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제87화 마그네트 지부 (3)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며 드러나는 참상.
“휘유, 깔끔하게도 죽였군.”
위르안 상단의 수뇌부가 몰살당한 사건에 수사를 맡은 헌병, 주터스는 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확인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의 몸에 남은 깔끔한 검흔을 보니 예사로운 실력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독립군 짓이겠죠?”
옆에 있던 부관, 그론의 물음이었다.
주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깔린 핏물을 피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겠지. 미개한 프렌치 말고 누가 이따위 짓을 벌이겠어. 빌어먹을 종자들 같으니라고.”
그는 주변에 깔린 적나라한 흔적들을 보며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갔다.
“아마 면식이 있었던 자 같은데. 녀석이 처음 들어왔을 때,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서 있었을 확률이 높아.”
“불청객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니야. 그냥 돌아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입구 쪽을 보고 서 있었을 거야. 그렇다는 건,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겠지.”
“프렌치라면서요?”
“변절자 새끼들도 있잖아.”
“아-.”
프렌치 중에서도 변절자들은 높은 직위를 가지는 이들이 있었다. 총독인 할렌트 바레인만 해도 프렌치아의 귀족이지 않은가.
주터스는 자세를 낮춰 죽은 이들을 자세히 살피며 신원을 확인해 갔다.
“이자가 히스테론이군.”
위르안 상단을 이끌던 그는 아래서부터 그어진 검에 머리가 쪼개진 상태였다. 주터스는 몸을 일으켜 전체적인 전경을 훑어보았다.
“검을 어찌나 빠르게 휘둘렀는지, 제대로 도망친 놈들이 없네.”
시체가 널브러진 반경이 그리 넓지 않았다.
홀로 살육을 벌였음에도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멀리 도망칠 수 있을 만큼의 시간도 주지 않았다는 의미.
정말이지 창졸간에 이 많은 이들을 쓸어버린 거다.
“그런데 말이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해 놓고도 흔적 하나가 안 남았냔 말이야.”
주터스는 턱을 쓸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범인은 이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킬 정도의 고위급 신분을 가졌으면서, 이들을 찰나에 쓸어버릴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자였다.
그런 이가 상단에 행차했는데 어찌 된 게 그에 대한 정보가 하나 없다.
환영을 거하게는 안 했더라도 하다못해 방이라도 내줬을 게 아닌가.
하지만 아랫것들을 여럿 심문해 봐도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누군가 감쪽같이 감춰 버린 것처럼.
“이번에 징용된 이들의 명부는?”
“남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른 것은 건드린 흔적이 없고 그쪽 정보만 홀라당 사라졌습니다.”
“역시나 독립군 짓은 확실한 거 같군.”
“예. 그래서 징병을 주도했던 이들을 따로 조사하려고 했는데요. 확인해 보니 그들 또한 모두 연회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관련자들을 여기에 몰아넣고 한 번에 깡그리 죽였다는 거 아냐.”
“……그렇죠.”
“미치겠군. 어쩌면 범인은 고위급 신분을 가진 게 아니라 신분을 사칭한 놈일 확률이 높겠는데? 그럼 말이 되잖아. 이거 아무래도 히스테론 녀석이 제대로 낚인 것 같아.”
주터스는 자신의 귓불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드러난 범인의 목적은 징병당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
독립군 녀석이 애초에 고위급 귀족을 사칭하며 접근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흔적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처럼 깔끔하게 지워졌을 리 없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히스테론이 깜박 속아 넘어갔단 말인가.
“……진짜 사칭을 했다면, 제국의 귀족 행세를 했을 수도 있겠군.”
가만히 생각하던 주터스가 말했다. 그론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네? 감히 그런 무엄한 짓을요?”
“미개한 족속들이 존귀함이 무엇인지 알겠냐. 이 정도의 무력을 가졌으니 속이기 쉬웠을 거야. 아마 몰락한 프렌치아의 귀족이었겠지. 그러니 귀족 흉내를 얼마나 잘 냈겠어. 히스테론 녀석, 아무래도 줄 좀 대 보려다 이 꼴 난 거 같은데.”
“오오. 뭔가 얼개가 맞아 들어가는데요?”
“이게 맞든 아니든, 일단 이런 식으로 짜 맞춰서 보고해야지. 흔적이 없으니 소설을 쓸 수밖에. X발.”
품에서 수첩을 꺼내 적은 그는, 지금까지 확인한 정보들과 그것을 토대로 내린 가정들을 휘리릭 적고는 수첩을 탁, 하고 닫았다.
“거, 어떤 놈이 이딴 짓을 벌였는지 되게 궁금하네.”
그는 수첩을 품에 넣으며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부관도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일순, 밖으로 나서려던 그들의 걸음이 일제히 멈칫한다.
그들의 눈앞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의 손이 다급히 허리춤의 검파로 향했다.
“누, 누구냐!”
“너희들이 궁금해하던 사람.”
남자의 무심한 목소리에, 그들은 예상했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검은 뽑히다 만 그 상태로 멈춰 있었다.
피슛!
치솟는 핏줄기와 함께, 검을 쥐고 있던 이들이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몸뚱이를 잃은 두 개의 머리통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남자는 주터스의 품에서 수첩을 꺼내었다.
화륵.
손끝에서 일어난 불길이 단숨에 수첩을 삼킨다.
남자는 불붙은 수첩을 바닥에 던지고 유유히 몸을 돌렸다.
주터스가 가정하여 적어 낸 글귀들이 불꽃에 타들어 가며 재가 되어 흩어졌다.
* * *
구울이 무덤을 파헤치듯 이리엘은 자신의 가방에서 옷가지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세실리아에게 선물받았던 옷들이 맨 밑바닥에 깔려 있는 탓이다.
“흠, 뭐를 입을까?”
침대 위에 놓인 세 벌의 옷을 보며 이리엘은, 이중 어떤 옷을 입을지 심도 있게 고민했다.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자기만족인 거지!’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위안하고 있었다.
“이게 적당할 것 같은데.”
여성스러운 남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몸을 요리조리 비틀며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수수한 디자인이다 보니 한껏 꾸민 느낌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꾸미지 않은 느낌도 아니라 마음에 쏙 들었다.
“흥~ 흥.”
옷까지 정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예쁜 얼굴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 정도면 완벽하지.
‘남자라면 홀딱 넘어오지 않고 못 배길걸!’
그렇다고 제네스를 넘어오게 만들겠다는 속셈은 절대 아니라며 괜히 혼자 변명하는 이리엘이었다.
밖을 나서니 쾌청한 날씨가 그녀를 반겼다.
푸른 하늘과 따뜻한 햇볕, 그리고 선선한 바람까지.
이렇게 날이 좋으니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닌가.
이 기분은 절대 제네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소풍을 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네스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같이 출발하면 좋으련만, 제네스는 아침부터 들를 곳이 있다고 하여 어쩔 수 없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해리 피터의 마법 상점.’
젊은 남녀가 많이 모이는 뜨거운 곳이란다.
참 나.
‘괜히 다른 생각 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이거 데이트 아니고 그냥 수도 좀 둘러보러 나온 건데.
제네스는 그런 비슷한 말을 한 적도 없는데, 홀로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이리엘이었다.
* * *
잠깐의 볼일을 마친 나는, 이리엘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위르안 상단에 잠시 들르느라 ‘해리 피터의 마법 상점’에서 만나기로 한 까닭.
마그네트의 시민들이 약속을 잡을 때 자주 이용하는 장소라고 한다.
나는 밀도 있게 늘어선 건물의 지붕을 밟으며 빠르게 달렸다.
대로에는 사람이 많고 마차들이 지나다녀 이렇게 가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좋았다.
기척을 숨기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도 않고.
타닥.
‘해리 피터의 마법 상점’은 멀리서부터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히 꾸며져 있었다.
벽면을 타고 오른 푸른 넝쿨들만 보아도 존재감이 확실하다.
타닥.
지붕에서 내려오니 저편에 서 있는 이리엘이 보였다. 사람이 많이 몰려 있음에도 눈에 확 띄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평소와 달리 남색 원피스를 입은 채였다.
그녀를 부르려는 찰나, 어떤 놈이 나보다 먼저 이리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리마리오 가문의 막내아들 버터라고 합니다. 가만히 서 계시는 모습만 보았을 뿐인데, 그 자태가 안개꽃 사이에 핀 한 송이 장미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워 눈이 머는 줄 알았답니다. 혹 방해가 안 된다면-.”
“방해된다.”
내 말에 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 오셨어요.”
느끼하게 생긴 놈을 보며 거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리엘이 반색하며 내게 가까이 붙었다.
“아, 이런. 일행분이 계셨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녀석은 나를 보더니 쪼르르 내뺐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혀를 찼다.
패기도 없는 놈이 무슨 미인을 얻겠다고.
“그리 옷을 입으니 파리가 꼬이는 게 아니냐.”
“제가 똥이에요? 파리가 꼬이게. 꽃이 예쁘니 벌이 꼬이는 거죠. 그런데 왜요? 이 옷 입으니 저 예뻐요? 예쁘면 예쁘다고 말해도 돼요. 명백한 사실이니까.”
이리엘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예쁜 척을 해 댔다.
얘, 뭐 잘못 먹었나?
“아침 뭐 먹었냐.”
“저요? 그냥 바게트 빵 먹었는데요.”
“근데 왜 그래?”
“뭐가요?”
“됐다. 가자.”
광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이리엘이 내 팔을 붙들며 말렸다.
“광장은 이쪽이에요!”
그녀는 내가 가려던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을 알아?”
“네, 대충은. 웨일런궁으로 갈 때 항상 이 길을 지나쳤었거든요. 마차를 타고 다녔지만 이 정도는 기억나요.”
나는 당당히 앞장서는 이리엘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아침부터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위르안 상단에.”
“네? 거기는 왜요?”
이리엘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범인은 현장에 다시 돌아온다, 뭐 그런 거예요?”
“그런 거겠냐.”
“그럼 왜요? 깔끔하게 정리된 거 아니었어요?”
깔끔히 정리된 거 맞다.
추리는 그럴듯하게 했다만, 우리를 찾을 수는 없었을 거다.
“그들의 수사 방향을 내 쪽으로 돌려 놓으려 했다. 범인이 아직도 수도에 남아 있다고 판단되면 나를 찾기 위해 더 집중할 테니.”
“아-.”
그녀는 내 의도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수사하든 닭 쫓던 개처럼 지붕만 쳐다보는 신세가 될 테지만, 그 지붕이 징병되었던 이들인 것보다는 내 쪽인 게 더 확실한 마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시선을 내 쪽으로 확실히 돌려 놓은 것이다.
“흠, 제네스 님 가만 보면 은근 자상한 구석이 있는 거 같아요. 말은 못되게 해도 뒤에서 은근히 신경 써 주는. 왜 그래요? 기왕 말도 예쁘게 하면 좋잖아요.”
나는 한 손으로 이리엘의 양 볼을 집게처럼 집고 나를 향해 있던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앞이나 봐.”
“칫.”
그녀는 입을 빼쭉 내밀며 불만을 표했지만, 금세 시선에 담기는 것에 감탄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오. 이건 그대로네요!”
“그러게.”
우리 앞으로는 요정과 신수들의 조각상으로 꾸며진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다.
“많이 바뀌었지만, 그대로인 것도 있어요.”
이리엘은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 조각상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국적으로 변해 버린 마그네트였지만, 자세히 보면 여전한 곳도 많았다.
“어렸을 때는 이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는데…….”
옛 생각이 나는지 이리엘은 아련한 눈빛으로 분수대를 쓸어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과거의 기억들이 왠지 내 눈에도 보이는 듯했다.
그런 이리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내게 이 도시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소하게 다가올 만큼 많은 것이 변했지만, 자세히 보고 있으면 내가 기억하던 예전의 모습들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이리엘이 내게 그랬다.
시간은 그녀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여인으로 만들었다. 성격도 전보다 많이 유해졌고. 그럼에도 함께 지내다 보면 전에 내가 알던 그 소녀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반갑게 인사를 하곤 한다.
그래서 그녀를 골려 먹는 게 더 재밌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치켜뜰 때, 주로 내가 알던 그 얼굴이니까.
만약 프렌치아가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이리엘은 지금쯤 혼인을 했겠지. 그리고 지금처럼 이 거리를 왕세자와 왕세자비로서 걸었을 테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여기 있는 게 새삼 신기하다.
패망한 국가의 왕세자로 처형당한 이가, 무림의 천하제일인이 되어 10년 만에 귀환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처음에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불만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돌아오기를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모로.
“여기가 바로 테나스타 광장이에요!”
우리는 어느새 사방이 탁 트인 거대한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 넓은 공간이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나는 그 중심에 세워진 시계탑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전생에 내가 처형당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