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제143화 얼음과 푸른 뱀
제국의 자존심, 레트로이나 6검이 패배했다.
소드 마스터도 이길 수 있다는 군단급 전력이, 한 사내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츠르센은 경직된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불길의 파도가 있었다.
넘실거리는 홍염.
그들의 불꽃은 태양처럼 뜨거웠다.
멀찍한 거리에 있음에도 뙤약볕의 열기가 폐를 덥혔다.
지반이 말라비틀어져 갈라지고 뜨거운 열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헛것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세찬 화마 속에서 피어난 청백색의 광채.
그것이 불길을 갈라 버릴 때마다 반짝이는 가루가 흩날렸다.
‘얼음 알갱이?’
그것이 작은 얼음의 결정이란 건, 뜨거운 열풍 사이로 느껴지는 한줄기 한기 덕분에 유추할 수 있었다.
미세한 기운이 닿았음에도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기분. 한겨울의 찬 바람을 맞은 듯 온몸의 털이 바짝 일어선다.
‘……그는 얼음 속성의 마력을 가진 것인가?’
아무래도 저것이 흰 사자의 전력인 듯했다.
불길로 뒤덮였던 평원 위로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다. 뜨겁게 타올랐던 대지가 어느새 새하얀 설원이 되어 있었다. 흰 사자가 뜨거운 태양을 한입에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콰아아아아-!
여섯 개의 불꽃이 빠르게 꺼지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세차게 타오른 홍염마저도 설원을 가르는 기다란 검격에 빛을 잃어버렸다.
휘이잉.
한 점의 열감도 느껴지지 않는 찬 바람이 온몸을 훑었다. 영혼마저 얼어붙을 듯한 서늘함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저것은 막아 낼 수 없다.’
인간의 검격이 아니었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무력이 아니었다.
태양의 검이라 일컬어지는 레트로이나마저 그 앞에서는 작은 모닥불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휘청.
그때였다. 흰 사자의 몸이 기울어지며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은.
!!
부상을 입은 것인가?
자신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그는 검을 바닥에 꽂아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그것은 그의 부상이 서 있기도 버거울 만큼 심각하다는 의미.
레트로이나 6검을 홀로 상대했으니, 당연했다.
불타는 평원을 단숨에 설원으로 만들어 낼 만큼 막대한 마력을 쏟아부었다.
부상을 입는 게 당연했다.
츠르센의 머릿속이 맹렬히 회전했다.
만일 저자가 몸을 회복한다면 승산은 없다.
자신의 가문은 이 평원처럼 새하얗게 얼어붙고 말 것이다.
그래.
지금이어야 한다.
지금밖에 없다.
“놈을 죽여라-! 흰 사자는 부상을 입었다!”
츠르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주위에 있던 기수들이 푸른 뱀이 그려진 트레왈로가의 깃발을 세차게 흔들었다.
“전군 돌격!”
츠르센은 창을 쥐고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렸다.
모두가 흰 사자의 압도적인 무력에 경직된 상황.
가주의 걸음만이 그런 이들의 발을 떼게 만들 수 있었다.
“쳐라-!!”
가신들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주변을 빼곡히 두르고 있던 트레왈로가의 정예가, 그들의 정수가 한 점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두 직감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그를 죽일 수 있음을.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다!’
레트로이나 6검을 상대한 바로 직전이라면,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었다.
그에게 닿기도 전부터 가문이 얻게 될 영화와 명성이 아른거렸다.
레트로이나 6검을 이긴 흰 사자를, 트레왈로가가 사냥했다.
대륙이 들썩일 테지.
상처 입은 사자를 잡았어도 사자는 사자.
더군다나 그는 태양을 집어삼킨 흰 사자였다.
프렌치아 최강의 가문으로 올라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그들은 이를 악물고 설원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 *
“어…… 어?”
멀찍이서 전체적인 상황을 지켜보던 리포드가 당혹스러운 음성을 뱉었다. 인간이 작은 점처럼 보일 정도로 멀었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왜요? 왜요?”
그의 옆으로 다른 이들이 모여들었다.
장내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이들이 없었다. 흰 사자가 무릎 꿇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걸 파악한 건 리포드와 레이나뿐이었다.
“설마 부상인가? 녀석이 무릎을 꿇었다, 레트로이나를 모두 벤 직후에. 부상을 입은 듯한데 어떡하지?”
리포드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빌어먹을.
레트로이나 6검을 베어 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세차게 뛰고 있다.
“저러다가는 뒈지겠는데. 그렇다고 가 봤자 나도 뒈지는데. 그러게 혼자서는 무리라니까!”
트레왈로가의 핵심 인력들이 모인 상황.
그들이 검은 물결이 되어 제네스를 향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하나, 알렌과 이리엘은 리포드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알렌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리엘이 자랑하듯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제네스 님이 말해 줬거든요! 6검을 벤 이후에 도망칠지 모르니 유인할 거라고. 아마 그걸 거예요!”
“그래?”
리포드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럼 연기겠지?”
“그럼요! 제네스 님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요!”
알렌이 눈에 힘을 주었다.
마음속에서 괜한 불안이 일기는 했지만, 눈을 부릅뜨며 그것을 눌렀다. 소드 마스터를 넘어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와닿지는 않지만, 적어도 소드 마스터보다 압도적인 전력일 터. 단순한 계산으로 제네스를 믿는 게 맞았다.
“모르겠다. 연기라 했으니 연기겠지.”
리포드는 마음을 진정하며 눈매를 좁혔다. 트레왈로의 정예들이 일으킨 눈발이 구름처럼 하얗게 일고 있었다. 마치 거센 물살이 웅덩이로 고이듯 그들은 일순, 한 점에서 부딪쳤다.
무장한 기사들로 뒤덮여 있던 설원의 중심에서 다시금 새하얀 섬광이 피어났다.
동시에 사방으로 내달리는 거대한 참격.
그것이 인간의 물살을 단숨에 거슬러 오른다.
콰르르릉-!
참격의 울음이 귓가에 닿으며 아스라이 흩어졌다.
……연기, 맞았네.
* * *
예상대로 적들은 내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마자 물밀듯 밀어닥쳤다.
지금이라면 승부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창을 쥔 창기사들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대를 짓누르는 박력이 어깨 위로 내린다.
그것을 가만히 느끼고 있던 나는, 그들의 결의에 찬 얼굴이 선명히 담길 때, 내력을 일으켰다.
솨아아아-!
칼끝에서 인 청백색의 강기가 휘황하게 타오른다.
지독한 한기가 일대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호흡을 따라 흩어지는 뿌연 입김.
“뒈져라!”
이제 적들이 코앞이었다.
기다란 창이 간격을 지우며 찔러 올 때, 나는 검을 그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5장 만월참(滿月斬).
가득 차오른 만월마저 베어 낼 참격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앞을 막아서는 것들을 그대로 가르며 전진하는 거대한 참격.
마치 상어의 지느러미가 해수면 위로 솟듯이, 머리 위까지 솟은 검기가 인간의 물결을 가로질렀다.
콰과과과과광!
적의 전열을 단숨에 휩쓸어버린다.
“물고 늘어져라! 놈은 지쳤다!”
검격에 닿지 않은 이들이 소리쳤다.
어차피 이들에게 물러설 길은 없었다.
칼날이 다시금 흐릿하게 이지러졌다.
세로로 그어졌던 참격이 가로로 누웠다.
파바바바밧!
옆으로 누운, 초승달을 닮은 비검기가 허공을 내달렸다. 그 궤도에 놓인 적의 머리통이 핏물을 달고 우수수 솟아올랐다.
사위를 헤집는 압도적인 검력.
그것이 주변에서 들이치던 물결을 도리어 집어삼키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꽃잎처럼 흩날린 검기가 사나운 눈보라가 되어 일대를 휩쓴다.
세찬 얼음 폭풍이 단숨에 붉은 피 구름을 동반했다.
살아남은 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 갔다.
하얀 입김을 뿜어내는 그들의 표정 위로 공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내 모습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듯했다.
하나, 이미 늦었다.
새하얀 섬광은 그들을 손쉽게 갈랐다.
하얀 서리가 내렸던 평원이 붉게 물들어 갔다.
“이 개같은 새끼가!”
울분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서리가 낀 수염을 휘날리는 자.
그의 창이 하늘을 가리며 떨어져 내린다.
나는 몸을 틀어 그것을 가볍게 피해 냈다.
콰아아앙!
수직으로 떨어진 묵직한 창격에 설원이 기다랗게 깨져 나갔다.
“감히 네놈이!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 줄 알고!”
이자가 가주, 츠르센 트레왈로.
그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성이 반쯤 날아간 듯했다.
트레왈로의 정예를 품은 전력이 순식간에 반이 날아갔다. 그와 그의 가문이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 뒤집힐 수밖에.
“변절한 가문에 남은 명예가 있던가.”
“닥쳐라!”
그의 창이 푸른 뱀처럼 미끄러져 온다.
동시에 수를 급격히 불리는 창영.
수백 마리의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쏘아지는 듯했다.
이것이 트레왈로가의 창술인가.
꽤 훌륭했다.
하나, 가슴속에도 그 격에 맞는 창을 세웠어야지.
신념을 품지 못한 자는 결코 벽을 넘지 못한다.
그것이 그릇된 신념일지언정,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칼날을 가슴에 새겨 넣은 자만이 벽을 넘어 마스터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고절한 창술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마음에 세운 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검을 그었다.
수평으로 반듯이 그었다.
솨아아아-!
의지가 이는 순간, 검은 흐르고 있었다.
심상에 세워진 칼날이 손에 쥔 칼날 위로 얹어지듯 하나가 된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의지와 기와 몸이 완전한 하나가 되어, 칼날 위로 흘렀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며 덮쳐 오던 푸른 뱀을, 단 하나의 선으로 갈라 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1장 천단일선(天斷一線).
부와아아악-!
수백 마리의 뱀이 그 일격에 찢기며 바람처럼 흩어진다.
그리고 그 궤적 위에서 붉은 핏물이 뿜어졌다.
변절자의 머리통이 허공을 자유로이 노닐다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끄아아-!”
가주를 잃은 이들이 분노를 쥐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나는 그런 이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그었다.
공표한 그대로.
트레왈로가는 오늘, 멸문한다.
* * *
울창한 산골짜기의 경사를 타고 위태롭게 지어진 가택들.
개중 가장 외곽에 동떨어진 허름한 집에서 루시안과 일행들이 머물고 있었다.
네더만은 입을 삐쭉거리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이놈들은 단체로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로 작당이라도 했다던가. 어느 놈 하나 대화를 나누려는 놈이 없어.”
동부에서와 마찬가지로, 혁명의 칼에서 또한 푸대접을 받고 있는 일행이었다.
“햇볕이 좋지 않습니까.”
루시안이 씩 웃자, 네더만은 깍지 낀 손으로 목을 받치며 몸을 뒤로 뉘었다.
“왜 이번에도 막연하게 기다릴 텐가. 이번에는 좀 다른 거 같은데.”
리포드는 그래도 무어라 언질이라도 주어 대화할 의도가 보이기는 했다지만, 이것들은 자신들을 멀찍이 처박아 두고 깜깜무소식이다.
루시안은 읽던 책을 덮으며 그 의견에 동조했다.
“확실히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네요.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말도 못 붙여 보겠어요.”
네더만은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빛냈다.
루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3일 차.
이제야 저 여유로운 몸뚱이를 움직일 작정인 거다.
“그럼 한번 쳐들어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