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제96화 타오르는 불길 (1)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밀실.
하라브는 작은 호롱불에 의지한 채 손에 쥔 긴 철봉을 쓸어 보았다.
제네스의 부탁으로 만들었던 프렌치아의 국기.
오늘 아침 아르센 첨탑에서 펄럭이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라브는 제네스가 이것과 함께 건넨 말을 떠올렸다.
-조만간 다시 쓰이게 될 거다.
심장을 시큰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가 초대형 국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어떻게 쓸지는 대충 예상이 갔으나,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니까.
그런데 그것을 진짜 총독부에 걸어버릴 줄이야.
‘죽어도 여한이 없…….’
아니지. 꼭 살아야지.
꼭 살아서 다시 봐야지.
하라브는 아직도 꿈결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을 되감았다.
거리로, 지붕 위로 오르던 사람들.
그들이 모두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프렌치아의 국기를 바라보는 장면은, 지금껏 살아오며 본 것들 중 가장 장관이었다.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매번 해 온 의식이었음에도, 그 앞에 놓인 국기가 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달랐지.’
물기 어린 표정으로 한곳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하나같이 감격에 찬 얼굴들.
자신의 얼굴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한마음 한뜻이 된 거다.
그 일체감에서 오는 뭉클함이란…….
당시 누군가 제국군을 향해 돌격하라 명했다면, 자신은 바닥에 떨어진 돌이라도 쥐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달렸을 테지.
그 정도로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혼자서 해내다니…….’
하라브는 자연스레 제네스를 떠올렸다.
새파랗게 어린 청년.
언제나 무심한 표정의 그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이리도 큰불을 지필 줄이야.
정말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제대로 통감한 그였다.
‘흐음.’
그리고 그런 제네스의 능력이 너무나도 뛰어났기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걱정도 있었다.
그는 홀로 총독부를 뚫고, 그 위에 프렌치아 국기를 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내였다.
지난 10년간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자였다.
훗날 프렌치아가 독립을 했을 때, 이 나라는 그의 것이 아닐 수 있을까?
정녕, 이토록 날카로운 검을 품어 낼 수 있을까?
그의 머릿속으로 푸른 청발의 청년이 떠올랐다.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에, 항시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얼굴.
어렸을 적부터 루시안을 보아 왔기에, 하라브는 그 아이가 얼마나 특별한 아이인 줄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떠한 사건 사고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던 아이.
누구보다 세상의 본질을 빠르게 통찰하던 아이.
루시안은 자신이 본 사람 중, 가장 그릇이 큰 자였다.
무엇이든 품어 낼 수 있을 만큼.
이런 자신의 기우를 읽은 것일까?
상상 속의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염려할 필요 없다는 듯이.
그 미소를 마주한 하라브의 입꼬리가 기다랗게 올라갔다.
‘그래. 그 루시안이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그라면.
아니, 그이기에 이토록 날카로운 검마저 품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왕좌에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더군다나 그의 옆에는 ‘북부의 별’이 있었다.
제네스가 가진 위험을 모르고 있을 리 없을 터.
생각이 정리되자 마음 한편이 가벼워졌다.
그제야 그는 이 감격을 다시 한번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그는 국기가 담긴 기다란 철봉을 아이처럼 고이 쓸었다.
“이것이 다시 걸리는 광경은 꼭 보고 죽어야지.”
* * *
하라브에게 국기를 건네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안에는 알렌과 이리엘이 나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다.
뭔데 이것들.
“제네스 님!”
알렌 녀석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언제나처럼 호들갑을 떨며 뛰어왔다.
가만두면 껴안기라도 할 기세라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빡!
“끄악!”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녀석이 머리를 감싸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 자식.
드디어 미친 건가?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내 꿀밤에는 추궁과혈의 수법이 섞여 있어 맞을수록 오히려 머리가 맑아질 테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덜 아프게 때렸나?
맞아 놓고 왜 처웃고 있어?
“정말이지, 저는 오늘 너무나도 감격했습니다.”
녀석은 마치 데이지를 보듯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경험은 제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안주거리가 될 거라고요.”
“그 무덤에 오늘 들어가고 싶어서 그런 눈을 뜨는 거냐.”
“제 눈빛이 왜요?”
“나를 데이지 보듯 바라보고 있지 않느냐.”
“아, 그래요?”
그는 다급히 눈에서 힘을 뺐다.
“지금은 어때요?”
“나쁘지 않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천천히 말해 주마.”
“진짜죠? 꼭이에요. 꼭!”
녀석이 다시금 눈동자에 빛을 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싸늘히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무덤부터 갈 생각인가 보지?”
화들짝 놀란 알렌은 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꿨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왜 이리 호들갑 떠는지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보며, 내가 국민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잘 전달되었음을 알았다.
아마 다들 같은 감정이었을 거다.
나는 언젠가 말했다.
프렌치아는 곪아 있다고.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해결해 주다 보면 끝도 없다고.
그래서 통째로 도려내야 한다고.
나는 이번 일이 그들의 곪은 상처를 조금이나마 도려냈기를 바랐다.
그리고 분명 그렇게 됐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쟤는 왜 도끼눈이냐?”
내 눈짓에 뒤를 돌아본 알렌은, 사나운 눈초리의 이리엘을 보며 흠칫 놀랐다.
그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좋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저게?”
알렌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또한 이리엘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는 까닭이고, 이리엘의 얼굴은 누가 봐도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눈동자에서 붉은 귀화가 타올랐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알렌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아무래도 독이 올라 잘못 이해했나 보다.
이리엘이 복어처럼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왜 말 안 했어요!”
“뭘?”
“국기를 걸 거라고요. 그래서 동트고 나서야 올 수 있을 거라고요!”
이리엘이 늑대처럼 콧잔등을 들썩였다.
무섭지는 않지만 제법 사나워 보인다.
그나저나.
“내가 말 안 했었나?”
생각해 보니 하라브에게 국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만 했지, 이들에게 따로 그것에 대해 말한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이리엘은 그 기세를 타고 몰아붙였다.
“네! 말 안 했거든요!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 안 해요? 생각보다 늦어져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그래서 저렇게 뿔이 나 있었군.
하여간.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죽으러 갔겠냐.”
“그래도 걱정이 된다고요! 그쪽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것도 알겠는데! 그래도 나는 걱정이 된다고요! 알겠어요?”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성격이 더럽기는 하지만, 전생에서도 이만큼 진심인 건 몇 번 못 본 거 같은데.
하긴, 이 녀석들의 실력으로는 내 경지가 얼마나 지고한지 모르겠지.
그러니 천하제일이면서 천하무적인 내게 매번 호들갑을 떨고 걱정하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단순히 동료로서 걱정하는 거예요. 그간 같이 다니면서 정도 들었고, 또 우리 오빠도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고, 뭐 그래서 걱정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요!”
이리엘은 도둑놈이 제 발 저리듯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해 댔다.
왠지 아까부터 묘하게 혼자 샛길로 빠지는 거 같은데.
“오해는 무슨 오해?”
얘야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그, 그건 알 거 없고요. 어쨌거나! 우리 새벽부터 걱정 엄청 했거든요! 몇 시간 동안! 알렌 형님의 엄지손톱 좀 보세요. 다 닳아 없어진 거 안 보여요?”
“맞습니다! 저희 엄청 걱정했다고요!”
알렌도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는지 펄쩍 뛰며 말을 보탰다. 그것에 힘을 받은 이리엘은 팔짱을 끼며 턱까지 치켜들었다.
“거봐요! 그러니까 앞으로 어디를 가면 언제까지 온다, 계획은 뭐다, 대충이라도 말해 주라고요. 사람 걱정시키지 말고.”
“그러지.”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
이리엘은 내가 순순히 대답하자, 기세를 잃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풀어졌다.
“……진짜요?”
“그래.”
“너무 순순하게 요구를 받아 줘서 그런지 괜히 걸쩍지근한데요?”
“그러게.”
알렌도 그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보다 너무 쉽게 받아들여서 힘이 빠졌나 본데.
이것들은 내가 그리하겠다는데도 이리 엇나가지.
나는 녀석들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훑으며 말했다.
“뭐, 그럼 서약이라도 해 주랴? 할 말 끝났으면 둘 다 그만 나가거라. 수도에서 일정은 끝났으니 바로 움직일 채비하고. 내일 바로 떠날 것이다.”
나는 멀뚱히 서 있는 녀석들을 파리 쫓듯 내쫓아 보냈다.
“아, 참. 그런데 할렌트의 목은 베셨습니까?”
알렌이 고개만 방 안으로 불쑥 들이밀며 물었다.
그 밑으로 이리엘의 머리도 불쑥 솟아났다.
“그러게요. 어떻게 됐어요?”
“베었으면서 베지 못했다. 자세한 건 이따가 말해 주마.”
“아, 네.”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사라졌다.
이제야 방 안이 좀 고요하다.
나도 좀 쉬어야겠다.
간만에 힘을 좀 썼더니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일 당장 움직이려면 더욱이 몸 상태를 최상으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포르센 항구.
먼저 간 네더만이 그곳에 있었다.
대충 뭐라도 알아놨겠지.
이번에 가짜 할렌트에게서 얻은 정보로 봤을 때, 소해에서 모든 것이 얽히고 있었다.
아마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결착이 날 듯하다.
* * *
“……후.”
방으로 돌아온 이리엘은 혹시 옆방에 들릴까 하여 한숨도 작게 내쉬었다.
제네스의 귀가 귀신보다 밝은 것을 알게 된 이상, 한숨도 편히 쉴 수 없는 심정이다.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얼굴을 푹 묻었다.
조금 전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이 귓가를 스친다.
요새 대체 왜 그러는지.
진짜 머리라도 다친 것인가?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다.
“에효.”
생각만 해도 깊은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이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까닭.
밤새 제네스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사고가 발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다.
제네스 앞에서 삐걱거리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다.
‘……나 저 인간 좋아하네.’
그것도 꽤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