군이 탄금대에서 대패했던 때와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될지 모릅니다.”
“크흠.”
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졌던 탄금대 전투는 조선군이 조총이라는 무기를 대규모로 운영할 수는 있는 왜군을 상대로 야전에서 정면으로 이기기 힘들다는 결과를 잘 보여준 전투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 벌어진 용인 전투나 다른 야전에서 벌어진 전투들에서 모두 큰 피해만 입고 조선군은 패배를 맛봐야 했다.
이러한 선례가 있기에 상호의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니 최대한 왜군과 부딪치지 않고 이치 고개를 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을 누가 몰라서 그러나. 이미 왜군이 목전까지 온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을 피한단 말인가.”
참석자 중 한 명의 지적에 상호는 바로 대책을 내놨다.
“기동성이 좋은 기병을 통해 적의 예봉을 꺾어 추격을 늦추고 그 틈에 이치 고개로 빠르게 후퇴하는 겁니다.”
“흐음.”
상호의 말에 고경명은 수염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소수정예의 병력으로 왜군의 발목을 붙잡고 그 틈에 후퇴한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내가 볼 때도 이 대책이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되는군.”
“저도 찬성입니다.”
“아니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고경명을 비롯한 참석자 모두 상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누가 이 중대한 임무를 해주겠는가.”
“커흠!”
“곽영 방어사께서 나서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난 관병을 지휘해야 하는 몸이니 그런 중차대한 역할을 맡지 못할 것 같으이.”
아무리 정면으로 전투를 하는 게 아니라 치고 빠지기 식으로 전투를 수행한다고 해도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대군을 상대해야 하는 임무가 쉬울 리 만무했다.
그러니 다들 눈치를 보며 기피하는 것이었다.
실로 한심스러운 일이었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역할인 게 사실이니 마냥 그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었다.
상호는 좌중의 분위기를 보며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전혀 뜻밖의 인물이 자원했다.
“제가 기병들을 통솔해 왜군을 막아보겠습니다.”
“자네는?”
“임 무관님?”
자원을 한 것은 상호의 뒤에 기립해 서 있던 임충이었다.
임충이 내금위에서도 실력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나 분조를 이끄는 광해군의 호위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고경명은 그의 말에 반색을 했다.
“자네가 맡아준다면 고마울 따름이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순식간에 결정은 이뤄졌다.
이로써 임충은 고경명 부대의 향후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상호는 임충을 잠시 붙잡고 얘기를 나눴다.
“아니 저와 상의도 하지 않고 그 역할을 맡겠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부위의 의중을 묻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한 것은 죄송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들을 살릴 기회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소이다.”
“후우!”
임충의 마음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의 결정에 더 이상 반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임충 혼자만 덜렁 싸우러 보낼 수는 없었다.
처음이야 어쨌든 지금은 둘도 없이 소중한 동료이기 때문이다.
상호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위험합니다. 그러지 말고 본대와 함께 이치 고개를 넘어 전주성으로 안전하게 가십시오.”
“임 무관 혼자 위험한 사지로 보낼 수는 없죠. 애초에 이 작전을 제안한 사람은 바로 저이니깐 말이죠.”
진심이 통한 것일까.
상호의 말에 임충은 새삼 그를 다시 보게 되었고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상호는 고경명의 의병 부대를 지켜내기 위한 중대한 역할을 떠안게 되었다.
*이 파일은 헬븐마베야방에서 등록된게 아닌 토렌조아에 등록된 파일입니다
7월 9일.
고경명 부대가 안 것처럼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 역시 조선군의 존재를 파악했다.
고바야카와군이 자리를 비운 틈에 본진을 당한 것을 분개하며 진군 속도를 높인 가운데 금산성에서도 기병이 주축으로 된 추격대가 후퇴하는 부대를 쫓기 위해 출동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명 정도 되는 기마대는 임충의 지휘 아래 고바야카와 군의 선봉을 상대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적이 오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일찍 만났군.”
척후병의 보고에 임충은 침중하게 말했다.
행군 속도를 미루어 아직 좀 더 남쪽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고바야카와 군이 생각보다 더 가깝게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앞두고 비장한 각오를 하며 기병들은 무기를 점검했다. 그들 사이로 상호와 율도 긴장 섞인 모습으로 말에 타고 있었다.
“떨리지 않아?”
“소녀는 괜찮사와요.”
“나 때문에 괜히 너까지 전장에 와버리게 되어 미안하다.”
“아니에요.”
상호의 말에 율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직 어린 여인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그 모습은 이 자리에 있는 다른 기병들보다 더 든든해 보였다.
이렇게 긴장을 조금씩 하며 기다리니 드디어 왜군이 남쪽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오는군.”
상호는 저 멀리서 오는 왜군들을 보고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선두로 오는 병력인 일반적인 창을 쓰는 보병이었다. 보아하니 조선군이 일부러 남쪽으로 내려와 매복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는지 속도를 내기 위한 빠른 걸음으로 길을 지나오고 있었다.
돌격을 앞두고 임충은 율에게 한마디 했다.
“율, 너는 이 부위의 곁을 잘 지켜드려야 한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나리를 지키겠사옵니다.”
율은 다부진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래도 말에 타고 싸우는 게 익숙하지 않은 상호를 염려해 율을 그의 호위로 붙인 것이다.
상호 본인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였기에 두 사람의 결정에 순순히 따랐다.
“잘 들어라. 우리가 저들을 제대로 막지 못한다면 수천에 달하는 아군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
“모두 이 사실을 명심하고 그 목숨을 잠시 내게 맡겨 임무를 성공시키는 데 전력을 다해주길 바란다.”
전투를 앞두고 임충이 한 말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병사들의 결의를 다잡게 했다.
이후 모두가 말에 탑승하고 왜군이 정해둔 지점까지 오기를 기다렸다.
나무 숲 사이에 은신한 이들을 발견하지 못한 왜군은 무방비의 상태로 더 가까워졌다.
“출진이다!”
“와아아!”
임충의 말에 기병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말을 몰아 왜군을 향해 돌진하였다.
“적이다!”
뒤늦게야 임충의 기마대를 발견한 왜병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급히 무기를 고쳐 잡고 방어 대형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탄력을 받은 기마대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단숨에 왜군이 있는 곳으로 치고 들어갔다.
“으아악!”
언월도와 편곤 등으로 무장한 기병들은 단숨에 왜군 사이로 뛰어들어 왜군 아시가루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뒤에서 그저 구경만 하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은 아니었다.
상호는 전투를 위해 챙긴 편곤을 들고 말을 달려 왜병이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
“이얍!”
상호는 말 위에서의 싸움이 서툴기에 어설프게 쇠뭉치인 편곤을 휘둘렀다.
그러했음에도 휘둘러진 편곤은 상호의 괴력에 의해 파공음을 내며, 목표한 왜군의 머리를 박살냈다.
“큭!”
피와 뇌수가 터져 나오는 모습이야 헌터 생활을 하면서 이골이 날 정도로 본 상호지만 상대가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눈을 잔뜩 찡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속에 자비를 두지는 않았다.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
냉정하게 생각하며 상호는 계속해서 편곤을 휘둘러 근처의 왜군들을 쓰러뜨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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