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제58화 굽이치는 해협 (3)
네더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렌은 내게 고개를 들이밀며 조용히 속삭였다.
“제네스 님, 이거 아무래도 함정 같은데요.”
그 의견에 이리엘까지 합세하여 동조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어쩐지 용 사냥꾼이란 칭호의 무게에 비해 사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고요.”
“허, 지금 자네들 나를 의심하는 건가?”
둘의 심각한 표정에 네더만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참 너무들 하는군.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요리하고 설거지하며 쌓아 온 추억들은 그새 골동품 가게에 팔아넘기기라도 한겐가? 젠장. 난 무덤까지 가져갈 추억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늘.”
“아니, 말이 안 되잖아요. 굽이치는 해협의 본부가 테이난성이라니.”
이리엘이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알렌 또한 소리 없이 소리쳤다.
“변절자가 독립군의 수장이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허.”
짧게 한탄한 네더만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설마 자네도 나를 못 믿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내가 농담을 좋아하고 실없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지만, 거짓말을 하지는 않네.”
알렌과 이리엘도 나를 바라보며 답변을 요구했다.
내가 말했다.
“이 녀석이 못 미덥기는 해도 용 사냥꾼인 건 맞다. 그러니 저곳이 본부라는 말 또한 사실일 테지.”
둘과 달리 나는 그가 초원의 들개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이 용 사냥꾼이라 했으니 맞을 터였다.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연기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또한, 녀석의 강함이 그것을 선명히 증명하고 있었고.
“아, 그래요?”
내 말에 알렌은 곧장 경계태세를 풀었다. 하지만 이리엘은 여전히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확실한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이리엘도 그제야 굳어 있던 어깨를 늘어뜨리며 긴장을 풀었다. 네더만은 그런 녀석들을 보며 뒷목을 부여잡았다.
“아니, 내 말은 안 믿고 제네스의 말은 바로 믿는다고? 나 참,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다니! 내가 이 억울함을 가지고도 남은 여생을 편히 살아갈 수 있겠냐고!”
“그러게 왜 평소에 실없이 굴고 그래요.”
이리엘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네더만은 알렌을 보며 눈을 흘겼다.
“이리엘이야 그렇다 쳐도. 알렌, 자네마저 나를 못 믿을 줄은 몰랐네. 저 녀석을 욕하며 돈독히 다진 우리의 우정을 그새 잊은 것인가?”
그들이 함께 욕한 ‘저 녀석’이 나라는 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제, 제가 언제요!”
하얗게 질린 알렌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나를 보았다.
“전 제네스 님 욕 안 했어요. 주로 네더만 씨가 했고, 저는 동조밖에 안 했다고요.”
“자랑이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알렌의 변명은 들은 체도 않고 네더만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앞장서기나 해.”
“에휴, 서러워서. 나도 날 믿어 주는 동료들을 새로 구하든가 해야지.”
“남자가 그런 걸로 삐지고 그래요.”
네더만이 입을 삐쭉거리며 걷자, 이리엘이 그의 등을 치며 말했다. 알렌 또한 그 옆으로 붙어 아양을 떨어 댔다.
“에이, 장난한 거 가지고 왜 그러십니까. 사실 다 믿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런 거죠. 마음 상하셨어요?”
둘은 네더만을 어르고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테이난 후작이 굽이치는 해협의 수장이라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네더만도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고 있었기에, 뒤늦게 말한 것일 테고.
신뢰가 쌓이기 전인 첫 만남부터 말했더라면 확실히 지금보다 더 수상하게 여겼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를 믿는다.
인간적으로 신뢰한다기보다, 적어도 그가 거짓말을 하는 자가 아니란 의미다.
믿을 만한 자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은 이미 오래 전에 갖춘 상태였다.
“그럼 설거지와 요리, 각 2회씩 면제해 주게.”
“설거지 1회, 요리 2회로 가요. 이 정도가 딱 적당한 가격이에요. 저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거든요.”
네더만의 제안을 이리엘이 칼같이 잘랐다. 알렌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그 정도가 적당한 것 같은 데요.”
“뭐, 그렇다면야. 그럼 그 정도로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은 이 몸께서 친히 이해해 주도록 하지. 엣헴.”
헛기침을 하며 위엄을 세운 네더만은 나를 돌아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애초부터 알렌과 이리엘이 의심할 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 게 분명했다.
영악한 녀석.
확실히 잔머리는 잘 굴러 가는 놈이었다.
하는 짓이 애들이랑 다를 바가 없어 그렇지.
그래도 녀석 덕분에 우리는 아주 손쉽게 내성에 진입하여 앞으로 머물게 될 별채까지 안내받을 수 있었다.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사전에 마쳐 두었던 까닭.
“그럼 짐들 풀고 있게. 나는 카드론과 먼저 대담을 나눠야 해서. 굉장히 까칠한 녀석이거든. 그동안의 일을 낱낱이 보고해 줘야 해. 안 그러면 애처럼 징징거린다고. 아마 자네들과는 저녁에 인사를 나누게 되지 않을까 싶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우리를 만나기 전에 전반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제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면 안 되나? 이런 식이면 설거지 1회권을 더 받고 싶어지는데?”
“의심 안 했거든요. 그냥 따로 간다길래 쳐다본 거예요.”
이리엘의 말에, 네더만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헉. 설마, 나와의 헤어짐이 아쉬워서? 이런, 이런. 또 내 유쾌한 매력이 젊은 처자의 마음을 흔들고 말았군. 미안하지만, 자유를 사랑하는 나는 아직 네 마음을―”
“뭐라는 거야. 입 닫고 가던 길이나 가세요!”
이리엘이 눈을 부릅뜨며 말하자, 네더만은 쿡쿡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확실히 당찬 아가씨야. 그럼 이따 보자고.”
* * *
접견실의 문을 연 네더만은 자신을 기다리던 이에게 손을 들며 말했다.
“여어, 친구. 오랜만이야.”
유유자적하게 들어오는 네더만.
카드론은 그런 녀석을 보자 괜히 관자놀이가 다 지끈거렸다.
“오랜만은 무슨. 널 보니 머리가 다 아프다. 어떻게 된 거야?”
“급하기는. 오랜만에 본 벗을 이렇게 반기면 쓰나. 나 이번에는 정말 죽다 살아났다고.”
“그게 한두 번이냐.”
“이번에는 진짜라니까.”
맞은편에 풀썩 앉은 네더만은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던 차를 홀짝거렸다. 카드론은 그런 그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실없는 소리는 치우고, 있었던 이야기나 해 봐. 같이 온 자가 지금 북부에서 말 많은 그 흰사자 맞아?”
“그래.”
“그 이야기나 해 봐.”
카드론의 재촉에 네더만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죽 해 나갔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카드론은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이번에는 진짜 죽을 뻔하기는 했군. 그러게 내가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랬지.”
“그게 쉽냐. 내가 입은 가벼워도 심성이 고운 건 알잖아. 너처럼 박쥐 짓은 못 한다고.”
“내 덕분에 우리가 여기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고 사냐?”
“아주 가끔 하지. 도덕적이지는 않았지만, 매우 실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걸.”
네더만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래서 흰사자의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데.”
“몰라. 20대 중후반으로 보여.”
“그런데 소드 마스터라고?”
“그렇대도.”
“그게 말이 되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발렌시아 대륙의 역사상 최연소 소드 마스터의 타이틀을 가진 자는 역대 최강의 기사라 일컬어지는 ‘무한의 속검’, 바르안 알센도르였다.
그런 그도 48살에 소드 마스터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는데…… 그 반 정도 된 나이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네더만도 그것이 믿기지 않는 일임을 순순히 인정했다.
“말이 안 되기는 하지. 근데 그렇게 따지면 내가 설거지한 건 말이 되냐?”
카드론은 피식 웃었다.
“그것도 말이 안 되기는 한데, 비교할 걸 비교해라. 하지만 괜히 꼬시군. 직접 보지 못한 게 한이 될 정도야.”
입만 산 뺀질이 네더만이 20대 청년에게 꼼짝 못 해 설거지를 하는 꼴이라니. 참으로 속이 시원해지는 구경거리 아닌가.
입술을 빼쭉거린 네더만이 물었다.
“그나저나 로드르 헤이어서는 어쩔 참이냐?”
“어쩌기는. 별다른 방도가 있나.”
카드론이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프렌치아 전역이 술렁이고 있다.”
현재, 로드르 헤이어서는 프렌치아의 마지막 잎새와 같았다.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그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으니.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죽음이, 프렌치아의 완전한 몰락을 선포하는 것과 동일하게 느껴졌다.
오래전에 패망한 나라였지만, 이제야 완전히 깊은 역사 속으로 침몰하는 것 같달까.
긴 시간이 지난만큼 실질적인 영향력은 전과 같지 않겠지만, 독립군들은 물론이거니와 국민들도 그의 죽음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막을 수 없겠지.”
네더만의 말에, 카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을 미루던 10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아예 다르다. 현 프렌치아에서 할렌트는 왕보다 더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반하는 건 불가한 일.
곳곳에서 작은 폭동이 일어난다고 해도 가차 없이 진압될 터였다.
“흰사자는 어쩐다더냐?”
로드르 헤이어서의 처형이 흰사자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일이란 건, 정황을 살펴보면 손쉽게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
카드론은 이미 상황을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는 한, 로드르를 구해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네더만의 답은 예상외였다.
“가겠다더라.”
“상황을 알고도 가겠다고? 자살 행위라는 걸 모르는 바보는 아닐 테고. 젊음의 패기인가?”
“정확히는 자신감이지.”
네더만의 말에, 카드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할렌트는 절대 만만히 볼 자가 아니었다.
로드르를 여태까지 살려 둔 것만 봐도 그의 용의주도함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칼을 빼든 것은, 로드르의 사형을 가장 적절한 순간에 집행하기 위함이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다시금 끓어오를 때, 그것을 손쉽게 짓밟기 위한 카드로 남겨 두었던 것이지.
그런 그가 치밀히 계획한 함정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을 터.
흰사자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어쩔 방도가 없었다.
“말려는 봤어?”
“말려? 내가 그놈을? 그 자식 아무도 못 말려. 싸가지에 밥 말아 먹은 놈이라고.”
“너랑 비교하면?”
“장난하냐.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그래, 적어도 너만큼은 아니겠지.
“나보다 적어도 10배는 더한 놈이야. 아마 너한테도 반말을 찍찍 뱉을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아.”
“애송이가 감히 이 몸에게?”
카드론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이 몸은 무슨. 소드 마스터를 안방에서 상대할 작정이 아니라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걸.”
“…….”
“그 녀석, 소드 마스터 입문의 수준이 아니야. 완숙의 경지다.”
“……미쳤군.”
잠시 말문이 막혔던 카드론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갓 소드 마스터에 든 것도 아니고, 완숙의 경지라니.
고작 20대 중반을 넘긴 녀석이 현재 대륙의 최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었다.
흰사자가 가진 잠재력은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겠군.”
카드론은 확신할 수 있었다. 흰사자만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의 목표가 더 이상 꿈이 아니란 것을.
그 생각을 읽은 네더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한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하는 이야기만 봐도 북부의 흰사자의 수장과 강한 유대가 있는 것 같으니. 괜히 자극하지 말라고. 성깔이 정상은 아닌 녀석이니까.”
자칫 어그러지면 독립군 간의 집안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다.
서로 몰락하기 딱 좋은 상황.
그것을 쌍수 들고 환영할 자는 할렌트밖에 없다.
“북부의 흰사자에서 키운 자인가?”
“나도 잘 모르는데. 어쨌거나 얘기하는 걸 봐서는 가망 없으니 포기해. 괜한 수작을 부리려 했다가는 목이 베일 거다.”
네더만의 표정은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라는 의미. 실없는 녀석이 진지하게 굴 때는 그만큼 확신에 차 있다는 이야기였다.
카드론은 그런 네더만을 씩 웃으며 바라보았다.
“넌 아직도 날 모르냐? 내가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까. 그들의 유대가 강하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들의 관계가 끈끈한 우정이건 부러지지 않는 충정이건, 그런 것들을 단번에 뛰어넘는 관계성이 있지. 네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너, 설마?”
네더만의 동공이 흔들렸다.
카드론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신이 가진 최고의 카드를 꺼냈다.
“그래. 바로 정략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