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제90화 다섯 개의 성문 (1)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문 주변을 은은히 밝히는 빛무리 안쪽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평소처럼 망루에 올라 경계를 서던 위병들은, 그제야 누군가가 성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저거 뭐야?”
“누가 오는데?”
도심과 총독부의 정문을 잇는 넓은 대로.
양측으로 간헐적으로 깔린 횃불.
그 중심에서 사람의 형체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웬 미X놈의 등장에 위병들은 무기를 꼬나쥐며 소리쳤다.
“멈춰라!”
“더 다가오면 활을 쏘겠다!”
위협이 통한 것일까?
검은 그림자가 멈춰 섰다.
“뭐지? 또라이인가?”
“몰라. 얼굴에 뭘 쓰고 있는 거 같은데.”
거리가 있어 정확한 분별이 어려웠지만, 얼굴 쪽이 뭔가 허연 것이 꼭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은 총독부다! 당장 꺼-.”
위병은 하던 말을 멈추며 숨을 들이켰다.
분명 저 멀리 있던 존재가 바람에 삼켜진 촛불처럼 훅 꺼지며 사라져 버렸다.
“뭐, 뭐지?”
“자네도 봤는가?”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진 기현상에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귀청을 찢는 굉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발바닥에 묵직한 진동이 전해졌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 그들은 다급히 뒤를 돌아 내성 쪽을 살폈다.
그러고는 할 말을 잃었다.
“…….”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예상 밖의 상황이 그들의 사고를 강제로 멈추게 했다.
뿌연 먼지구름과 비산하는 잔해들을 보며 그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현재가 현실인지를 의심했다.
꿈결보다도 꿈같았다.
그도 그럴 게.
누군가 총독부의 정문을 통째로 날려 버린 것이다.
* * *
구오오오오.
터져 나간 성문의 잔해들이 널찍이 퍼지며 비산했다. 굳건한 성문이 있던 자리에 뿌연 분진이 고요히 내려앉는다.
첫 번째 성문을 뚫은 것이다.
아주 쉽지만은 않았다.
성문을 부수며 받은 반발력에 오른손이 찌릿찌릿 저려 왔다.
보안 마법이 중첩된 성문은, 생각보다 더 단단하여 예상보다 더 많은 내력을 소모케 했다.
확실히, 총독부는 다르다는 이건가.
팟.
나는 가볍게 걸음을 박차며 먼지구름을 갈랐다.
동시에 허리춤에 매여 있던 롱소드를 뽑았다.
스르렁.
서슬 퍼런 울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백색의 기다란 검신.
오늘 하루 날뛰기에는 적당한 검이었다.
땡땡땡땡-!
사방에서 경종 소리가 요란했다. 고요히 잠들어 있던 총독부가 시끄럽게 깨어나고 있었다.
쉬아아악!
나는 아직 병사들로 채워지지 않은 영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총독부는 직선거리만 가늠해도 굉장히 넓었다.
과거 프렌치아의 왕궁으로 쓰였으니 당연했다.
나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전경 속을 달렸다.
굉장히 오랜만에 이곳을 디뎠지만, 감상에 젖을 때는 아니었다.
일단, 적들이 쌓이기 전에 최단으로 뚫는 것이 내 첫 번째 목표였다.
“저기다! 막아!”
이곳저곳에서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제국군들.
부우우우-!
적의 발견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도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어 댔다.
시야가 금세 병력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나를 잠시도 잡을 수 없다.
나는 나아가는 속도를 죽이지 않은 채 앞을 막아 오는 이들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슈아아악!
걸음을 따라 뿌려지는 검이 대기를 가르며 길을 튼다. 은빛 궤적이 번쩍이자 앞을 막아 오던 녀석들은 별다른 대응도 못 하고 허수아비처럼 허물어졌다.
뱀처럼 매끈한 움직임이 헐겁게 가둬 오는 포위망쯤은 가볍게 뚫고 지나간다.
피슈슈슈슝!
이어 화살 깃이 요동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검은 소나기처럼 전방위를 점하며 떨어지는 화살 비.
나는 멈추지 않고 그 안에서 걸음을 디뎠다.
의지를 따라 일어난 내력이 발끝으로 향하고, 그것이 지면과 부딪치며 일순 폭발한다.
콰앙!
그와 동시에, 내 몸은 한 줄기 질풍이 되어 쏘아졌다.
찰나에 삼켜지는 공간.
화살 비는 모두 걸음 뒤에서 떨어져 내렸다.
“막아라! 녀석을 잡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앞을 막아 오는 녀석들.
꽤나 용을 쓰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헐겁다.
나는 앞을 막아 오는 이들의 곁을 잠시도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났다.
피슈슛!
내가 지나간 자리로 붉은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목을 베인 이들이 한 걸음 늦게 허물어졌다.
앞을 막아 오는 병력의 밀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응이 아무리 빨라도 나를 가둬 두기에는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빈틈을 이용하여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막아!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란 말이-.”
푸확!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지휘관의 목이 달아났다.
적들은 나를 제대로 쫓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목이 베였다.
그래도 완전히 바보들은 아닌지, 내가 두 번째 성문에 다다랐을 즘에는 제법 튼튼한 인의 장벽을 구축한 상태였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것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
나는 검병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검을 쥔 오른팔이 흐릿하게 번졌다.
콰과과과광!
사방으로 갈라진 검기가 너른 그물망을 짜내며 전열을 사납게 헤집는다.
번갯불 튀듯 번쩍인 섬광이 전장을 내달렸다.
“크아악!”
찰나에 비명이 가득해진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나아갔다.
하지만 이내 사방에서 몰아치는 제국군들.
화륵.
시리도록 푸른 불꽃이 검날 위로 타오른다.
일 검에 하나를 베어서는 이곳을 절대 뚫을 수 없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4장 광휘폭검(光輝爆劍).
폭발하는 섬광이 나를 중심으로 팔방으로 뻗어 나간다.
일대 반경을 삼켜 버리며 폭발하는 검기.
구체의 빛무리가 공간을 통째로 밀어 버린다.
창졸간에 넓은 범위를 지워 버리는 광역기에, 제국군을 일제히 패닉에 가까운 상태에 빠졌다.
간격에 닿지 않아 살아남은 녀석들은 나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사이 내 앞에는 어느새 두 번째 성문이 놓여 있었다.
* * *
총독부 제1경비단 3중대 중대장, 크로아는 무력하게 쓸려나가는 부하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병력이, 범람하는 강물에 휩쓸리듯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이승을 하직하고 있었다.
‘저, 저걸 대체 무슨 수로 막아…….’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병력을 거스르다 못해 갈라 버리는 무지막지한 무력.
정말이지 저자는 레오니랜서의 화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격이 다르다.
거인이 개미들을 짓밟듯 그는 제국의 병사들을 그야말로 처참히 뭉개 버리고 있었다.
“막아!”
“앞을 지켜!”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는 놈은 목을 베겠다.”
“전열을 유지해!”
지휘관들의 악을 쓴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의 걸음을 잠시도 잡지 못한다.
‘이것이 소드 마스터인가?’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자들을 본 적이 있다.
경비단의 총대장이자 특임대 ‘강철의 벽’의 수장, 히르텐 또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자였으니.
하지만 그는,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본 누구도 이 정도로 압도적인 면모를 보일 수는 없을 터였다.
그야말로 검의 정점에 이른 자.
크로아는 그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나 있음을 쉽게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게 말이 돼?’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소드 마스터는 하나의 군단과 같다는 말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와 새삼스레 깨닫는다.
6만에 이르는 군세가 하나의 인간과 맞먹는다는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그 앞에선 병사들의 숫자가 무의미했다.
몇 겹의 전열이 막아서든 흰 사자는 그것을 손쉽게 갈라 버리고 지나쳐 버린다.
군세의 힘이 하나의 검날로 뭉치면 저것이 될까?
수많은 이들의 무력이 압축되고 응축되어 검의 형태로 빚어진 것이 바로 소드 마스터였다.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무구.
그것은 일반 병사들로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머릿수로만 계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콰르르릉!
총독부를 흔드는 굉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검기가 새긴 깊은 고랑이 남았고, 그 안으로 핏물이 고여 든다.
그 광경을 처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크로아는, 마찬가지로 흰 사자의 전력에 넋을 놓고 있는 부하를 불렀다.
“소대장.”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전의를 잃은 채 그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어렵게 떼어진다.
“상부에 전하라. 흰 사자를…….”
그의 눈동자에 깊은 절망이 드리웠다.
“도저히 막을 수 없다고.”
* * *
콰아아아앙-!
첫 번째 성문이 부서진 지 오래되지 않아, 또 하나의 성문이 터져 나갔다.
나는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문 너머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완전히 준비된 전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적들을 돌파하는 사이 결집한 까닭.
당연하게도 병력의 밀집도와 방어 태세가 지금까지보다 훨씬 두껍다.
하나의 문을 넘을수록 녀석들은 그 두께를 더해 가겠지.
총독부는 말 그대로 현 프렌치아의 심장이나 다름이 없는 곳.
이곳을 홀로 뚫어 내겠다는 건, 사실 자살 행위와 다르지 않은 일이다.
나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뒈져라!”
내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병력들.
아직 내 전력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눈은, 내 뒤편에 있는 이들과 달랐다.
절망이 아닌 분노를 담은 시선들.
나는 홀로 그것들을 향해 맞서 나갔다.
망설임은 없었다.
이들의 수가 백이든 천이든 만이든.
내게는 무의미했다.
어차피 적들이 점할 수 있는 방위와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이들의 병력이 총독부를 가득 채운다 한들, 한 번에 떨어지는 검격의 수는 아무리 많아도 열을 넘지 못한다.
결국 체력의 문제인 셈.
콰과과과광!
손끝이 흔들리자 폭음이 일어난다.
은빛 격류가 팔의 궤적을 따라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물살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병력을 가르며 전진했다.
마치 강물을 거꾸로 거스르는 듯하다.
하나, 이렇게 가서는 끝이 없다.
검병을 움켜쥐는 순간, 대해처럼 드넓은 단전에서 막대한 내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콰아-.
구결을 따라 체내를 휘돈 그 막대한 기운이, 신체의 운동 방향을 따라 손끝으로 흘러들어 이내 검첨에서 폭발한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2장 흑관섬(黑貫閃).
과거 스티스시에서 일격에 성문까지 뚫어 버렸던 그 검세가 다시 한번 총독부에서 재현되었다.
콰과과과과과!
앞을 막아 오는 공간마저도 꿰뚫으며 곧게 뻗어가는 검기의 폭발.
전방을 일격에 관통하는 압도적인 검세.
일 점에서 쏘아진 거대한 빛살이 전열을 세로로 갈랐다.
구오오오오.
섬광이 찰나에 지나친 자리는 처참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그 광경에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더 이상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하나로 엉키며 그들을 현실에서 이격시켰다.
그럴 만도 했다.
단 한 번의 찌르기에 인의 장벽이 기다랗게 깨져 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