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장. 이치 전투 (4)
새로운 기술도 갖게 된 상호는 임충에게로 향했다.
여러모로 지휘관으로서 쉬지도 못하고 바빴지만 임충은 상호를 보자마자 안부부터 물었다.
“아까부터 줄곧 앉아만 있던데 몸은 괜찮소이까?”
“걱정하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왜군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다행히 왜군 기마대가 추격해오는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의도를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더 이상 우리가 급습을 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큰 일, 우리도 본대에 합류하는 게 낫겠지요.”
임충 역시 상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휴식을 취한 기마대는 고경명 부대와 합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이때는 왜장 다케가와가 이끄는 부대와 고경명의 부대가 서로 마주친 뒤였다.
“남쪽에 발이 묶였어야 할 저들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어찌하면 좋겠소. 길목이 막혔으니 다른 곳으로 우회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럴 수는 없소이다. 보아하니 저들은 남쪽에서 올라온 왜적의 전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니 정면으로 부딪쳐 길을 열어야 하오.”
잔뜩 겁먹은 태도의 방어사 곽영과 다르게 고경명은 눈에 힘을 주고 정면 돌파를 주장했다.
눈앞에 보이는 왜군의 숫자는 고경명, 곽영의 조선군보다 훨씬 적었고 급하게 이곳에 도착했는지 아직 제대로 진을 구축하지도 못한 부산한 상태였기에 정공으로 밀어붙여도 승산이 없어보이지는 않았다.
방어사 곽영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여길 뚫지 못하면 언제 왜군의 본대에게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결국 고경명의 뜻에 따르게 되었다.
고경명은 곧 자신을 따르는 의병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했다.
“공자의 도리조차 모르는 저 오랑캐들이 이 땅에서 잔악무도한 짓을 해오고 있다. 이 조선의 국운과 주상 전하를 위해 모두 목숨을 바쳐 싸우자!”
“와아아!”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는 고경명의 모습에 의병들은 함성을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에 왜군 측은 논두렁 위에 병력을 길게 열을 지어 배치했다.
둥둥!
“전진하라!”
“와아아아아!”
개전의 북 소리와 함께 수천에 달하는 관병과 의병들이 파도처럼 왜군을 향해 돌진해갔다.
곳곳에 군기(軍旗)를 펄럭이면서 나아가는 이들의 위용은 자못 대단하였다.
하지만 논두렁 위에서 대기하던 수백 명의 조총병들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화승에 불을 붙이고 사격을 준비했다.
“화살을 쏴라.”
“발사!”
먼저 조선군 측에서 달려오다가 화살을 쏴 날리기 시작했다.
하늘 위를 날아온 화살은 왜군의 대형 위로 매섭게 떨어졌다.
“크악!”
“아악, 내 팔!”
화살에 맞은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와중에도 갑주를 입은 중간 지휘관들은 왜도를 뽑아들고 병사들을 단속했다.
그런 가운데 양측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쏴라!”
100보 안쪽으로 조선군들이 돌진해오자 마침내 대기하던 조총병들에게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파바바방!
매캐한 하얀 연기를 마구 뿜어내며 수백 정의 조총이 방포되었다.
마구잡이로 날아든 철환은 그대로 선두에서 오던 조선군 군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댔다.
“흐어억!”
“오메, 나 살려!”
여태까지 들었던 총포 소리 중 가장 큰 소리에 병사들은 일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속한 재장전을 마친 조총병들이 2차 사격을 행했다.
퍼버벅!
들고 있는 짚으로 만든 조잡한 방패를 뚫고 몸통을 뚫는 철환에 의병이 피를 입 밖으로 왈칵 토하며 쓰러져간다.
순식간에 수백여 명이 죽거나 다친 상태에서 조선군의 돌진은 왜군 코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죽여라!”
“우오오옷!”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왜도와 장창으로 무장한 왜군이 돌격을 행해왔고 삽시간에 양측 군대는 서로 뒤엉켜 난전을 펼치게 되었다.
수적으로는 우세할지 모르나 방금 전에 조총 부대의 집중 사격에 기세가 꺾이고 만 고경명 부대는 마치 귀신처럼 사납게 달려드는 왜군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급속도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고경명은 군의 혼란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앞으로 진격하라! 적의 공격에 겁먹지 마라!”
하지만 이 외침은 혼란에 빠진 전장에서 공허하게 사그라질 따름이었다.
이미 혼란은 후방까지 퍼졌고 통제는 이미 불가능했다.
“안 되겠소! 어서 후퇴해야 하오!”
“여기서 우리가 물러날 곳이 어디 있단 말이오!”
곽영의 후퇴 독촉에 고경명은 입 아래 길게 기른 수염을 파르르 떨며 강하게 말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만큼 후퇴는 불가능했다.
“장군이 망설이면 나라도 나아갈 것이네.”
“이보시오!”
곽영의 말을 더 이상 귀담아 듣지 않고 고경명은 스스로 접전이 펼쳐지는 곳으로 말을 몰아갔다.
장수된 자가 앞으로 나서니 이에 고무된 일부의 의병들은 다시 한 번 천천히 조여 오는 왜군을 향해 맞섰다.
이런 의병들의 반격에 왜군은 다시 한 번 조총의 일제 사격을 한 다음 무사들을 앞세워 공격하였다.
“크악!”
“아악, 내 다리!”
총격에 선두에 있던 자들이 쓰러지면서 대열이 무너졌다.
이 사이로 뛰어든 무사들은 왜도를 강하게 휘둘러 의병들을 목을 쳤다.
“이놈들!”
고경명은 분노를 담아 노호를 터트리며 말을 몰아 왜군 사이로 뛰어들었다.
서걱!
말 위에서 휘두른 검에 왜병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때, 고경명을 본 무사 하나가 번쩍거리는 전신 갑주를 입고 말을 탄 채로 달려왔다.
그것을 본 고경명은 피하지 않고 맞서 달렸다.
마침내 거리가 좁혀지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손에 든 무기를 내리 휘둘렀다.
“크헉!”
베인 쪽은 다름 아닌 고경명이었다.
어깻죽지에서 피를 흘리며 낙마한 그를 본 하인이 부랴부랴 달려갔다.
“어르신!”
“이, 이놈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고경명은 아직 싸움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한편, 또 다른 장수인 곽영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황급히 말 머리를 돌렸다.
“곽 장군!”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의병들의 다급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곽영은 뒤도 보지 않고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는 관군들을 빼서 후퇴해 버렸다.
“저, 저런!”
“우리도 후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치도 않은 소리! 모두 자리를 지키고 싸워라!”
고경명 휘하의 의병장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와중에도 전세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급기야 패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아직 전투에 휘말리지 않은 병력까지 도주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임충이 이끄는 기마대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막 도착하여 보게 된 광경에 임충을 비롯한 모두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럴 수가!”
“왜군이 우리를 호락호락하게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부대를 나눠 따로 이동시켰을 줄이야.”
상호는 말하면서도 내내 양측의 싸움이 펼쳐지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름 신경 써서 고경명과 그를 따르는 의병 부대가 원래 역사에서 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래 역사대로 왜군에게 크게 당하는 것을 보자니 입맛이 아주 썼다.
임충은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며 먼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려 했다.
이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 왜군을 향해 기마대를 돌격시킬 요량으로 보였다.
이에 상호는 급히 그를 만류하기 위해 옆으로 말을 몰아간 다음 말했다.
“적은 조총병을 앞세우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대로 저기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에요.”
“아군이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뜻은 알겠지만 지금은 냉철하게 판단할 때입니다. 지금 뛰어들어봤자 우리도 똑같이 당할 뿐이라는 것을 임 무관도 모르지 않지 않습니까?”
“으음.”
상호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임충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상호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후퇴를 최대한 도우면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네.”
임충 역시 상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머리를 식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뒤에서 대기하던 기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는 아군을 돕는다. 전원, 나를 따르라!”
200기의 기병들은 앞서 달리는 임충을 따라 전장에 뛰어들었다.
갑자기 기병이 측면에서 나타나 각궁으로 화살을 쏴대니 추격에 열을 올리던 왜군도 일단 전열을 추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기마대의 돌격에 대비해 조총병 부대가 열을 짓고 방포를 준비했지만 임충의 지휘하에 기마대는 사정거리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까지만 접근하여 각궁으로 화살만 날렸다.
이 사이에 고경명 부대는 후퇴에 성공하여 향교골로 향하게 되었다.
퇴주에는 성공했지만 피해는 컸다.
수천에 달했던 병력 중 사상자만 수백이 넘고 절반에 달하는 병력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고 말았다. 게다가 고경명 자신도 후퇴 중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아버님!”
“으으······ 인후냐.”
후미에서 금산성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았던 고인후가 뒤늦게 합류했다.
고인후는 모포 위에 누운 고경명의 옆에 가서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고경명은 힘겹게 눈을 뜨고는 말했다.
“왜적들에게 패배한 게 참으로 원통하구나.”
“아버님!”
“내 몸이 이러하니 너에게 뒷일을 맡기도록 하마.”
“염려놓으십시오, 아버님!”
큰 부상을 입은 고경명은 더 이상 부대를 지휘할 능력이 없었고 방어사 곽영은 휘하의 관군과 함께 먼저 도주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했기에 고경명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지휘권은 이제 고인후에게 있다고 봐야 했다.
일단 고인후는 각 소부대를 이끄는 제장들을 모아 대책 회의를 열었다.
“비록 왜군에게 길목을 막혀 쓰디쓴 패배를 당했다지만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오. 뭐든지 좋으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제시해주길 바라오.”
“······.”
고인후의 말에 좌우로 자리한 제장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마냥 말이 없었다.
대부분이 지방의 한미한 양반들이라 전술에 관련된 식견은 좋지 못했다.
다른 사람한테 기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상호는 먼저 말을 꺼냈다.
“이대로 간다면 앞뒤로 포위되어져 적에게 섬멸당할 뿐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다시 한 번 이치 쪽 왜군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물론 부위의 말이 틀리지 않네. 하지만 진을 단단히 굳히고 버티는 왜군을 어찌 쉽게 뚫겠는가.”
다케가와가 이끄는 왜군 부대는 전투가 끝나고 다릿골이라는 곳에 진을 친 상황이었다.
다릿골은 이치 고개가 있는 오대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이곳이 막힌다면 사실상 퇴로가 완전히 막혔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본대가 올 수 있는 길은 금산성 쪽으로 크게 돌아서 와야 하는 길이라 적어도 하루는 걸릴 터였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 합니다.”
“뭔가 좋은 수가 있겠나?”
고인후는 상호를 보며 물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상호의 존재를 단순히 조정에서 나온 사람으로만 인식하였지만 고인후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기대도 클 수밖에 없었다.
‘이거 참 난감하네.’
상호는 과도하게 자신이 주목되어진 것에 부담감을 느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온갖 잡다한 지식들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중에 한 가지, 이 상황에서 쓸 만한 기책이 떠올랐다.
“지금 병사의 수만 놓고 본다면 길목을 막은 왜군과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쉬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총 부대 때문이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네.”
고인후는 상호의 말에 순순히 인정하였다.
일본군의 개인 전투력이 조선군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조총의 힘이 컸다.
물론 조선군에도 화약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자총통이라던지 신기전 같은 이 당시로는 위력적인 화력을 낼 수 있는 화약 무기가 있고 조선군 편제에도 개인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승자총통 같은 화약 무기를 쓰는 총통수가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격차가 나는 것은 먼저 지휘관들이 화약 무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화약 무기 자체의 수량도 적은 조선군과 다르게 왜군은 이미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조총이라는 무기를 다루는 전술을 계속해서 실전에 써먹을 수 있을 만큼 발전시켰다.
‘물론 나중에 가면 달라지지만 말이야.’
화약 무기를 전술적으로 사용해 행주 대첩을 이끌어낸 권율이나 해전에서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왜 수군의 배를 각종 총통을 통해 격침시킨 이순신과 같이 무기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조선도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관군이 아니기에 이런 화약 무기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다른 수단으로 조총병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마침 상호에겐 그럴 만한 방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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