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제8화 나의 패배라, 참신한 생각이군
숲속에 잠시 적막이 일었다.
알렌이 짧게 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말하는 까마귀라면 까마귀 기사단 아니에요? 그들이 까마귀 전령을 통해 대화를 나눈다고 알고 있거든요.”
“나도 까마귀 기사단을 떠올렸는데.”
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건가요?”
프레디가 내게 불안한 눈빛을 던졌다.
까마귀 기사단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에 안 좋은 예감을 느낀 듯했다.
나는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시며 태연히 답했다.
“아까 그런 까마귀를 봤다. 신기하게 사람의 말을 하더군.”
“네에?!”
세 놈은 한 사람처럼 동시에 펄쩍 뛰더니 각기 다른 말을 쏟아 냈다.
“아니, 언제요!”
“어디서 보셨는데요!”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정신없이 구는 녀석들을 손짓으로 앉히고는 친절히 답해 주었다.
“팔체라토를 죽인 직후, 그 자리에서 봤다. 국새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죽이겠다더군. 너희들도 아는 것을 보니 꽤 유명한 놈들인가 보지?”
잠시 충격에 빠져 말을 잇지 못하던 녀석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습니까!”
사색에 질린 알렌이 소복이 쌓인 뼈다귀 더미를 가리켰다.
제일 많이 처먹은 놈이 저런 말을 하니 괘씸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나는 나답지 않게 인내를 발휘하며 말했다.
“조만간 조우하게 될 테니 조급해할 필요 없다.”
재촉하지 않아도 그들은 우리를 뒤쫓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터.
만남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니 그때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저는 지금 그런 상황을 피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거라구요!”
“어떻게?”
내가 묻자, 눈을 희번덕거리던 알렌은 할 말을 잃고 체스와 프레디를 번갈아 보았다.
당연히 그들의 얼굴에는 답이 적혀 있지 않다.
내가 말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그들에게 국새를 넘겨줄 것이냐?”
“아니요.”
내게 시선을 돌린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나란히 줄지어 바라보는 게 꼭 참새 새끼들 같다.
“그럼 그들과 마주치지 않고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아니요.”
녀석들은 동시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거다.
국경을 넘으려면 말을 타고 2주를 달려야 한다고 했다.
국새를 찾겠다고 눈이 시뻘게진 놈들을 따돌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앉아 있어.”
“그럼 이제 어쩌죠? 이대로라면 국새도 빼앗기고 저희도 다 죽게 생긴 것 같은데.”
알렌이 생각도 않고 물었다.
이 자식은.
이곳의 지리와 작금의 상황은 자기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임에도 내게 의지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관뒀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나도 인내심이 많이 늘었다.
“그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는 길잡이 노릇이나 해.”
“그래도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나한테는 그런 게 필요치 않으니 귀찮게 굴지 말고 너희끼리 얘기해라.”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예? 계획이 필요 없다니요. 까마귀 기사단은 팔체라토 녀석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요.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알렌 녀석이 입술까지 쭉 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꼭 이렇게 말로 하면 못 알아 처먹는 놈이 있다.
그냥 넘어가려 했더니만 매를 벌지 아주.
내가 물었다.
“그래서 네 말은 무언가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럼요!”
알렌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 계획을 설명해 줄 테니 여기 잠시 앉아 봐라.”
알렌은 우물쭈물하며 내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덩치는 큰 게 겁은 더럽게 많아 가지고.
나는 그를 보며 친절히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이제 내가 네 머리통을 후려칠 거다. 한번 막아 보거라.”
내 뜬금없는 소리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나 본데.
나는 가차 없이 알렌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빡!
“끄악!”
비명과 함께 자신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감싼 알렌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엄살은.”
“으으, 엄청 아프다고요! 갑자기 왜 때리세요!”
울상인 녀석이 내게서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저만치 도망간 녀석은 내게 잔뜩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맹수를 보는 초식동물의 눈빛이랄까.
속이 개운해진 나는 본론을 말했다.
“내가 널 때리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웠냐?”
“……아뇨.”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네가 날 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돼요?”
그가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한 대 더 쥐어박을까?
나는 주먹을 쥔 채, 인내를 발휘하여 말을 이었다.
“네가 날 때릴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만약 그것을 원한다면 너는 나와의 격차만큼 아주 치밀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워야 할 거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냐?”
산들바람이 머리칼을 흔들며 지나갔다.
“계획은 약한 놈들이 세우는 거다.”
눈높이를 맞춘 친절한 설명.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들의 표정은 여전했다.
이리 밥을 떠먹여 줘도 싫다고 뱉어 내니.
얌전히 있던 프레디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이해했습니다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의 경우?”
나는 만약이란 것을 염두에 둔 지가 너무 오래돼서 유추하기도 귀찮았다.
프레디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네스 님이 패배할 경우입니다.”
“오호, 그럴 수도 있겠군.”
나는 녀석의 의견에 무릎을 쳤다.
방금 낚은 활어만큼 참으로 신선한 의견이었다.
내가 패배할 경우라니.
내가 언제 져 봤더라?
굉장히 오래전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거지로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사부님 이외의 사람한테는 져 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진심으로 그를 칭찬해 주었다.
“정말, 참신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칭찬을 들은 프레디는 예상과는 다른 나의 반응에 당황해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중 한 명이 제네스 님을 보필하고 나머지 둘은 다른 길로 움직이면 어떨까요? 그렇게 되면 저들의 전력이 조금이나마 분산될 테니, 제네스 님이 국경을 벗어날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둘이 유인책이 되겠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는 결심을 굳혔는지 단호하게 답했다.
눈빛이 사뭇 비장하다.
팔체라토의 병사들도 어쩌지 못해 도망친 녀석이 유인책이 되겠다는 건, 죽음을 각오했다는 의미.
실력은 없어도 기개는 있는 놈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던지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길이나 안내해. 살려 준다는데도 죽으려고 용을 써요. 왜, 제사라도 지내지 그러냐?”
“예?”
녀석이 어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여전히 멀찍이서 경계의 눈빛을 던지고 있는 알렌을 가리켰다.
“너도 쟤처럼 맞아야 정신 차릴래?”
“하, 하지만 상대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쓰잘데없는 걱정 마. 적어도 나는 안 죽으니까.”
“…….”
“그 자식들이 대군을 이끌고 와도 나는 안 죽어. 그러니까 어딜 가도 죽는 너희들은 얌전히 내 옆에 있어. 그게 너희가 살 확률이 가장 높으니까.”
나는 답지 않게 그들을 챙겨 주었다.
나라를 저버리는 게 더 잘살 수 있는 세상임에도 독립군이 된 자들이다.
죽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녀석들은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나 본데.
“왜? 지금 죽고 싶어?”
“아, 아닙니다.”
녀석들은 내가 주먹을 들어 보이자, 그제야 얌전히 굴었다.
역시,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주먹이다.
* * *
“한심한 새끼.”
고작 촌부에게서 국새를 가지고 오는 것도 못 해 이 사달을 내다니.
까마귀 기사단 3소대장, 러셀은 싸늘한 눈으로 팔체라토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을 부근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이 작전에 선택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꼬여 버린 것이다.
절벽이 무너지며 만들어진 바위 더미.
그 앞에는 흑색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주변에 남아 있는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산짐승이 시체들을 헤집어 놓기는 했어도, 무언가를 유추하기에는 충분한 정보들이 남아 있었다.
“흠.”
주변의 정보를 종합한 러셀은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가 까마귀 전령을 통해 본 자는 한 명의 청년뿐이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다수 간의 전투가 벌어졌을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와서 보니 적은 한 명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자신이 본 청년이 이들을 홀로 베었다는 의미.
최초의 전투는 두 명의 기사만이 그를 상대한 듯했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흔적은 일 대 다수의 대결이었다.
그들의 시체에 남은 검흔은 세기의 명검으로 잘린 것처럼 깔끔했다.
다수와 상대하다 보면 체력적인 문제와 제대로 된 검을 휘두를 여유가 부족해지기에 절단면의 깔끔함이 무뎌질 법도 한데, 모두에게서 한 치도 다름없는 매끈한 검흔이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바닥에 남은 흔적을 보면 공방이 길게 벌어진 것도 아니다.
이들은 한 사람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말 그대로 학살당했다.
‘최소 익스퍼트 중급 이상.’
러셀은 적의 전력을 대략적으로 가늠했다.
믿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자신보다 우위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상념에 젖어 있던 그의 앞으로 기사들이 도열했다.
새까만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육중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최대한 빠르게 쫓는다. 생각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지원 병력이 붙는다면 난감해진다.”
“네, 알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강자가 걸음 앞에 있었다.
다들 실력이 있는 기사들, 이곳에 남은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강해봤자 개인의 기량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적의 강함을 알면서도, 누구도 자신들이 패배하는 경우를 생각지는 않았다.
그것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 * *
광활한 들판, 저 멀리 드높은 성벽이 보였다.
정오의 태양이 도시 위에 걸려 있었다.
두 다리로 이틀을 달려 도착한 곳이었다.
거대한 성문을 멀리 두고 걸음을 멈춘 나는, 고개를 돌려 지렁이보다 느려 터진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저 먼 곳에 점처럼 찍혀 있는 녀석들.
광야가 이어져 그들이 보였지, 가시거리가 짧았으면 그마저도 안 보였을 것이다.
경공술을 따로 쓸 줄 모르는 녀석들이다 보니, 내가 가볍게 걷는 것도 제대로 따르지 못해 저 모양이다.
“헉…… 헉…… 헉……!”
한참이 걸려 내 옆에 선 세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가슴팍을 들썩거렸다.
나는 그 한심한 모습에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쯔쯧.”
“제네스 님이 빠르단 헉헉, 생각은 커헉, 안 해 보셨습니까?”
알렌 녀석이었다.
맷집이 좋아서 그런지 내 말에 가장 토를 다는 녀석이다.
“네 말 듣다가 내 숨이 넘어가겠다. 저 앞에서 신분을 검사하는 것 같은데, 너희들은 통과할 방도가 있느냐?”
“헉헉, 저희는 신분이 헉헉, 있습니다.”
바닥을 기고 있는 체스가 말했다.
고작 이만큼 뛴 거 가지고 아주 난리가 났다.
“후우웁! 제네스 님은 신분증이 있으십니까? 후아아!”
프레디가 숨을 한 번에 깊게 들이마시더니 다다다 말하곤 크게 호흡을 뱉었다.
“나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저 녀석들의 이목을 속이는 것쯤은 네놈들의 목을 베는 것만큼 쉬운 일이니.”
“……왜 그렇게 살벌한 비유를 하십니까.”
“이러는 게 알기 쉽거든.”
나는 목을 부여잡은 채 꿍얼거리는 그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좀 가십시오!”
등 뒤로 녀석들의 짧은 비명이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차라리 먼저 가서 기다리고 말지, 저 녀석들이랑 같이 가다가는 내 속이 터져 죽거나 저놈들이 내 손에 먼저 죽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같이 가자고 불러 대는 꼴이라니.
이래저래 죽고 싶어 안달 난 녀석들이다.
경쾌한 걸음으로 성문과의 거리를 좁히자, 검문 중인 경비병들이 자연스레 눈에 담겼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새끼들은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