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조선시대에 가다-49화 (49/127)

十장. 북관대첩. (1)

나흘 뒤, 함경도 길주.

함경도 각지 붙은 북평사 정문부의 궐기문을 보고 수백 명의 장정들이 이 땅에 모여들었다.

모두 왜군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기 하나로 모인 자들이었다.

“저 분인가?”

“그런 것 같으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공터 한쪽에 있는 크고 널찍한 바위 위로 무복을 입은 정문부가 올라갔다.

두정갑에 허리에 장검에 찬 완전 무장한 모습을 한 그를 보며 다들 숨을 죽이고 침묵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침내 정문부가 입을 뗐다.

“모두 이렇게 모여주어 우선 고맙다. 지금 이 나라는 큰 환란에 빠져있다.”

정문부의 우렁찬 발성에 다들 귀를 기울였다.

시작부터 모두의 집중을 이끌어낸 정문부는 다시금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미 알고 있는 자들도 있겠지만 지금 이곳을 향해 왜적들이 몰려오고 있고 또한 인적 없는 곳에서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흉악한 요괴들이 나타나고 있다.”

정문부는 연설에서 왜군뿐만 아니라 몬스터에 대한 존재도 언급했다.

그런데 의외로 모인 자들 거의 대부분이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도처에서 몬스터를 발견했다는 목격담과 함께 몇몇 고을이 하룻밤 사이에 전멸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나와 그리고 관군이 백성을 지켜야 함으로 옮음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관군의 힘만으로는 왜적과 요괴 모두로부터 백성들을 지킬 수가 없다.”

“······.”

“이에 본관은 그 부족한 힘을 그대들 백성들에게 빌리고자 한다. 나와 함께 이 나라와 조정을 지키는데 함께 싸워주지 않겠는가.”

정문부의 말에 모인 자들 중 한 명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보고 임금을 위해 싸우는 말입네까!”

“궁궐을 버리고 혼자 도망친 왕을 위해서 싸우라면 난 그냥 가겠소.”

이미 도성을 떠나 의주로 피신한 선조의 이야기는 이곳에서도 파다했다.

왕을 위해 싸우기 싫다고 하는 이런 말은 이전이었다면 역모에 준하는 큰 대죄로 치부되었겠지만 지금은 동조하는 목소리를 키워낼 따름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급변하였지만 정문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본관이 의병을 일으키고자 함은 무엇보다 함경도를 지켜내어 이곳에 사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함이다. 만약 조정과 국왕 전하를 위해 싸울 수 없다면 자기의 가족,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라.”

정문부는 자신의 뜻을 강요치 않고 대신에 여기 모인 이들이 진짜로 모인 이유를 갖고 설득을 했다.

분명 이것은 큰 효과가 있었고 아까까지만 해도 싸우기를 꺼리던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싸우자!”

“와아아아아!”

한껏 고양된 마음으로 장정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마침내 수백 명의 의병이 새롭게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버드나무 아래서 보던 상호는 잘됐다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뒤에서 율이 말을 걸었다.

“이제 다음은 어찌하실 건가요?”

“장계에 올라온 요괴를 사냥하는 일까지만 정문부 공하고 같이 할 생각이야. 그리고 그 동안에 요괴 사냥에 필요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가르치고 난 다시 또 다른 의병장을 만나러 가야겠지.”

이미 의병장 중 한 명인 고인후를 만났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의병장들도 많다.

현재 조선 팔도에서 이미 역사에도 이름을 남긴 의병장들이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김덕령, 곽재우, 사명대사.

이 밖에 다른 의병장들까지 만나서 그들을 설득해 몬스터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만들어야 했다.

지금까지의 전례를 통해 앞으로 이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이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점차적으로 몬스터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가니 결국엔 모두를 포섭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는 바였다.

“북평사 어른!”

아직도 장내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때에 한 군관이 허겁지겁 바위 위에 있는 정문부에게 달려왔다.

군관의 출현에 짐짓 놀랐으면서도 정문부는 자신을 보는 시선에 침착함을 유지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 소란인가.”

“그것이···회령에서 국경인이라는 자가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를 붙잡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뭐라고!”

반란이라는 말에 정문부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 모습에 모여 있는 모두가 웅성거렸다.

한 편, 이 상황을 보게 된 상호는 왜 정문부가 저리 놀랐는지 그 까닭을 바로 짐작해낼 수 있었다.

‘기어코 그 일이 벌어진 모양이구나.’

사 속에 있던 국경인의 반란이 시기가 조금 틀리지만 결국 벌어진 것이다.

의병을 모은 바로 첫 날에 들려온 안 좋은 소식은 정문부를 고심케 했다.

비록 이곳 함경도 지방에서 개망나니 행동이나 일삼았다지만 그래도 선조의 명을 받아 온 두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이 반역자 국경인 손에 사로잡힌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진짜 도움이 안 되는 두 왕자로군.”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필 정문부가 막 의병을 일으킬 찰나에 일이 벌어지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어쨌거나 떠나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었다.

“서로 힘을 합쳐 왜놈들을 때려잡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역모라니!”

“당장 국경인이라는 자를 잡아다 오체분시하고 두 왕자님들을 구해야 할 일이오!”

“옳소!”

정문부 밑으로 모인 함경도 지방의 관리와 향반들은 두 왕자가 붙잡혔다는 소식에 분개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분위기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국경인이라는 자가 그렇게까지 한 것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솔직히 그렇지 않소. 그 두 왕자가 이곳에 와서 한 게 무엇이었소. 아녀자를 희롱하고 매일 같이 주색잡기나 하지 않았소이까.”

“크흠!”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다들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였고 몇몇은 헛기침을 했다.

이런 분위기에 용기를 얻은 다른 사람도 한 마디 꺼냈다.

“솔직히 말해··· 난 그 두 왕자가 그리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속이 뻥 뚫리는 심정이었소.”

“이보게! 말이 지나치지 않는가.”

“이 진사도 그 작자들이 벌이는 만행을 직접 보면 그런 말 못할 것이외다!”

두 왕자가 얼마 전까지 지냈던 곳의 토호는 울화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미 왕자들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이런 반응에 다들 겸연쩍은 태도를 취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정문부는 두 왕자를 구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래도 두 분은 우리 조선의 왕자네. 향후 전쟁의 판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어떻게든 반역자의 손에 왕자님들을 구해내야 하네.”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기에 왕자에 대한 앙심을 품은 자들도 반대 의견을 더는 펼치지 못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구출하는 것을 우선시하기로 입장을 정하게 되니 사실 상 남쪽에서 올라오는 가토 기요마사의 2군보다 먼저 국경인과 그를 따르는 반란군을 먼저 상대하게 되었다.

현재 국경인의 반역 세력은 회령에 있고 그에게 동조하는 그의 숙부인 국세필이 경성, 정말수가 명천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력만 놓고 본다면 현재 정문부 휘하의 세력과도 비등한 수준이었다.

“이 싸움은 결코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

“지당한 말씀입니다만 반란군의 세력은 이미 여러 고을까지 확대된 상태입니다. 우선 국경인이 있는 회령까지 가려면 경성과 명천을 지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반란군과의 충돌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차라리 협상을 통해 시간을 벌면서 병력을 더 확보하고 공세를 펼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문부의 방침에 반대되는 의견이 여럿 나왔다.

그 의견들 또한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런 까닭에 정문부는 고집대로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정문부는 돌연 가장 끝자리에 앉아 가만히 상황을 보던 상호에게 말을 걸었다.

“이 부위는 무슨 복안이 없는가?”

“예?”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상호는 당황해했다.

외부 참가자로서 그냥 향후 왕자 건이 어떻게 결정될지 알기 위해 참가만 한 터라 이런 질문은 난감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두 열로 앉아 있는 참석자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니 부담은 더욱 커졌다.

“크흠.”

헛기침으로 잠시 시간을 벌면서 대답을 생각해낸 상호는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서 말할 입장은 아닌 것 같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정문부 공의 말씀대로 시간을 길게 끌지 말고 반란군을 격퇴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어째서인가.”

상호에게 반문한 자는 만호 고경민이라는 군관이었다.

그를 보며 상호는 자신이 아는 역사를 토대로 설명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이라는 자도 시간을 오래 끌면 세가 약한 자신들이 관군에 의해 토벌될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시급히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군의 힘을 빌리려 할 테지요.”

“반란군이 왜적과 손을 잡는단 말인가?”

“현실적으로 그들이 앞으로 살아남을 길은 그것뿐이니 당연히 그럴 겁니다. 그리고 붙잡힌 두 왕자는 왜군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좋은 선물이죠.”

상호의 말에 정문부를 비롯한 모두가 이 추측이 현실적으로 될 가능성이 크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정문부가 말한 대로 신속하게 반란군을 토벌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게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던 상호를 정문부가 잠시 불러 세웠다.

“부탁이 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반란군을 무찌르고 두 왕자님을 구하는데 힘을 보태주지 않겠나.”

“그것은······.”

상호는 난색을 표했다.

이치 전투 때야 어쩔 수 없이 휘말릴 결과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 시가 급한 마당에 반란군과의 전투에 참가하기는 여러모로 곤란한 터였다.

이런 상호의 내색을 읽은 정문부는 놀랍게도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다시 부탁해왔다.

“지금 반란군뿐만 아니라 왜군, 그리고 자네와 함께 상대했던 요괴들도 막아야 하는 실정이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하기엔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네.”

“그럴 말씀 마시죠. 그리고 저 같은 게 무슨 큰 도움이 된다고······.”

“아닐세. 이번에 요괴들과 싸울 때 보여준 자네의 높은 판단력은 전장에서도 크게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네. 그 저력을 부디 나를 위해 써주지 않겠는가.”

“이것 참.”

진심으로 도움을 구하는데 도저히 거절만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요괴 토벌 건으로 이곳에 며칠 더 있을 예정이었기도 하고 또 앞으로 함경도 지방에서 몬스터 토벌의 역할을 맡아줄 정문부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더 튼튼히 하게 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 말씀해 오신다면, 오래 있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반란군을 상대하는 것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정문부는 답변에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손으로 상호의 팔을 힘껏 두들겼다.

꽤나 격했기에 팔이 얼얼해 상호는 인상이 찡그러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정문부는 푸근한 웃음을 보이며 상호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자네와 나는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나이가 몇 살인가.”

“스물일곱입니다.”

“오, 나와 동갑이군 그래. 더 잘 되었는 걸.”

정확히 따지면 미래에서 온 상호 쪽이 까마득한 연하라 할 수 있었다.

정문부는 갑자기 나이를 묻더니 돌연 이렇게 제안해왔다.

“앞으로 나이도 같은데 서로 편하게 말을 놓고 친구로 지내도록 하지.”

“예?”

상호는 정문부의 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나이가 같다고 해도 한낱 미관말직인 부위라는 관직만 받았을 뿐, 신원도 불분명한 자신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해올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답변을 선뜻 못 하는 상호를 보며 정문부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긴장할 것 없어. 딱히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진심으로 상호 자네가 마음에 들어 개인적으로 친분을 더 쌓고 싶을 뿐이니 말이야.”

“그렇다면야······.”

역사 속의 위인과 친구라니.

묘한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나쁘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잘 부탁한다.”

“그, 그래.”

상호는 먼저 손을 내미는 정문부의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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