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제15화 증명 (3)
화렌카의 강렬한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에 담긴 저의를 손쉽게 파악했다.
너무 단순했으니까.
한판 붙고 싶다 이거지?
예상대로 벌떡 일어난 녀석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냐? 혼자서 까마귀 기사단을 작살냈다는 녀석이.”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위스키를 홀짝였다. 녀석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빠직하고 돋아났다. 생긴 것만큼 인내심이 부족해 보였다.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다. 네놈인 걸 다 알고 있으니까.”
알렌과 나머지 두 놈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화렌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이리 소란이지?”
나는 그를 뚱한 표정으로 올려보았다.
누가 보면 내가 뭔 잘못이라도 한 줄 알겠네.
심사가 뒤틀렸지만, 약 올리는 맛이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녀석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흥. 하늘에 감사해라. 네놈이 내일 대련이 잡혀 있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혼쭐을 내줬을 테니까.”
그래서 말로만 하겠다는 건가?
생각보다 생각이 있는 놈이었다.
나는 잔에 남아 있던 술을 한 번에 털어 넣고 말했다.
“혀가 길군. 실망인데?”
“뭐? 지금 뭐라고 했냐?”
화렌카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죽일 듯 쏘아보았다. 그는 꽉 움켜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따라 나와, 가볍게 한판 하자고.”
“네놈이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오냐! 처맞고 다른 말 하기 없기다!”
화렌카가 씩씩거리며 내 뒤를 따랐다.
뒤편에서 염려를 전하는 종업원과 대꾸하는 알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분 불꽃의 화렌카예요. 괜히 험한 꼴 볼 수 있다고요.”
“저희도 저분 못 말려요. 그리고 저는 오히려 화렌카 씨를 걱정하고 있다고요. 불꽃이고 뭐고, 지금 재가 되게 생겼는데.”
함께한 시간이 꽤 되었다고 확실히 전과는 다른 반응.
그들은 이제 나를 걱정하지 않는다.
내 상대를 걱정하지.
주점 앞 너른 마당.
나는 그 중심에 섰다.
화렌카는 그런 내게서 적당한 간격을 둔 채, 주먹을 감싸 쥐며 우두둑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네가 붙자고 했다. 딴말하기 없기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녀석은 내일 잡혀 있는 내 대련 일정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괜히 딴소리할까, 싶은 거지.
어쩌면 이자도 대련 상대 중 하나였을지도.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큰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좋은 땔감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럼 어디 실력 한번 볼까?”
화렌카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왼발을 내밀며 두 주먹을 눈앞에 두는 기본적인 박투 자세.
나는 그에게 집게손가락을 까닥이며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예상대로 녀석의 눈동자가 회까닥 돌아갔다.
“이 건방진 새끼가!”
노호성과 함께 달려드는 화렌카.
저돌적인 움직임에서 투우와 같은 박력이 전해졌다.
부앙!
그의 주먹이 묵직한 파공음을 내며 쏘아진다.
소리만 들어도 꽤 위력적이다.
바위쯤은 간단히 부숴 버릴 힘.
움직임은 흥분한 것과 달리 안정감이 있다.
간혹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도 잘 싸우는 미친놈들이 있는데, 이놈이 딱 그 과인 듯하다.
나는 몸을 트는 것으로 녀석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녀석의 팔뚝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팔을 휘감아 크게 돌렸다.
휘릭.
녀석의 거구가 내 손끝을 따라 팽그르르 돌더니, 볼품없이 내팽개쳐졌다.
우당탕탕!
단 일 수에 나동그라져 별을 본 녀석은, 벌떡 일어나 얼굴을 붉혔다.
왜 불꽃이라는 이명이 있는지 알겠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식을 줄 모르네.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 자식이!”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드는 녀석.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는 녀석의 주먹을 휘감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또다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정확히 두 번 더 반복됐다.
“…….”
그제야 화렌카는 성급히 달려들지 않고 신중히 간격을 재기 시작했다.
뒤집혔던 눈은 제자리로 돌아와 흔들리고 있었다.
같은 실패를 네 번이나 반복했는데, 사람이라면 정신 차릴 때도 됐지.
“고작 이 정도로 큰소리친 건가?”
나는 씩 웃으며 그를 도발했다.
“닥쳐라!”
화렌카가 다시 열을 올리며 달려들었다.
참 단순한 놈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펼쳤던 공격 중에는 그나마 제일 낫다.
결과는 여전히 같았지만.
우당탕탕!
바닥을 나뒹구는 화렌카.
흙먼지를 여러 번 덮어쓴 그의 옷은 이미 걸레짝과 다르지 않았다.
온몸으로 마당을 청소하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일.
“빌어먹을!”
그는 주먹으로 바닥을 쿵 찍으며 화풀이를 했다.
“슬슬 지루하군. 이제 끝내자.”
나는 하품을 하는 시늉을 하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으아아!”
약이 잔뜩 오른 화렌카가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여태처럼 곧게 뻗어 오는 주먹.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거지?
나는 주먹을 피하며 안쪽으로 파고드는 동시에 녀석의 뒤로 휘돌아 갔다.
잠시 내 움직임을 놓치고 허둥지둥 대는 녀석.
나는 놈의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쳤다.
빠악!
“크헉!”
뒤통수를 부여잡은 녀석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여기야.”
나를 찾던 화렌카의 시선이 내 목소리를 쫓아 들어 올려졌다.
높이 뛰어오른 나는, 허공에서 녀석을 향해 손바닥을 내지르고 있었다.
천령신공, 기예편.
제3장 천폐일장(天閉一掌).
손바닥에서 휘몰아치는 기의 폭풍.
온몸을 내리누르는 거대한 압력을 느낀 화렌카는, 양팔을 머리 위에서 ‘X’ 자로 교차했다.
그리고 그의 하늘이 내 손바닥에 가려졌다.
콰아아앙!
내지른 팔이 곧게 펴지자, 지반이 압착되듯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파이며 자욱한 흙먼지를 뿜어냈다.
나는 손바닥에 전해진 반동을 이용해 먼지구름 밖에서 내려섰다.
“…….”
장내에 고요가 내렸다.
싸움을 구경하던 이들은 입을 쩍 벌린 채, 흙먼지를 여과 없이 마시고 있었다.
휘잉.
불어온 바람이 흙먼지를 흩었다.
그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화렌카.
그는 두 팔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압력으로 넝마가 된 의복과 흙먼지 때문에 상거지 꼴이지만, 그래도 멀쩡히 서서 눈을 끔뻑거렸다.
일부러 힘 조절을 한 까닭.
“……어, 어떻게.”
화렌카의 패배를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은,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연신 비벼 댔다.
“화렌카 님!”
일행이었던 녀석이 화렌카에게 뛰어갔다.
하지만 이내 걸음을 멈추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새겨진 흔적의 형태를 알아본 것이다.
“…….”
화렌카를 중심으로 깊게 파인 지반.
그것은 마치, 거인의 손바닥 같았다.
* * *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어젯밤에 화렌카 님이 한 방에 뻗었다던대?”
“에이, 말도 안 돼.”
“내가 듣기로는 방심했을 때 그랬다던데. 술도 마신 상태였고.”
“무슨 소리야? 그럼 한 방에 뻗은 게 사실이란 거야?”
“듣기는 그렇게 들었지만, 술 취한 놈들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어쨌든 새로 온 녀석이 화렌카 님을 이겼다는 거 아니야.”
달을 밀어내고 떠오른 태양이 어느덧 중천에 이르렀음에도, 독립군 내부에선 어젯밤 사건이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워낙 많은 구경꾼이 있었고.
패배한 자가 화렌카라는 점과 그를 이긴 자가 고작 20대 중반의 새로운 인물이란 점은, 소문에 날개를 달기 충분했다.
거기에다, 금일 오후에는 화렌카를 이긴 인물의 대련이 있다고 하니, 이는 불붙은 관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래서 그 관심이 어떻게 타올랐냐 하면.
고요했을 연무장이 제네스의 대련을 보기 위해 모인 독립군들로 시장통을 방불케 할 만큼 북적이고 있었다.
이 정도 인원이면 할 일 없는 녀석들은 모두 모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흥미 있는 구경거리에 열기가 벌써 후끈 달아올랐다.
“왔다!”
“저 녀석이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제멋대로 떠들던 이들의 이목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이 뜨거운 열기의 주인공이 자리하고 있었다.
* * *
연무장 한편에 지어진 막사.
그 안에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루시안과 무표정한 레이크가 있었다.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루시안이 내게 말했다.
“어젯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모두가 아는 소식을 그가 모를 리 없겠지.
나는 문제 있냐는 식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들 당신의 실력이 궁금한가 봅니다.”
“너부터도 그런 것 같은데.”
“맞습니다. 저도 무척 궁금하네요.”
루시안은 흔쾌히 긍정했다.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묻어났다.
그도 검을 익힌 자였고, 천재라 불리던 이.
나의 강함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겠지.
내가 말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그러죠.”
막사 밖으로 나서자, 네모반듯한 연무장이 보였다. 그 주변을 바닥에 퍼질러 앉은 독립군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왔다!”
“저 녀석이야?”
제멋대로 떠들던 녀석들은, 나의 등장에 환호를 지르며 더욱 소란을 피웠다.
다들 축제라도 온 분위기.
어제의 사건으로 내 실력이 기대될 테지.
그들은 오늘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상상했든, 그 이상을 경험하게 될 거다.
내가 그리 만들 생각이니까.
“와아아!”
루시안이 연무장 위로 오르자, 관중들은 한목소리로 환호하며 그를 맞이했다.
그는 흥분에 젖은 수많은 관중 앞에서 여유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다들 오늘 대련에 임할 분에 대해 알고 온 것 같으니, 별다른 소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련 전에 규칙에 관해 짧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상대에게 고의적인 상해를 입히지 않을 것. 둘째, 살인은 절대 불가. 규칙은 딱 두 가지입니다.”
“이번 대련은 제네스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자리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과열되면 중단될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그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세 명의 대련 상대를 준비했고, 제네스는 언제든 대련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들이 준비한 대련 상대를 차례대로 상대하는 것으로 내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내게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럼 대련을 진행하겠습니다!”
“우와아아!”
나는 귓가가 먹먹해질 정도의 함성을 들으며 루시안의 손짓을 따라 연무장에 올랐다.
모든 집중이 내게 쏠리는 상황이었지만, 긴장감과 부담감은 전혀 없었다.
군중 쪽으로 내려가는 루시안 대신에 둥글둥글하게 생긴 사내가 올라왔다.
루시안의 옆으로는 레이크가 앉아 있었고, 복잡한 심경의 화렌카도 보였다.
“자, 그럼 첫 번째 대전 상대는!”
그사이 사회자는 내 대련 상대를 소개하고 있었다.
“전장을 눈빛만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남자! 뜨거운 정오의 햇볕마저도 서늘하게 만들어 버리는 북방의 차가운 심장! 얼음보다 시리다는 아트웨인가의 검을 이은 첫 번째 주자! 그는 바로, 헤! 로! 핀!”
“우와아아아!”
사회자의 거창한 호명에, 무리에서 한 놈이 일어나 머리를 긁적이며 연무장으로 걸어 나왔다.
겉은 어수룩해 보이지만, 걷는 것만 보아도 중심이 안정적인 게 한가락 하는 놈이다.
그는 내게 일정 거리를 두고 검을 뽑으며 가볍게 묵례했고, 나 또한 고개를 까딱이며 뇌운검을 뽑았다.
“자, 그럼! 두 분 모두 준비된 것 같으니.”
우리를 번갈아 본 사회자가 손날로 허공을 갈랐다.
“대련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