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五장. Ⅲ단계 게이트. (1)
다시 김응서 장군 휘하로 들어온 상호와 토벌대는 별다른 임무를 받는 일 없이 그저 한양에서 대기를 이어갔다.
물론 아무것도 않고 그냥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임충들의 일도 그렇고 막강한 능력자가 된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사실을 이항복에게 서신으로 전하고 답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후, 답답하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것이라도 마시세요.”
“아, 고마워.”
강가에서의 일이 있고 난 이후로 부쩍 가까워진 율이 건넨 식혜를 마시니 답답한 속이 조금은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때, 상호가 있는 곳으로 김태진이 찾아왔다.
“토포사 나리,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이 찾아왔습니다.”
“선전관이?”
한양 수복에 따라 의주에서 다시 몽진하는 조정에서 선전관이 왔다는 얘기는 드디어 보낸 서신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랬기에 내심 기대를 품고 선전관을 맞이했다.
그런데,
“명의 원군 중 일부가 맹산현에서 곤경에 처했다고 한다. 그러니 시급히 그곳으로 가서 명군을 도우라.”
“이것이 저희에게 내려온 명령인 겁니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상태로 선조의 전언을 들은 상호는 이리 물었다.
이에 선전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하다.”
“혹 제가 보고한 내용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까?”
분명 이항복을 통해 남쪽의 의병들이 아주 위급하다는 사실과 가토 기요마사를 조심해야 한다는 정보를 선조도 전해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으면서 정작 평안남도 내륙에 가서 명군을 도우라니.
상호로선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선전관은 모르쇠로 나왔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전하의 말씀을 전할 뿐이다.”
“하!”
이렇게 나오니 상호로선 더 이상 선전관과 할 말이 없었다.
그를 보내고 향후의 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모두 모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모두와 상의를 하려 모이라 한 겁니다.”
“아니 대체 명군이 맹산 땅에 가서 뭘 한답니까. 그곳엔 왜군이 쳐들어간 일도 없지 않습니까.”
“아마도 요괴 토벌을 하러 별도로 움직인 병력이겠지. 그리고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상대한 요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상호는 내심 치미는 울화를 삭히며 말했다.
이에 남준이 넌지시 말했다.
“아마도 명군 측이 전하께 도움을 구한 것 같습니다. 전하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돕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후우! 마음에 들지 않아. 어째서 우리가 우리 도움을 제 발로 걷어찬 작자들을 돕기 위해 가야 하지? 정작 도와야 할 우리 편은 도우러 가지 못하고 말이야?”
“심정은 저도 십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주상의 어명이 않습니까.”
“나도 알아. 그냥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말한 것뿐이야.”
심정적으론 명령을 무시하고 곽재우와 임충을 구하고 가고 싶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어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상호는 말했다.
“어명을 따르더라도 그와 별개로 위기에 처한 곽재우 장군의 사정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확실히 아군에 위기에 처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날 일이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행히 네 명의 군관 모두 상호와 같은 뜻을 표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도울 방법이었다.
“한양도 수복했겠다, 곧 관군과 명의 원군이 남쪽으로 진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리되면 왜군도 다른 쪽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니 자연히 위기가 해소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김태진의 말대로 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것은 너무 희망적인 관측이다.
아직 왜군은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있고 한반도 남쪽 지역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다.
그런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리고 북쪽에서의 공격을 막기 위해 후방부터 정리하려 들 가능성이 더욱 컸기에 오히려 곽재우 부대에 대한 위협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든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으음.”
뭔가 즉각적으로 도울 방법이 필요한데 누구 한 명 좋은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상호는 슬쩍 자신의 뒤에 호위 역으로 참석한 율을 보았다.
‘그녀가 이곳까지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
직접 돕지 못하더라도 뭔가 간접적으로 도울 방법이 찾아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상호가 불현 듯 말을 꺼냈다.
“백 군관.”
“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상호는 군관 중 한 명인 백준수를 따로 불렀다.
문득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낸 것이다.
“고인후 장군에게 가서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받아 먼저 곽재우 장군이 피신해있다는 곳을 가줘.”
“전라도의 의병장인 고인후 장군말씀이십니까.”
“맞아.”
고인후는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아깝게 전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상호의 개입으로 그는 그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형인 고종후와 함께 수천의 의병 부대를 이끌며 왜군을 상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라도 지방에 출현한 몬스터 토벌에도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한 소문은 이미 팔도에 자자했기에 백준수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고인후 장군은 지금 의병 중 가장 큰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데다가 또 나하고 친분이 있어 분명히 많은 병력을 내어줄 거야. 그들과 함께 경상도로 가서 곽재우 장군을 돕고 있으면 돼.”
“예, 알겠습니다.”
백준수는 상호의 지시에 따라 바로 전라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리 조치했음에도 여전히 마음에 걸리게 한 가지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 그 자를 지금 당장 보지 못한다는 게 찝찝하네. 율의 말대로라면 평범한 인간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능력자도 그자의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
한 사람의 능력이 막강해도 화포와 조총 같은 집단으로 큰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 즐비한 전장에선 큰 활약을 못할 것을 잘 안다.
그래도 초인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은 존재이기에 충분히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점을 알기에 상호로선 그런 그가 전장에 나타났을 때의 상황이 걱정되는 바였다.
‘지금 내가 그를 고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알아서들 잘 하길 바라는 수밖에.’
무대책에 가까운 생각이지만 어쩌겠는가.
제대로 된 관직도 없는 어정쩡한 신분인 상호로선 조선 관군과 명군의 전략 방침에 관여할 방법이 전혀 없기에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그들이 움직이길 빌 수밖에 없었다.
어명에 따라 상호는 토벌대를 이끌고 바로 맹산으로 출발했다.
행주산성에서의 전투로 숫자가 다소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십 남짓의 병력이 있고 또한 든든한 전력인 율이 합류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몬스터 게이트쯤은 손쉽게 공략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맙소사.”
아직 목적지까지 한참 남은 시점에서 상호는 앞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파장.
그것은 몬스터 게이트의 존재감이었다.
‘말도 안 돼. 몬스터의 파장이 이렇게 먼 곳까지 선명히 전해지다니.’
보통 Ⅰ,Ⅱ등급 게이트라면 해당 장소에 가서야 그 파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명군이 노렸다는 게이트가 있는 곳에서 20km나 넘게 떨어진 위치에서 파장이 느껴진다?
이것을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Ⅲ단계··· 아니 어쩌면 Ⅳ단계일지도 몰라.’
차라리 Ⅲ단계라면 다행이다.
몬스터의 수준이나 규모가 매우 커져 있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인원과 장비면 공략이 가능하니깐.
하지만 Ⅳ단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현대에서도 Ⅳ단계부터는 어지간한 수준의 레이트 팀이 아니고는 감히 공략할 수 없는 난이도다. 만약 여기에 그게 떴다면 정말 큰일인데.’
제발 아니기를 빌며 상호는 일단 명군 숙영지로 향했다.
허리까지 오는 눈을 뚫고 도착한 명군 숙영지는 아주 참담했다.
“우으으으.”
“아파! 아파!”
중국어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은 명군 토벌대 소속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몸은 하나같이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같이 여기까지 동행한 허준은 환자들을 보고는 그들을 진맥했다.
“심각한 중독 증세군. 한데 이러한 증세는 처음 보네.”
“구울의 시독입니다.”
“그게 뭔가?”
“죽은 자의 시체를 파먹는 요괴가 가진 독이라고 해두죠.”
상호는 이곳에 나타난 몬스터가 불사체 혹은 언데드라 불리는 존재임을 파악하고 눈을 찡그렸다.
구울의 시독은 마비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방치하면 살을 썩게 한다.
몬스터 부산물을 혼합해 제조하는 치료제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재료가 없어 만들 수가 없었다.
“독이라면 내 치료 능력으로 해독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명대사의 말에 상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순수한 치료술만이라면 썩은 살 대신 새살이 낫게 할 수 있겠지만 내부로 침투한 독을 제거하긴 어려웠다.
그렇지만 허준의 ‘생명력 갈취’ 능력을 이용한 생명력을 부여한다면 상처가 회복된 환자 스스로가 독기를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사실을 곧 두 사람에게 전했다.
“이번에도 같이 힘을 합쳐 보세.”
“좋소이다.”
비록 명나라의 병사라도 똑같은 환자이기에 사명대사와 허준, 두 사람 다 치료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중독된 자들의 치료를 맡기고 상호는 따로 지휘관을 만나러갔다.
그런데 지휘관은 의외로 아는 자였다.
“위 장군님을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크흠! 어서 오게.”
일전에 상호의 토벌대가 윈디고 무리를 토벌할 때 참관하였던 명의 무관 위청홍은 상호를 보고 떫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이 토벌대의 대장이 위 장군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흠흠.”
“아 먼저 장군이 되신 것을 축하드린다는 것을 깜빡했군요.”
위청홍은 상호가 평양성 전투를 하러 떠난 이후로 이여송으로부터 유격장군의 직위를 하사받고 몬스터 토벌을 위한 유격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2,500의 정병을 거느리고 평안도, 함경도 일대에서 몬스터를 토벌하고 몬스터 코어를 채취해 본대에 보내던 일을 하던 그가 이렇게 상호를 찾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자네의 지식과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네.”
“그만큼 어렵다는 말씀이십니까?”
“분하지만 나로선 도무지 해결책이 없네. 그러니 자네가 꼭 좀 도와주게나.”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위청홍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줄이야.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으음, 알겠네.”
위청홍과 그가 이끄는 토벌 부대가 이곳 맹산에 온 것은 열흘 전의 일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몬스터 토벌을 성공시켰던 위청홍은 가져온 홍이포를 비롯한 화포로 몬스터 근거지를 타격하고 전방위로 포위망을 구축해 조금씩 안쪽으로 진입하는 전략을 펼쳤다.
처음엔 순조로웠다.
반쯤 썩은 시체들이 설원 위를 걸어올 때는 식겁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대응했다.
문제는 나흘째였다.
“우리는 무난하게 그 걸어 다니는 시체를 처치하면서 전진했지. 그런데 그 때, 놈이 나타났어.”
“놈이라면 보옥을 가진 상위 개체입니까?”
“아마도···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놈의 실력이었다.”
뼈로 된 말을 타고 설원을 달려 무참히 병사들을 썰어대던 검술.
그것은 북방에서 거란과 여진, 몽골의 기병들과도 싸워본 바 있는 병사들마저 놀라 자빠지게 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순식간에 대열이 와해되고 그 틈을 노리고 시체들이 덮치니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 우린 전날에 죽은 병사들과 다시 싸워야 했지.”
“······.”
언데드에게 살해된 자는 다시 언데드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기에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호였다.
‘최악이군, 하필 데스 나이트라니.’
위청홍의 목격 정보가 틀리지 않다면 그 강력한 몬스터는 바로 ‘데스 나이트’일 게 확실했다.
지난 번 고니시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유도했던 오우거와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게 없는 상급 몬스터가 이번 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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