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장. 이치 전투 2. (1)
전주성에서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이곳 이치에 당도한 것은 딱 어제 저녁 때의 일이었다.
웅치로 진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왜 주력이 갑작스레 철퇴한 일과 고경명의 부대가 금산성을 공격한 일.
이것들을 연결시켜 왜군의 움직임을 예측한 권율은 이치 고개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여 웅치에 있던 정담, 황진을 부대는 물론이고 전주성에 있던 병력까지 출동시켜 이곳 이치 고개에 와 진을 쳤던 것이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대감.”
“이렇게 적에게 패배해 쫓겨 와 부끄럽기 그지없네.”
권율은 비록 관직에 지금 있지 않지만 한 때 정3품 통정대부 겸 동래부사였고 명망 높은 문인인 고경명을 윗사람으로 대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권율과 마주 앉은 고경명은 아직도 패배의 아픔을 다 지우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고경명은 이곳에 오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했어야 했다. 하지만 상호의 개입으로 역사는 바뀌게 되었다.
권율은 본래 6,000에 달하는 의병 부대였지만 전투에 따른 소실로 3,000가량으로 줄어든 의병 부대를 수비 병력으로 받아들였다.
나이나 전직이긴 해도 관직이 높았던 고경명과 이치 고개에 모인 관군의 대장인 권율 중 누가 합쳐진 군대의 지휘권을 가질 지 여부가 문제였다.
미묘한 문제였지만 다행히 이것은 바로 해결될 수 있었다.
“아무리 내가 나이가 많고 관직도 더 높았었다고 하나 난 이미 고향으로 낙향한 촌부이네. 마땅히 관군의 장수가 지휘를 맡아야 하지 않겠나.”
고경명은 자발적으로 권율에게 자신 휘하의 의병들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주었고 덕분에 분란의 소지는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얼추 정리가 될 쯤, 드디어 고바야카와가 지휘하는 왜군 부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들의 숫자는 약 8,000 정도로 이치 고개를 지키는 조선군보다 조금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케가와의 부대를 돌파한 조선군을 뒤쫓아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던 왜군은 예상과 다른 상황에서 걸음을 급히 멈췄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무래도 우리가 쫓던 조선군말고도 다른 조선군이 미리 이곳에 진을 쳤던 모양입니다.”
“이런!”
고바야카와는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분통을 터트렸다.
이런 그에게 휘하의 승장 안고쿠지 에케이가 조심스럽게 간언했다.
“적의 태세가 견고하니 일단 물러나는 것이 어떨지요.”
“여기서 물러나란 말인가!”
“적의 숫자도 만만치 않고 지형적으로도 우군이 불리합니다. 게다가 다케가와와 말한 그 괴변도 마음에 걸립니다.”
“패전한 책임을 쓰지 않으려는 치졸한 변명일 뿐이다.”
고바야카와는 조총 부대를 무력화시킨 괴이한 현상에 대한 보고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전주성 공략이 어이없이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달아 어이없는 패전을 당한 것에 대한 분노만 있을 따름이었다.
결국 고바야카와는 이치 고개에 있는 조선군에 대한 정면 공격을 선택했다.
이런 왜군의 움직임은 곧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에게 파악되었다.
권율은 차분히 왜군의 진형을 보며 말했다.
“역시 부딪쳐올 모양이군.”
“적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적은 계속해 이동해오느라 지쳐있네. 지형도 우리가 유리하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
권율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하고는 지휘봉을 든 손을 들며 뒤에 있는 부장에게 말했다.
“전고를 울리도록 하게!”
“예, 장군!”
권율의 지시가 전달되고 북을 치는 병사가 열심히 북을 두들겨 나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의 전의를 끌어올렸다.
이에 왜군도 서서히 진형을 갖추더니 무수한 깃발을 올리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권율은 이어서 명령을 하달했다.
“포수들은 발사를 준비하라.”
전주성에서 가져온 여러 문의 총통이 왜군을 향해 겨눠졌다.
“포환을 넣으라.”
“어이영차!”
포수장의 지시에 따라 포수들은 화약을 포구에 넣고 돌을 다듬어 만든 포환인 단석을 집어넣었다.
중앙의 군대가 아니라 지방군이기에 비교적 싼 돌로 된 포환을 쓴 것이다.
총통의 장전이 끝날 쯤에 왜군의 거리는 500보까지 가까워졌다.
“방포하라!”
마침내 총통이 불을 뿜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쾅! 콰앙!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 포환이 왜군 사이로 떨어졌다.
돌로 된 포환은 추락과 동시에 무수히 쪼개져 주변에 퍼졌고 그 근처에 있던 왜병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걸음을 멈추지 마라!”
무사들이 뒤에서 연신 소리치며 독려하자 왜병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거리를 계속 좁혀왔다.
이어서 조선군 궁수들이 쏜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으아악!”
“컥!”
화살에 맞아 뒹구는 왜병들을 넘어 앞으로 조총을 든 조총병들이 나섰다.
몇 걸음 나오는 와중에도 화살에 맞아 쓰러진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미리 심지에 불을 붙인 조총을 조선군 병사들을 향해 겨눴다.
타다다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조선군이 엄폐물 삼은 바위와 나무들에 총격이 가해졌다.
다행히 엄폐물 덕에 사상자는 적게 나왔지만 다들 뒤이어 또 이어질 사격을 두려워 해 선뜻 몸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를 본 권율은 재차 총통을 쏘게 했다.
퍼버벙!
포성과 함께 다시 한 번 왜군 사이에서 요란한 폭발이 있었다.
또다시 수십 명이 넘는 왜병이 죽어나가자 이번에 진격하던 왜군이 겁이 먹고 꾸물거렸다.
겨우 2~300보 정도만 남은 상황에서 양측 모두 서로 밀고 당기며 치열한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피융.
“이크.”
나무 뒤에 있던 상호는 근처에 명중한 총탄에 내밀었던 고개를 숙였다.
계속되는 조총 사격에 차츰 익숙해진 궁수들이 총격이 약해질 때, 즉 새로운 탄환을 장전하는 틈을 타 화살을 날려대는 모습이 보였다.
날아간 화살에 쓰러지는 왜병들도 꽤 되었지만 이쪽도 총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병사도 상당했다.
“아악!”
“어이, 이봐 괜찮나?”
바로 근처에 있는 병사 하나가 어깨에 총을 맞고 뒹굴다가 상호가 있는 쪽으로 왔다.
상호는 얼른 다가가 다친 자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깔끔하게 관통 당했군.”
이리 중얼거리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처 부위를 지혈시키고 붕대로 감았다.
이러는 와중에도 근처에 계속해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상호는 이런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마무리 조치까지 끝내고 살짝 몸을 나무 뒤에서 내밀어 다시 한 번 앞으로 보았다.
“역시 조총이 걸림돌이네.”
위력은 크지만 연사가 힘들고 숫자도 적은 조선군의 총통과 달리, 조총은 숫자가 대단히 많아 훨씬 위협적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궁수들로 하여금 조총병부터 노리게 하고는 있지만 왜군 측도 방패로 조총병들을 최대한 보호하며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오고 있었다.
“나도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상호는 엄폐물 삼던 나무 뒤에서 재빨리 몸을 일으켜 속사로 화살을 날렸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표적으로 노린 상대의 허벅지에 꽂혔다.
이어 옆에서 있던 율도 활을 들고 시위를 당겼다.
그 화살에 또 한 명의 왜병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탕! 타탕!
둘의 행동에 자극받은 조총병들이 사격을 해왔다.
총성과 동시에 두 사람이 몸을 숨긴 나무 주변에서 총격이 요란하게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율은 상호를 보며 말했다.
“나리, 어찌하여 전에 보였던 그 힘을 쓰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 힘? 아아, 속성력 말인가.”
상호는 율의 질문에 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라고 이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특수 능력인 ‘물의 속성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분명 있었다.
‘한 번 바닥까지 힘을 써서 알 수 있었다. 정신력은 그냥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휴식을 해야만 회복이 가능하다.’
지난 번 전투가 끝나고 지금까지 불과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 시간 동안 상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잠깐 눈만 붙이는 정도였다. 그랬기에 소모한 정신력을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다.
또한, 그 때와 같은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한데 지금 있는 곳에선 그것을 확보하는 것도 어려웠다.
“아쉽지만 지금은 권율 장군의 지휘를 믿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상호는 그리 말하곤 다시 몸을 일으켜 화살을 날렸다.
‘매의 눈’과 향상된 궁술 실력을 통해 백발백중의 명중률을 이제 자랑하게 된 상호의 활은 여지없이 왜병을 쓰러뜨려갔다.
“죽어라!”
“와아아아!”
이제 조선군과 왜군의 거리는 20보도 채 되지 않았다.
사실 상 이제부터는 근접전을 피할 수 없었다.
“에이잇!”
“이거나 받아라!”
앞을 팽배수들이 막고 그 뒤에서 창을 든 살수들이 창을 찔러가 막 달려온 왜병의 가슴과 복부를 꿰뚫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에도 아랑곳 않고 두꺼운 갑옷을 걸친 무사들이 창대를 베어 가르고 방패를 밀쳐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로지 싸움법만을 갈고 닦은 무사들은 압도적이었다.
“으악!”
비명과 함께 검에 맞은 군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귀신 가면을 쓴 무사는 피 묻은 왜도를 뒤집어 재차 가까이에 있던 다른 조선군 병졸을 베고자 했다.
하나 그 때!
임충이 벼락처럼 검을 내질러 무사의 왜도를 튕겨냈다.
“이 놈!”
무사는 임충을 상대로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뒤에 다시 한 번 일격을 취하려 했다.
이런 무사의 움직임을 읽고 임충이 한 발 먼저 찌르듯 검을 출수해 상대의 옆구리를 때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앞으로 걸음을 옮겨 오른쪽 어깨로 무사의 가슴을 타격했다.
“크윽!”
무사는 충격에 뒷걸음질을 쳤다.
간격을 확보한 임충은 내금위 군관으로서 단련한 검술을 십분 발휘하며 상대의 가슴을 사선으로 깊게 베어내는데 성공했다.
챙! 카앙!
임충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왜군의 난입은 상당히 진행되어 곳곳에서 난전이 펼쳐졌다.
이런 혼란 속에서 상호 역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혼전이라면 조총을 쏘지는 못하겠지만······.”
말을 이으면서 상호는 앞에서 달려든 왜병을 옆으로 뛰어 피하고 그대로 발차기로 상대를 멀찍이 날려버렸다.
전체적으로 조선군이 밀리는 양상이라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호오오오!”
괴상한 기합과 함께 조선군 병사들을 베는 붉은 갑주를 입은 무사가 상호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언뜻 봐도 꽤 실력이 있어 보이는 강자였기에 상호는 상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이때, 그가 가진 ‘매의 눈’ 능력이 무사의 움직임을 아주 세세하게 포착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왼쪽으로 들어온다.’
한 수 먼저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해낸 상호는 그 판단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쇄애액!
정확히 예상대로 무사의 일격은 왼쪽 위에서 사선으로 빠르게 내려질러져 왔다.
“이야압!”
기합을 발하면서 상호는 무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비록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서툴지만 검을 휘두르는 속도만큼은 무사보다 빨랐다.
채앵!
“우으윽! 뭐지 이 묵직한 검은?”
무사는 상호의 검을 막아내고는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거기에 괴력까지 더해진 것에 놀란 것이다.
일본 말로 말했기에 그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상대가 자신의 능력에 위압되었다는 것을 안 상호는 더욱 공격하며 전진했다.
몇 번 정도 칼부림을 이어졌다.
“힘을 대단하지만 검술을 서툴구나.”
무사는 상호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노려왔다.
챙! 채앵!
“우왓!”
갑자기 무사의 검술이 현란해지니 상호는 그것을 상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매의 눈’ 능력을 활성화해 무사의 동작을 예측하여도 다음 두 수, 세 수를 계산하고 능숙하게 검술을 펼치는 무사의 움직임에 차츰 압도되었다.
궁지에 몰리게 된 상호.
그런 그를 돕기 위해 줄곧 등 뒤의 적을 견제하던 율이 끼어들었다.
“핫!”
짧은 기합과 함께 유수와 같이 검을 휘두르며 율이 무사를 몰아붙였다.
율의 검술은 무사의 검술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휴우.”
율 덕분에 겨우 한숨 돌리게 상호는 뺨을 따라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제대로 검술을 갈고 닦은 상대에겐 힘만 갖고는 상대가 안 되는구나.”
무사와 호각으로 싸우는 율을 보며 상호는 나중에 그녀에게 검술을 가르쳐달라 부탁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율을 돕기 위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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