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제52화 네더만 (1)
쿠르르릉.
충격파를 견디지 못한 주변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뒤집히고 갈라져 폐허가 된 광장.
거대한 폭발로 움푹 꺼진 지반에서 한 남자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흙먼지와 흐른 핏물이 뒤엉켜 넝마와 다름없는 몰골.
힘겹게 일어서던 그가 허물어지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빌어먹을.”
고개를 떨군 남자의 입에서 자조적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용 사냥꾼이란 칭호가 허명은 아니었군.”
그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네더만은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솔루니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더만은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승리한 뒤에 들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이솔루니는 그를 마주 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랬겠지. 하지만 이제 다시는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친히 네놈의 양팔을 가져갈 참이거든.”
잔혹하게 비틀어지는 입매.
팔을 잃는다는 충격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크겠지만, 검사에게는 더욱이 사형 선고와 같은 말이었다.
더군다나 두 팔 모두를 가져가겠다니.
네더만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 초면에 너무하는군. 그래도 포크질 할 팔은 남겨 둬야 할 거 아닌가. 안 그래? 사람이 그렇게 양심이 없으면 안 된다고.”
그는 뒤편에 서 있던 여자 대원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 예쁜 아가씨들이 떠먹여 주기로 약속한다면야 사양하지는 않겠다만.”
“재밌는 남자네.”
그런 그를 보며 카미앙은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한 달 정도는 가지고 놀만 하겠어.”
“에? 고작 한 달이라니.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데. 보기보다 실하다고.”
“이 와중에 여유가 상당하구나.”
이솔루니는 이 상황에서도 혀를 놀리는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네 바람대로 팔 하나는 남겨 주지.”
“오, 고마워라.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군. 내가 그동안 섭섭하게 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사죄하겠네.”
네더만이 반색하며 말하자, 이솔루니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팔 대신, 네놈의 혀를 뽑아 갈 테니.”
……빌어먹을 새끼.
욕지기를 삼킨 네더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동정을 구했다.
“어떻게 인심 좀 더 써 보지 그래?”
네더만은 당연히 혀도 팔도 잃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말장난과 검을 휘두르는 맛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그 두 개를 한꺼번에 빼앗겠다니.
그건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이솔루니의 살벌한 표정을 본 네더만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 자식은 자신의 사정을 봐줄 종자가 절대 아니었다.
“그럼 나와 거래를 해 보는 건 어떻겠는가?”
“혀를 뽑고 나서 한번 들어 보지.”
“내 팔과 혀를 담보로 한 거래인데, 들어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이솔루니가 그를 보았다. 네더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찾는 흰사자. 내가 그 녀석의 얼굴을 알고 있는데 말이야. 물론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지. 하지만 혀가 있어야 말을 할 게 아닌가.”
“그 말을 믿으라고?”
“내가 이 상황에 미쳤다고 거짓을 말하겠나. 일단 팔 하나만 가져가고, 그 이후에 거짓인 게 들통나면 남은 팔과 혀를 자르면 되지 않겠나. 너에게 손해는 없을걸?”
잠시 손익을 셈하던 이솔루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혀는 잠시 보류해 주지.”
“휘유. 잘 생각했네. 일단 팔 하나로 끝내자고. 자네 보기보다 통이 큰 남자였군.”
안도의 숨을 내쉰 네더만은 왼팔을 수평으로 뻗었다.
“자, 한 번에 깔끔하게 가 주게.”
하지만 이솔루니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네더만은 왼팔을 내리고 오른팔을 들었다.
“……야박하기는.”
네더만이 쓰게 웃었다.
이제 다시는 오른손으로 검을 쥘 수 없을 터.
벌써 심장 어림이 시큰하다.
평생을 갈고닦아 온 검이거늘.
오른팔을 잃는다는 건 자신에게 사형 선고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스스로 위안한 네더만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어금니를 물었다.
들어 올려진 이솔루니의 검이 태양 빛을 가렸다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휘몰아치는 돌풍.
자신에게서 일어난 바람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황급히 눈을 뜬 네더만은 다급히 물러서는 이솔루니를 볼 수 있었다.
콰과과광!
이솔루니가 화살처럼 쏘아지는 푸른 빛줄기를 쳐 내며 걸음을 물리고 있었다.
‘이게 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옆으로 무언가 내려선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는 찰나 몸이 부웅, 떠올랐다.
체력이 바닥나 있던 네더만은 그대로 저만치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당탕탕.
“끄응.”
억지로 몸을 일으킨 그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자신을 내던진 사내를 바라보았다. 뒷모습이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흰사자?’
정신을 차린 네더만은 다급히 고개를 숙여 멀쩡하게 붙어 있는 자신의 오른팔을 보았다.
그는 오른팔을 빙빙 돌려도 보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고, 왼손으로 만지작거리기도 하며 꿈과 같은 현실을 직시했다.
잃을 줄 알았던 오른팔이 멀쩡히 붙어 있다니!
“왠지 팔 하나가 더 생긴 기분인걸?”
절로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기분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날아갈 듯 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초원의 들개는 여전히 건재했고, 자신의 체력은 바닥난 상태.
과연 흰사자가 그들을 홀로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조금 전 겪은 그들의 강함을 보았을 때, 솔직히 회의적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흰사자가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왔겠는가.
‘적어도 나만큼 대책 없는 놈은 아니겠지.’
그는 오른팔에만 두었던 관심을 대치하고 있는 그들에게 옮겼다.
“네놈이구나. 크큭.”
이솔루니가 웃으며 흰사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장에 뒤쪽에 빠져 있던 초원의 들개들이 걸어 나와 나란히 섰다.
흰사자가 말했다.
“허망하게 죽고 싶지 않다면 전력을 다해야 할 거다.”
오만한 태도로 말하는 그의 손에는 제국제 롱소드가 들려 있었다. 네더만은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 녀석이 아니었나?’
자신이 의심했던 녀석은 대륙에서 볼 수 없는 형태의 검을 차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가 들고 있는 건 제국제 롱소드.
물론 이것만으로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가면으로 얼굴까지 가린 판에 검을 바꿔 쥐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흰사자를 다시금 유심히 바라본 네더만은 손가락을 튕기며 녀석의 정체를 확신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구나.’
자세히 보니, 검을 제외하고는 몸태나 검을 쥔 자세가 녀석과 같았다.
네더만이 흰사자의 정체를 유추해낸 사이, 광장의 공기는 점차 밀도를 높이며 팽팽히 당겨지고 있었다.
“건방진 놈. 그럼 실력 한번 볼까?”
입매를 비튼 이솔루니가 태세를 갖추자, 그들을 중심으로 막강한 기세가 풀어졌다.
뿜어진 기파를 따라 일어난 돌풍이 광장을 휩쓸었다. 네더만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흰사자를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함께 싸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들의 기세가 피부에 닿자, 흰사자가 이길 확률이 희박하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초원의 들개를 직접 겪어 본 결과, 그들의 강함은 진짜였다.
전장을 함께 구르며 못된 짓을 해서 그런지 손발이 척척 맞는다.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서야 그들을 홀로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쩝, 혀까지 잃게 생겼네.”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의 소재를 팔아 이 난관을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했지만, 그가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도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한데, 혀가 없어 말도 못할 테니 의미도 없고.
“……그럼 이제 어쩐다.”
네더만이 어떻게든 혀와 팔을 살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때, 그들의 격돌은 시작됐다.
쾅!
전투는 이솔루니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됐다. 그의 신형이 푹 꺼지며 흩어지는가 싶더니 흰사자 앞에서 불쑥 솟아났다.
이어 검붉은 빛의 수평선이 그어진다.
오러의 색은 대부분 푸른빛이지만, 연공법에 따라 다른 색을 가질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검붉은색은 가장 사이하고 지독한 기운을 띤 오러였다.
자신 또한 당해 봤기에 잘 안다.
적들의 공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솔루니가 검을 그어 갈 때, 파르페가 그 뒤를 이어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불어난 창의 그림자가 공간을 잠식하며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과광!
맞물리듯 떨어진 공격에 폭발음이 연달아 울렸고, 그 여파로 뒤집어진 지반이 자욱한 먼지구름을 피어 올렸다.
잠시 후 그 구름을 뚫고, 흰사자가 신형을 드러냈다.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은 멀쩡한 모습.
그런 그에게 묵색의 채찍이 날아들었다.
촤라라락!
꿈틀거리는 뱀의 몸통처럼 요동치며 사위를 점하는 채찍.
카미앙의 공격이었다.
그녀의 채찍은 집요하고 악독하게 흰사자가 머무는 공간을 헤집었다.
네더만의 눈이 부릅떠진 것은 그때였다.
흰사자의 신형이 여러 개로 불어나는 듯한 잔상이 일더니, 채찍은 목표물을 잃고 애먼 땅거죽만 뒤집어엎었다.
콰과과과광!
“…….”
찰나, 흰사자의 몸놀림을 본 네더만은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잠시 미루고 그들의 전투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쐐―액!
호르킨의 사이드가 어느새 흰사자의 뒤를 노리고 그어지고 있었다.
은밀하고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벼를 베듯 발목을 쓸어 가는 사이드.
흰사자는 검을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게 휘둘러 그것을 쳐 냈다.
콰앙!
그렇게 흰사자의 시선이 내려간 찰나의 순간,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해머가 있었다.
콰아아앙!
그 육중한 일격을 받아 낸 지반은 거미줄 모양으로 쩌저적 갈라지며 토사를 수직으로 토해 냈다.
발끝에 땅의 진동이 전해질 만큼 묵직한 공격이다.
표홀한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해 낸 것도 잠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이솔루니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의 검세가 흰사자에게 쏟아져 내린다.
전장을 굴러다닌 자들답게 변칙적인 검술이지만, 셋의 합은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흰사자를 압박해 갔다.
‘……마치 한 명과 싸우는 기분이었지.’
네더만은 그들과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마치 자신이 싸우는 것처럼 손에 땀을 쥐었다.
쿠콰과과광!
그들의 공격을 받아 내는 광장이 계속해서 커다란 비명을 질러 댔다.
흰사자를 노리는 들개들의 공격은 집요하리만큼 계속되고 있었다.
한번 문 적은 절대 놓지 않는다는 철칙이라도 있는지,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고 지독하게 몰아치는 녀석들.
그들의 합공을 보며 네더만은 혀를 내둘렀다.
저것을 조금이나마 버텨 냈던 본인에게 감탄이 일 정도.
‘나도 그 정도면 이름값은 한 거였어.’
……그런데 대체 저 녀석은 뭐지?
적들의 공세는 자신을 대할 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더 거세졌지만 그것에 맞서는 녀석의 대응은 자신과 달랐다.
수세에 몰려 급급하게 검을 휘두르던 자신과 달리, 그는 유려하고 표홀한 움직임으로 그들의 공세를 무효화시키고 있었다.
‘미쳤군.’
그 모습을 보며 네더만은 터져 나오는 탄성을 참지 못했다. 그의 움직일 볼 때마다 작은 깨우침이 머릿속을 스쳤다.
오래전, 검을 배우고 익히던 그 순간처럼 그의 움직임을 보는 게 새로웠다.
지금의 자신은 죽었다 깨도 해내지 못할 움직임.
‘저 자식, 설마 소드 마스터인가?’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그의 움직임은 격이 달랐다. 다른 건 몰라도 몸놀림만큼은 소드 마스터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보며 네더만은 일말의 기대가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쥐새끼 같은 놈. 도망치는 게 제법이구나.”
잠깐의 소강상태.
그 틈을 이용해 이솔루니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흰사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너희들의 전력이냐?”
네더만은 무심한 듯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의 출렁임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격전을 치렀음에도 그의 호흡은 골랐다.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서 여유가 전해지고 있었다.
자신과 같이 혓바닥에 기름칠하여 가장한 여유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유.
승리를 자신하는 자의 목소리.
‘……어쩌면 이길 수도 있겠는데?’
점차 희망의 빛이 짙어지고 있었다.
뒤편에서 살기가 일어난 건 그때였다. 이미 녀석의 접근을 눈치채고 있던 네더만은 가볍게 몸을 틀어 검을 피한 뒤, 그 검을 빼앗아 단숨에 목을 베어 버렸다.
피슛!
뎅겅 잘린 목이 허공을 돌며 핏물을 뿜어냈다.
네더만은 자신을 포위하려는 까마귀들에게 호통했다.
“이 양심 없는 것들아, 그래도 기사라는 것들이 평생에 못 볼 대결을 관전하면서도 딴짓을 해? 싸움 구경할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불문율도 모르냔 말이다.”
네더만이 칼을 돌리며 여유로운 척 굴었다. 흰사자와 달리 혀에 기름칠을 하여 만들어 낸 여유였다. 사실 자신은 체력이 방전되어 검을 쥐고 있기도 벅찰 정도였다.
그 증거로 검을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물러서라.”
에르카가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굳이 지금 나서서 제압할 필요 없다.”
그의 말에, 네더만을 압박하던 이들이 뒤로 걸음을 물렸다. 체력이 방전된 상태라도 상대는 용 사냥꾼. 괜한 피해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승패는 저들의 싸움으로 결판날 테니.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네더만 또한 시선을 다시 전장으로 옮기며 기다란 미소를 지었다.
“자, 승리의 여신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지 같이 지켜 보자고. 아무래도 그것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갈릴 거 같으니까.”
어차피 져도 손해 없는 장사.
“나는 흰사자가 이기는 것에 내 혀와 양팔을 걸지. 너희들은 뭘 걸 테냐?”
한번 통 크게 걸어 보는 네더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