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제14화 증명 (2)
현재 프렌치아에는 새로운 왕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
왕이 될 자격 또한 없고.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더 이상 프렌치아 국민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프렌치아의 부국강병을 염원하지도 않는다.
내 꿈은 이제 그들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나를 움직이는 힘은 오로지 케케묵은 전생의 것.
나는 프렌치아를 내가 알던 프렌치아로 돌려놓는 것으로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내게는 그럴 힘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딱 거기까지다.
그 이후에 나는, 내가 원하던 자유롭고 평안한 삶을 살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
그래서 자격을 갖춘 자가 필요했다.
전생의 내가 가졌을 왕위를 이어받아 프렌치아를 이끌어 줄 사람.
국민을 사랑하고, 프렌치아의 번영을 진정으로 꿈꾸는 자.
그런 이는 매우 높은 확률로 독립군 중에 있을 거였다.
“재밌네요.”
루시안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릴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 옆에 선 레이크란 놈도 무표정하기는 마찬가지.
재미없는 놈들.
적어도 반응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맥스웰은 그들과 달리 눈과 입을 최대한 벌린 채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지금까지 묵묵히 있던 레이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누군가를 왕으로 세울 힘이 있다는 겁니까?”
“그래. 내겐 그럴 힘이 있다.”
“그럼, 그런 힘을 가지고도 왜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는 않습니까?”
이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
적어도 내 목적은 정확히 말해 줄 필요가 있겠다.
“나는 제국에게서 프렌치아를 되찾을 생각이다. 하지만 독립 이후의 정국에는 관심이 없어. 그래서 내가 부순 것들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 나 대신 나라를 돌볼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내가 뱉었지만, 참으로 광오한 말이었다.
루시안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묻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럼에도 레이크란 놈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럼 저희 쪽에서 자격을 증명하기 이전에 당신부터 증명해야겠군요. 당신에게 실제로 그럴 만한 힘이 있는지 모르니 말이죠.”
“만약 내가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반응이 궁금하여 물었다.
“국새를 받아야겠습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증명하지 못한다면 빼앗겠다는 의미.
매우 괘씸하지만, 이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국새는 그만큼의 상징성을 가진 물건이니.
그가 말을 이었다.
“자격을 시험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나는 흔쾌히 답했다.
어차피 말로 떠들어 봐야 입만 아프다.
한 번의 실력 행사가 나도 편하고 좋다.
이들의 실력도 좀 볼 겸.
* * *
“그래서 아직도 국새가 그 녀석 손에 있다는 겁니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들은 화렌카의 우렁찬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그런 셈이죠.”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홀 중심에 놓인 원형의 테이블.
그 주위로 다섯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루시안과 레이크를 포함한 ‘북부의 흰사자’ 간부들.
“아니, 그 자식은 무슨 배짱으로 그런답니까!”
화렌카가 테이블을 강하게 치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본인의 붉은 머리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늘 있는 일이다.
그는 원래 화가 많은 사람으로 불같은 성정의 표본이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보통의 배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루시안은 여유로운 미소로 답했다.
화렌카가 주로 화를 낸다면, 루시안은 주로 웃었다. 그는 대부분의 감정 표현을 웃는 것으로 대체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실없어 보일 정도로.
그렇다고 그를 얕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시안은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게다가 신분도 불분명. 출신도 불분명. 그간의 행적도 불분명.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그것도 그렇지만, 녀석들이 한 이야기가 말이 됩니까? 혼자서 까마귀 기사단 1개 소대를 부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요!”
화렌카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성토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트웬이, 그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키가 작은 그는 공처럼 동글동글한 체형을 가진 사내였다.
“그 부분은 저도 화렌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밀정이 아닐지 의심스럽습니다.”
“확실히 수상한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흑소만큼 거대한 체구를 가진 우르노 또한 화렌카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는 테이블에 두꺼운 팔뚝을 올리며, 루시안에게 몸을 틀었다.
“까마귀 기사단이나 팔체라토의 죽음은 저희 쪽 대원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열되는 상황에 루시안은 우측에 앉은 레이크를 보았다.
“네 생각은 어때?”
모두의 시선이 레이크에게 꽂혔다.
그들은 레이크가 명확한 답을 내려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레이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이 문제에 대해서 결론짓는 건 잠시 보류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레이크의 의견에 동조한 루시안은 다른 간부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실력을 확인할 기회가 있으니, 그때까지는 일단 기다려 보죠.”
우르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정말 사실일까요? 대장도 검을 잡고 있으니 잘 알고 계실 거 아닙니까. 그가 벌였다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요.”
전격의 창, 우르노는 ‘북부의 흰사자’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의 강자.
그런 그도 까마귀 기사단 1개 소대를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작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그들을 홀로 쓸어버렸단다.
우르노는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적어도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화렌카 또한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그런 거짓부렁이 자체가 말도 안 된다 이겁니다! 익스퍼트 초급에 이른 30명의 기사를 코 풀듯 털어 내는 게 말이 되냐고요. 거기에 왕의 자격을 운운하며 하는 소리가 국새를 가진 이를 왕으로 만들 작정이라고? 그런 오만방자한 말이 어딨습니까! 지가 무슨 소드 마스터라도 된답니…….”
말을 하다 제 말에 흠칫 놀란 화렌카가 루시안의 눈치를 보았다.
“설마 아니겠죠?”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루시안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소드 마스터란 존재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한순간에 화가 식은 화렌카는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한 눈빛으로 말했다.
소드 마스터란, 검의 정점에 이른 자.
전장에서 이름 한번 들어 보지 못한 애송이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절대 아니었다.
그가 소드 마스터인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루시안이 말했다.
“현재 그를 소드 마스터라 볼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정황상, 뛰어난 실력의 미친놈일 가능성이 가장 높죠. 이야기가 얼마나 과장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익스퍼트 최상급에는 이르렀지 않았을까 합니다.”
루시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그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요. 그러니 한번 지켜봅시다. 그의 실력이 단순한 허풍인지 아닌지, 진위는 내일 밝혀지겠죠.”
기막혀하는 화렌카 대신 하트웬이 조심스레 나섰다.
“그런데 만약에, 진짜 만약에 그가 소드 마스터라면 어떻게 될까요?”
소드 마스터.
홀로 군단에 비견되는 검사.
그런 거대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가 바로 소드 마스터였다.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는 고작 네 명.
그가 전황에 미치게 될 영향력이 궁금하겠지.
루시안은 하트웬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가 만약 소드 마스터라면, 우리는.”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앞으로 1년 안에 독립하게 될 겁니다.”
* * *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고 빈 잔을 내려놨다.
무거우면서 화끈한 이질감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을 덥힌다.
독한 녀석이었다.
나는 근래 위스키 특유의 향과 맛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본부에 오니, 속이 편하네.”
알렌은 술잔을 기울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우리는 상단 내부에 있는, 독립군들을 위해 마련된 주점에서 술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나저나 제네스 님, 어쩌실 작정입니까?”
프레디가 물었다.
“뭘 어째?”
“국새 말입니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듯 살피더니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독립군 내부이긴 했지만, 국새를 찾았다는 사실은 아직 기밀. 입을 조심해야 했다.
“말했잖냐. 그 녀석이 가질 자격이 있다면 넘겨줄 것이고 아니면 다른 놈 찾아봐야지.”
프레디가 복잡한 심경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루시안에게 국새를 건넬 줄 알았겠지.
편히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나도 심경이 이래저래 복잡하다.
여기서 루시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잠시 이어지던 적막이 종업원의 목소리에 깨졌다.
“어서 오십시오!”
옆 테이블을 치우던 그는 주점에 막 들어선 사내를 향해 쪼르르 뛰어갔다.
잡초처럼 제멋대로 솟은 붉은 머리칼에, 험악한 인상을 가진 남자.
딱 봐도 한 성깔하게 생겼다.
시끌벅적하던 주점이 그의 등장에 상대적으로 조용해지고, 그를 알아본 몇몇이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그는 마침 테이블이 치워진 우리의 옆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의자에 철퍼덕 앉은 그가 제집처럼 편하게 술을 시켰다.
“매일 마시던 걸로.”
녀석의 테이블에 과일 안주와 독한 위스키 한 병이 놓이자, 그의 일행이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들을 본 체스가 내게 몸을 바짝 붙이며 조용히 말했다.
“아마 저 사람, 독립군 간부 중 한 명일 겁니다.”
“아는 놈이야?”
내가 그를 의식하지 않고 말하자, 체스는 화들짝 놀라더니 내게 목소리를 낮추라며 다급히 손짓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불꽃의 화렌카라고, 불같은 성격만큼 검도 시원하게 잘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니 후덜덜 하네요.”
체스는 그의 더러운 인상을 보며 괜히 몸을 떨었다.
알렌과 프레디도 술을 홀짝거리며 그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나 또한 화렌카에게 시선을 주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미친놈 때문에 심란해서 그런다.”
“왜요? 아까 소집된 회의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자세한 건 아직 기밀이고. 대충 말하자면 이번에 아이아스 가문 쪽에서 온 놈들이 있거든.”
우리 이야기였다.
세 녀석도 그것을 느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곤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거기서 온 녀석이 팔체라토와 그 기사단을 단신으로 해치우고, 까마귀 기사단 1개 소대까지 혼자서 작살냈단다.”
“네? 까마귀 기사단을요?”
“그래, 인마.”
“그 녀석이 누군데요? 서부의 용 사냥꾼이라도 온 겁니까?”
“그자가 여기를 왜 와. 그런데 더 재밌는 건 말이야, 그놈의 나이가 고작 20대 중반이란다.”
“예에?!”
앞에 있던 자는 어찌나 놀랐는지 비명을 질러댔다.
흠, 이번 건 조금 억울한데?
나는 내 나이를 20대 중반이라고 소개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 나이를 밝힐 생각도 없지만.
나이 좀 먹어 보면 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다는 걸 말이다.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테고.
“20대 중반에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참, 그런데 그 녀석이 검은 머리칼을 가졌다더군.”
“네? 그게 왜요?”
“그리고 같이 다니는 녀석들이 세 놈이 있는데 한 놈은 덩치가 곰처럼 크고, 한 놈은 턱이 뾰족하며, 한 놈은 주먹만 한 코를 가졌다대.”
그는 우리를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을 하나씩 말했다.
그때마다 세 녀석은 자신의 특징을 가리기 위해 애썼다.
알렌은 쭈구리처럼 어깨를 움츠렸고, 프레디는 손으로 턱을 감쌌으며, 체스는 고개를 돌려 자연스레 코를 숨겼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화렌카는 이미 우리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바로 옆 테이블에 있네.”
그의 타오르는 시선은, 정확히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