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제85화 마그네트 지부 (1)
쪼개져 널브러진 테이블과 바닥에 쏟아진 음식들.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던 연회장은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사이에 널브러진 시체.
그들이 흘린 붉은 핏물이 바닥을 적신다.
나는 그 중심에서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검날을 타고 흐른 핏방울이 칼끝에서 맺혀 바닥에 떨어졌다.
똑. 똑.
죽음으로 덮인 적막 속에서 핏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홀을 울렸다.
나는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내고 검을 넣었다.
철컥.
홀은 여전히 고요했다.
나를 제외하고 산 자는 없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죽어 나자빠진 히스테론의 시체 앞에서 걸음을 돌렸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간 시체들이 발치에 늘어졌다.
나는 그들을 넘어 단단히 잠겨 있던 빗장을 풀고, 이곳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입구를 양손으로 밀어젖혔다.
구구궁.
활짝 열린 문이 내 걸음 뒤에서 닫히기 시작한다.
점차 좁혀지는 틈을 따라 완전히 삼켜지는 참사의 현장.
쿵!
문이 닫혔다.
나는 펼쳐진 너른 정원을 거닐었다.
내 요구대로 근처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밤의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훑었다.
놈들을 싹 쓸어버려서인지 유독 상쾌하다.
짙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상단을 나선 나는, 일행들과 접선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모두 안전하게 보냈습니다.”
임무를 마친 알렌과 이리엘도 모두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내가 그것들을 베는 사이, 알렌과 이리엘은 징병 된 프렌치아 사람들을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온 터였다.
지난 5일간 준비한 작전.
실패는 없었다.
지역별로 용병들까지 붙여 보냈으니 고향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용병들로 인해 밟힐 꼬리도 걱정은 없었다.
용병 길드와 접촉한 이들은 털북숭이와 쥐새끼, 가자미였다.
모든 일은 위르안 상단의 손을 빌려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내 손에 죽었다.
물론 총독부에서는 이 사건을 독립군이 벌인 짓이라 추정할 것이다.
하지만 범인을 특정할 수는 없을 테지.
히스테론이 그동안 우리를 철저히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일은 잘해.’
나는 흔쾌히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그 노고를 죽음으로 치하해 줬으니 저승에서라도 흡족해하겠지.
“울었냐?”
나는 평소와 달리 묵묵히 있는 알렌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쥐어 터진 것처럼 퉁퉁 부은 채로 축축한 물기까지 머금고 있었다.
“앞으로 언제 만날지 기약이 없잖습니까…….”
알렌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다 죽어 간다.
“결혼 약속도 안 했대요.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면서. 아주 착한 남자 나셨어요.”
이리엘이 입을 빼쭉 거렸다.
데이지를 위해 내린 알렌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척 굴지만, 이 또한 알렌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나는 녀석을 보았다.
“용케 안 따라갔구나. 하는 짓을 봐서는 다 내팽개치고 따라갈 것 같더니.”
이대로 데이지와 헤어진다면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
독립군으로 살아간다는 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삶이었다.
그는 결국, 가장으로서의 삶과 독립군으로서의 삶 중 독립군으로 사는 것을 택한 것이다.
알렌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네스 님도 참. 제 자리는 제네스 님 옆인걸요. 혹시 그동안 질투하셨습니까?”
딴에 분위기를 바꿔 보자 농담을 던지는 녀석에게 나는 가차 없이 꿀밤을 갈겼다.
빡!
“끄악!”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마음이나 잘 추슬러.”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로 마음이 약해지지는 않습니다.”
저렇게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걱정을 말라니.
물론 그런다고 걱정을 하지는 않지만.
“제 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알렌이 평소와 달리 비장하게 말했다.
퉁퉁 부은 눈두덩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본인을 향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 제 꿈은 프렌치아의 독립, 딱 그거 하나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족을 이루는 단꿈은, 그 꿈을 이룬 다음에나 가능하다구요.”
녀석이 코밑을 쓱 훔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제네스 님을 따라서 꼭 이 이야기의 끝을 볼 겁니다. 죽지만 않으면 제가 그토록 바라고 그리던 결말을 볼 수 있을 거 같거든요. 데이지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건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인 셈이죠. 모든 일이 끝나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밤바람이 우리 사이를 스치고 지나쳤다.
“저는 제네스 님을 믿고 있기에 데이지를 보낼 수 있었던 거라구요.”
녀석이 매번 하던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놈의 이야기 타령은.
“그러니까 전, 제네스 님 옆에 꼭 붙어서 프렌치아의 완전한 독립을 보고야 말 겁니다!”
녀석의 각오에, 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마음대로.”
일순, 울상이던 녀석이 환히 웃었다.
모든 번뇌를 털어 냈다는 듯이.
나는 그런 알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현듯 궁금하다.
녀석에게 이 나라는 무엇일지.
나야 전생의 왕세자였기에 패망의 책임을 통감하고 이 길 위에 있지만, 녀석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인생까지 걸면서 간절히 독립을 원하는 것일까?
그래서 물었다.
“넌 왜 독립을 원하냐? 이 나라가 너에게 무엇이라고.”
알렌은 별 새삼스러운 질문을 다 한다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나고 자란 나라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던 나라지요. 제 일상을, 제 미래를 품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독립을 원하는데 무슨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또 언젠가 태어날 제 자식들이 이 땅에서 핍박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해서지요. 가능성은 희박하고, 또 누군가는 그래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오랜 기간 생각했는지 술술 말하는 녀석이었다.
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느꼈다.
“그래도 누군가는 우리에게서 나라와 일상을 빼앗아 간 이들에게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세자였던 나도, 국민이었던 녀석도.
이 나라에 품고 있는 감정은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프렌치아는 우리가 그 당시 사랑했던 이들을, 소중한지 모르고 흘려보냈던 일상을, 또 찬란할 것이라 여겼던 미래를 모두 품고 있었다.
그 그림은 각기 다를지언정, 그것이 품는 의미는 같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프렌치아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녀석이 가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녀석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내게 말하는 동안에 생각이 확고히 정리된 듯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 이리엘이 달라붙으며 조그만 주먹으로 팔뚝을 때려 댔다.
“악! 뭐야? 넌 또 갑자기 왜 그래?”
“방금 좀 멋져서 그렇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사랑마저 미루는 남자. 내 남자로서는 별로인데, 옆에서 보기에는 정말 멋져요!”
“뭘, 이 정도 가지고. 음하하!”
이리엘의 칭찬에, 춤을 추는 알렌이었다.
고작 저게 멋있다니.
멋질 것도 퍽이나 없다.
저 녀석은 어떤 놈팽이를 만나 시집가려나.
알렌의 이야기 타령 덕분에, 나도 갑자기 우리의 에필로그가 궁금해졌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내가 바라던 삶을 살고 있으려나.
* * *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두 손을 간절히 모은 유리아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는 왠지 중후한 노신사이실 거 같아요.”
그녀는 곧 만나게 될 흰 사자를 상상하며 검은 정장을 맞춰 입은 노신사를 떠올렸다. 이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분명 중후한 멋이 있는 분이겠지.”
“어쩌면 겉으로 봤을 때는 지부장님과 달라 보이지 않을지도.”
피츠마도 의견을 보탰다.
이들 모두가 그리는 이미지는 다르지만, 흰 사자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일 거란 건 공통된 생각이었다.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가 풍기는 위엄이 그랬다.
유리아가 볼을 부풀리며 소리쳤다.
“할아부지와 닮았다니, 그럴 리 없어요!”
“그건 내 생각도 그래.”
이온은 다시 한번 유리아의 의견에 동조했다. 가만히 있다가 불똥을 맞은 하라브가 버럭 화를 냈다.
“이것들이 내가 어디가 어때서! 나도 젊었을 적에는 잘나갔어, 이것들아!”
“후, 벌써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포그렛은 하라브의 항변은 들은 체도 않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동안 수도에서 머물며 출정하는 제국의 기사들을 수없이 봐 왔다. 그들에게서 전해지던 압박감에도 목구멍이 턱하고 막힐 정도거늘. 소드 마스터라면 그런 이들쯤은 단칼에 벨 전력이 아닌가.
그를 마주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것들.”
하라브는 기대 어린 눈빛과는 달리 말을 툴툴 내뱉었다.
“그나저나 언제 오실까요.”
유리아는 아까부터 기척 없는 현관만 목 빠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흰 사자가 오기로 한 날인 까닭이다.
덕분에 유리아는 온종일 그가 머물 방을 광내느라 땀을 한 바가지를 흘렸더랬다.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똑똑.
다들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가장 먼저 일어난 유리아는 이미 현관으로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제가 나가 볼게요!”
저편에서 목소리가 흩어졌다.
얼마나 급했는지 행동이 말보다 몇 걸음은 앞서 있었다.
나머지들은 반쯤 일어나 있던 어정쩡한 상태에서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밀실의 문이 열리며 침통한 표정의 유리아가 들어오고, 그 뒤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르는 일행이 한 명 끼어 있었다.
이국적이지만, 귀공자처럼 잘생긴 청년.
그에게서 지체 높은 위엄이 흘렀다.
하지만 흰 사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는 오지 않은 듯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하라브가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새로운 일행분도 계셨군. 이쪽으로 앉으시게. 흰 사자는 오늘도 오지 않으신 겐가.”
“네?”
하라브의 물음에 알렌과 이리엘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이들의 오해를 깨달은 그들이 배시시 웃었다.
알렌이 제네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 그 명성 자자한 흰 사자인데요.”
“뭐라고?!”
화들짝 놀란 이들이 일제히 제네스를 바라보았다. 눈과 입을 쩍 벌린 이들은 그 상태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지금까지 그나마 감정을 추스르던 하라브도 이번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자가 흰 사자라고? 초원의 들개와 로열나이트를 홀로 부순, 그 흰 사자?”
“네.”
이리엘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허, 듣기로 그는 소드 마스터라던데…….”
힘이 빠져 소파에 기댄 하라브는 새파랗게 젊은 제네스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란 검의 정점에 오른 자.
전 대륙을 뒤져도 그 경지에 이른 자는 고작 네 명뿐.
그런데 그런 소드 마스터가 이렇게 젊은 청년이라니.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제네스의 건조한 음성이 장내를 훑자, 하라브는 그제야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급히 말했다.
“아, 미안하네. 나는 마그네트 지부 지부장, 하라브라고 하네.”
“제가 말했죠. 어렸을 때 오빠와 저를 돌봐 주셨던 분이세요.”
이리엘의 추가적인 설명에 제네스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제네스는 묘한 시선으로 하라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지부원들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유리아부터 이온, 피츠마, 포그렛까지.
그들은 본인들을 소개하면서도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쏙 빠졌던 혼이 돌아오지 않은 탓이다.
“그동안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일단 오늘은 편히 쉬는 게 좋겠지. 방은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 편히 사용하시게.”
제네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답지 않은 깍듯한 태도에 알렌과 이리엘은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제네스를 바라보았다.
무심히 돌아서려는 제네스를 하라브가 다급히 잡았다.
“아! 혹 어쩐 일로 수도에 왔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 부분을 알면 우리도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대략적인 방안을 추려 놓을 수 있을 듯한데.”
저번에는 이리엘과 해후하느라 이곳에 온 목적을 자세히 묻지 못했었다.
제네스가 말했다.
“할렌트의 목을 베고자 합니다.”
“뭐라고?!”
하라브는 일순 눈앞이 깜깜해지며 심장이 출렁 내려앉는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어찌나 놀랐는지 잠시나마 저승의 문턱을 밟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