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제20화 나 하나면 충분하다 (2)
이리엘은 말 그대로 여전했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는 상당히 폭력적이었다.
고집이 얼마나 세고 성깔은 또 얼마나 더러웠는지. 그 탓에 애먹었던 기억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녀가 루시안을 따라 궁에 놀러 왔을 때만 생각하면, 흐릿한 기억만으로 오한이 일 정도.
그때는 내가 일찍 죽을지 몰랐기에,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줄 알고 참담한 심정이었지…….
이리엘의 얼굴을 보니 당시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고작 쥐방울만 한 꼬마 애한테 당하고 살았다니.
전생의 나지만 한심하기 그지없다.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부에서 오셨다고요.”
이리엘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막 이리엘을 따라 깔끔히 정돈된 방에 앉은 참이었다.
방에 놓인 가구와 물품들을 보니 집무실로 사용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에게 루시안이 준 편지를 건넸다.
그녀가 말했다.
“먼저 읽어 볼게요.”
“편할 대로.”
편지 봉투를 뜯던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저 아세요?”
“그럴 리가.”
“그런데 왜 초면부터 반말이시죠?”
알렌도 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반말하는데 별다른 이유가 있나.
살아온 인생을 따지자면 전생까지 합쳐 무려 60년이다. 까마득한 애들한테 존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것을 떠나서도 나는 전생에 왕세자였고, 환생 후에는 거지였다.
한 번은 고귀한 존재로 태어나서, 한 번은 배움이 없어서 여러모로 반말이 편했다.
나는 짧게 답했다.
“내가 원래 존대하는 법을 모른다.”
“…….”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표정에서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보였지만, 현재 그녀는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건 아마 그 편지에 적혀 있을 터. 그녀는 그 답을 찾고자 편지를 읽어 갔다.
“인사가 늦었네요. 이리엘이라고 합니다.”
편지를 다 읽은 이리엘이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상단의 일로 온 것인지, 독립군의 일로 온 것인지 파악되지 않았을 터다.
“제네스다.”
“알렌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나의 이름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갔다.
“지부의 상황은 알고 계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나와 알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너는 알고 있냐, 는 의미였다. 우리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멀뚱히 있는 나를 보며 이리엘이 말했다.
“모르는 게 좀 많은 편이신가 봐요.”
바늘처럼 뾰족한 말투였다.
“제네스 님이 원래 모르시는 게 좀 많은 편이긴 합니다.”
알렌이 답했다. 그는 이리엘을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다.
저걸 그냥.
나는 근질거리는 손을 참고 말했다.
“가서 들으라더군.”
“그렇군요. 그런데 설명에 앞서 의문이 들긴 하네요. 이 문제는 소수의 인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간단히, 편지를 쓴 자를 믿으면 된다.”
나의 말에 이리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하긴 그러네요. 그럼 상황을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갔다.
들은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팔레이트 상단의 크레이 지부는 ‘미드크레이’라 불리는 평야 너머로 다양한 물품을 운송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로지르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미드크레이’를 건너기 위해서는 막대한 대가가 필요했다.
평야의 주인을 자칭하는 마적들이 있는 까닭.
마적들이 미드크레이의 골칫덩이가 된 지는 벌써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마적들을 토벌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하는 것은 그들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움직이는 데다, 거처 없이 유목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기마술이 워낙 뛰어나 그들을 너른 평야에서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탓에 값비싼 통행료를 내고 평야를 건널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 크레이 지부가 마적들과 마찰을 빚게 되며 발생됐다.
그 바람에 더 이상 ‘미드크레이’를 건널 수 없게 된 것.
이는 지부의 존망과도 연관된 문제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나는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엘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물어 왔다.
“어떻게, 방법이 있겠어요?”
“물론.”
“에? 진짜요?”
나의 단호한 대답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도가 뭔데요?”
“다 쓸어버려야지.”
“…….”
기대감에 젖었던 이리엘의 눈빛이 순식간에 메말라 버렸다.
해결책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문제인 거지.
이리엘이 똥 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쓸어버릴 방도가 있냐는 건데요.”
나는 그녀의 말에 답하는 대신 알렌을 보았다.
“알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뭐지?”
“압도적인 힘에는 계획이 필요 없다! 죠.”
알렌이 가슴팍을 펴며 말하자 이리엘은 황당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의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 하나면 충분하다.”
이리엘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하다가, 이내 쌍심지를 켜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나랑 장난해요?”
알렌이 혈압이 올라간 듯 보이는 이리엘을 달래기 위해 나섰다.
“믿기 어려울 테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래 봬도 제네스 님이 허튼소리는 안 하시는 분이거든요.”
물론, 통하지는 않았다.
“제가 마적들이 몇 년간 ‘미드크레이’의 주인 행세를 했다고 했죠?”
“시, 십 년?”
알렌이 눈동자를 들어 올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답은 20년이었다.
안 듣고 딴짓하더라니.
그녀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20년이에요!”
“아아.”
“물론 그건 중요치 않아요.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존재했다는 건, 그만큼 토벌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란 거죠. 근데 혼자 뭘 하겠다고요?”
그녀의 인내심은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닌 듯하다.
인내란 감정이 생긴 것을 보면.
“날 믿을 필요는 없다. 그 편지를 적은 이를, 나를 이곳에 보낸 이들을 믿어라.”
“그래서 지금 터지려는 화를 억지로 누르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보이는군.”
확실히 그녀는 내 예상보다 화를 잘 참아 내고 있었다.
“그렇죠? 나 지금 굉장히 참고 있는 거예요.”
나는 서로 쓸데없는 심력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추가적인 설명을 보탰다.
“나는 소드 마스터다.”
간단명료한 설명에 그녀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이 사람이 진짜!”
아무래도 이 말이 그녀에겐 더 안 믿기나 보다.
내가 말했다.
“네가 의심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네가 가진 상식이다.”
사실 편지로 나의 존재는 증명됐다.
그녀는 단지 믿을 수 없는 거다.
내 말이 본인이 알던 상식과 위반되기에.
그럴 땐.
“믿어라.”
그냥 믿으라 하는 수밖에.
“나는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니까.”
그녀는 내 자신감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고요. 그럼 혼자서 알아서 하실 건가요? 제가 도와줄 일은 없는 거죠?”
“지금 막 생각해 봤는데, 조금의 도움은 필요하다. 별거는 아니고.”
나는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함을 토했다.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 * *
“괜찮을까요?”
총관, 파메드의 물음이었다.
이리엘은 그의 염려에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저도 모르겠어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제네스가 바라는 대로 일을 진행해 주었다.
그의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편지를 쓴 루시안을 믿은 것이지.
루시안이 편지로 전한 내용은 간단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라는 것.
이 맹목적인 믿음의 의미는 명료했다.
제네스란 자의 말이 모두 사실인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기지 않았다.
정황은 모두 그의 말이 사실이라 말하고 있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걸 어떡해.
또래로 보이는 자가 혼자서 마적을 토벌하겠다는데.
지가 대륙에 네 명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라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게 미X년이지.
“아마, 괜찮을 거예요. 오빠가 보냈다면 다 이유가 있겠죠.”
이리엘은 총관의 걱정을 덜어 주는 동시에 자신의 마음 또한 다독였다.
총관에게 한 말은, 자신에게 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지가 스스로 제 무덤을 파지는 않겠지.’
이리엘은 일말의 흔들림 없이 말하던 제네스를 떠올렸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괜히 사람의 머리를 숙이게끔 만드는 위압적인 기도가 있었다.
딱히 패도적인 기세를 뿜어낸 것도 아닌데, 그의 짧고 명령조인 말투가 거슬리지 않았다.
사람을 하대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반말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
아까는 괜히 자존심이 상해 걸고넘어지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왜인지 사람을 압도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쨌거나 범상치 않은 자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
특히나 그 이름이 그렇다.
제네스라니.
자꾸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그나저나 본부에 다녀와야겠어요.”
“본부에요?”
이리엘의 말에, 파메드는 동공을 키웠다.
현재 지부의 상황을 봤을 때, 지부장이 자리를 비울 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본부로 간다는 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
“총관님이 한동안 지부를 맡아 주셔야 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본부에 가시는 건 오랜만이군요.”
“그러게요. 또 무슨 일을 맡기려고 그러는지, 벌써 무섭네요.”
“아마 위험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겠죠?”
“그럼요.”
총관의 답에, 이리엘은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만약 아니면 땡강 좀 부리죠, 뭐.”
* * *
너른 지평선이 담기며 시야가 훤히 트였다.
군데군데 솟은 언덕과 커다란 바위들이 시야를 가렸지만, 끝이 담기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평야였다.
“휘유, 진짜 끝내주네요.”
알렌의 감상평이었다.
그의 말대로 경치가 일품이었다.
마치 망망대해를 눈앞에 둔 것 같달까.
이곳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는데, 상황은 아마 그 전에 결판이 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상단의 깃발이 걸린, 커다란 수레를 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 요구한 전부였고, 마적들을 끌어들일 덫이었다.
겉보기엔 조촐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자극적인 미끼가 걸려 있었으니까.
바로, 자존심이다.
그들은 상단의 이름을 내건 우리가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고 평야를 건너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른 광야를 천천히 나아갔다.
차양막을 친 수레는 아늑했다.
말고삐를 잡을 필요도 없어, 말의 걸음을 따라 평야를 표류하고 있었다.
하는 일은 낚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녀석들이 미끼를 물 때까지 세월을 낚고 있으면 될 일이다.
“이래도 되는 거죠?”
알렌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나를 따라 누워 있기는 하지만, 한눈에 봐도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몸은 편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본데.
나는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느끼며 말했다.
“이제 그냥 믿을 때도 되지 않았냐?”
“하하, 제네스 님의 강함이야 당연히 의심을 안 하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적들이 떼로 몰려올 텐데…….”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드나 보다.
“괜한 소리 말고 때 되면 내 밥이나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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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어느덧 3일이 지났다.
그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누워 있는 것도 지겨울 정도.
정말 망망대해 위에서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여유로움이 무료함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너른 평야는 밖에서 볼 때나 좋았지, 안으로 들어오니 어딜 보나 지루한 지평선뿐이었다.
그때, 드디어 입질이 왔다.
구구궁.
수레 위로 잔잔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허리께까지 전해지는 땅의 울림.
놈들이 오는 것이다.
알렌은 이 와중에 낮잠을 퍼질러 자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먼지구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수레에서 내렸다. 말들은 느긋한 걸음 그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단잠에 빠진 알렌을 굳이 깨우지 않았다.
금방 돌아올 것이기에.
가볍게 땅을 박차자, 주변의 풍경이 쏜살같이 뒤로 밀려가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빠르게 다가왔다.
마적 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