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제148화 전쟁의 서막 (3)
백발을 깔끔히 넘긴 장년의 사내가 너른 복도를 걷고 있었다. 반듯이 깔린 카펫이 솜털처럼 부드럽게 밟힌다.
새하얀 외벽에는 화려한 문양들이 황금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 끝에서 블랙 드래곤이 양각된 웅대한 문을 마주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황실 기사단의 기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바르안 알센도르 경 들었습니다.”
바르안 알센도르.
크레본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영향력을 가진 자이자, 무한의 속검이란 이명을 가진 대륙 제일의 검.
구구구궁.
거인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문이 세로로 쪼개지며 점차 내부가 드러났다.
새빨간 카펫이 바닥에서 일곱 계단이나 높이 올라 있는 칠흑의 옥좌까지 기다랗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옥좌 위에 찬란한 금발의 사내가 앉아 있다.
그에게서는 손을 뻗으면 그게 무엇이든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권태로움이 묻어났다.
하나, 금빛 눈동자에 서린 한 줄기 빛은 세계를 꿰뚫을 듯 날카롭다.
붉은 수실로 치장된 검은색 일색의 정복을 입은 이 남자가 바로, 대륙의 정점인 제국의 황제, 아스라낙 윈 크레본.
작은 광장이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거대한 알현실이었지만, 그보다 한없이 작은 인간에게서 그 전체를 압도하는 존재감이 흘러나온다.
마치 황성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
그는 대륙의 하늘이었다.
바르안은 카펫의 중앙부까지 다가가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바르안 알센도르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편히 하시오. 우리 사이에.”
아스라낙의 말에 바르안은 자세를 바로 했다. 한 자루 검을 품은 듯한 금빛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오랜만이오, 바르안 경.”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나이가 드니 엉덩이가 무거워지는군요.”
바르안은 황제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평안했지. 짐의 곁에 대륙 제일검인 자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 그나저나 경의 기도는 갈수록 날카로워지는군.”
나이가 들었다고 엄살을 부렸음에도 황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바르안은 가볍게 묵례하며 칭찬을 받았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고충이 생겼다오.”
황제가 곧장 본론을 꺼내자, 바르안은 완곡히 거절을 표했다.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를 거느리고 계십니다. 작은 고민은 아랫것들에게 맡기시지요.”
황제를 제외하고는 바르안을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제국에 없었다. 그러니 황제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그 또한 직접 움직일 일이 없다.
“그렇지. 짐이 모든 문제에 관여할 수는 없지. 경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개운해지는군.”
바르안은 살며시 하얀 눈썹을 떨었다. 자신의 의도를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황제는 모르는 척 말을 잇고 있었다.
“해서, 경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자 이리 어려운 걸음을 하게 만들었소.”
아무래도 이번에는 황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을 듯했다. 그만큼 그는 단호했다.
“레트로이나가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게요.”
“예. 오는 중에 들었습니다.”
현재 제국이 들끓고 있었다. 레트로이나 6검이 패했다니. 그 이름을 받은 이들이 하나의 전장에서 멸절한 것은 지금껏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바르안 또한 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많은 병력을 일으키자니 자존심이 상할 테고, 또 한 명의 소드 마스터인 휴레인 바스티스는 레트로이나 6검의 전력과 비등할 터였다.
그러니 이렇게 자신을 부른 것이겠지.
“해서 경의 도움이 필요하오. 경이 그의 목을 베어 주어야겠소.”
“폐하의 명이고 제국을 위한 일입니다.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북부의 안위가 걸리는군요.”
알센도르가의 기사단은 현재 황제가 벌인 전장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제국의 군대가 승승장구하고 있다고는 하나, 전장의 반경이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크게 패하는 날에는 정세가 크게 휘청일 수 있었다.
때문에 제국의 내부에서도 무리한 전장 확장에 우려를 가진 자들이 많았고.
바르안도 개중 하나였다.
그는 제국의 무리한 전쟁으로부터 가문의 병력을 불러들이고 싶었다.
이것은 황제에게 건네는 제안이었다.
자신이 북부를 벗어나 프렌치아로 갈 터이니, 가문의 병력을 가문에 돌려 달라는.
“암, 그래야지. 기사단은 가문으로 보내도록 하겠네.”
황제는 바르안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애초부터 내줄 용의가 있었다는 의미. 서로의 목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황제도 바르안도 서로가 원하는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니. 내가 고맙지.”
서로 원하는 바를 얻은 이들은 가벼운 안부를 나누다가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쉬지 않고.”
“먼 여정입니다. 가는 중에 쉬어도 됩니다.”
“그럼 부탁하겠소.”
“예. 그럼 평안하십시오.”
바르안이 걸음을 물렸다.
아스라낙은 그가 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해가 저물어 가며 세상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버텨.”
리포드가 굳게 닫힌 성문을 보며 투덜거렸다. 네더만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아마 흰 사자가 부상 중일 거라 여겼겠지.”
나를 포함한 네더만, 리포드, 드라칸은 피노센시의 성문을 저 멀리 두고 서 있었다.
현재, 피노센에 주둔하고 있는 검은 오소리 부대의 병력은 대략 3,000에 이른다고 추정되고 있었다.
남동부 전장의 보급로를 담당하는 중간 거점임에도 그리 많은 병력이 상주하고 있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제국군은 남동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기도 했고, 이미 점령한 프렌치아 도시에 많은 병력이 상주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나 그럼에도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프렌치아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피노센을 비우라 공표했음에도 그랬다.
수성하며 버티겠다는 이야기.
최대한 독립군에게 피해를 주고자 선택한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피해를 입히고 싶어도 피해를 입힐 수 없을 거다.
닫힌 성문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고작 넷이었으니.
우리의 전력은 이것이 다였다.
물론 이것으로도 차고 넘쳤지만.
“성문을 뚫겠다.”
쿵!
걸음을 박차자 성문이 빠르게 다가왔다. 머리 위로 화살비가 떨어졌으나, 그것은 허공만을 가르며 의미 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쉬아아악-!
손아귀에서 나선으로 휘감기는 내력이 있었다.
마치 세상이 감겨 오는 듯한 감각.
소용돌이치며 응축된 장력이 뻗어진다.
천령신공 기예편.
제2장 나선회류파(螺線回流波).
콰아아아앙!
응축된 환과 마주 닿은 성문이 단번에 터져 나가며 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네더만을 비롯한 일행이 내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흰 사자다!”
“마, 막앗!”
흰 사자 가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적들의 얼굴은 패색으로 짙게 물들었다.
그들에게 나는 하나의 가문을 홀로 무너뜨리는 자.
피노센의 전력은 바레인과 트레왈로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적들이 전의를 잃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태반이 제대로 싸울 생각도 않고 등을 돌렸다.
지휘관부터 도망치는 상황에 병사들이 목숨을 걸 리가 만무했다.
“뭐야, 시시하게. 이럴 거면 왜 남았담.”
리포드가 툴툴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네더만과 드라칸 또한 내 뒤를 따랐다.
굳이 적을 쫓아 죽이지 않았다. 개미 떼처럼 흩어지는 이들을 하나하나 죽이다 보면 심력만 낭비될 뿐이니.
적들은 그렇게 후퇴만을 반복했다.
시시한 전장이었으나, 그에 따른 결과는 시시하지만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루시안을 비롯해, 혁명의 칼과 동부에서 출발했던 작렬하는 태양의 병력이 적의 병력이 빠져나간 피노센에 속속들이 도착했다.
아군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얻은 프렌치아 임시정부의 첫 번째 국토였다.
“우와아아아!”
시민들은 길가에 나와 환호를 질렀다.
프렌치아의 깃발을 내건 행렬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은 몇백에 이르는 적은 병력이었으나, 계속해서 추가적인 병력들이 집결할 터였다.
독립군에 지원할 이들 또한 함께 모집하고 있었으니, 적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최소 4천에 이르는 병력이 집결할 거라는 예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피노센시 정점에 프렌치아의 깃발이 걸렸다.
잠깐 걸렸던 총독부 때와 달리, 앞으로도 계속해서 펄럭일 국기였다.
“이게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내 뺨을 한번 꼬집어 봐 주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봐요.”
거리에 나와 있던 시민들은 프렌치아의 국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선명히 펄럭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다. 임시정부가 피노센을 수복하겠다 공표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사람들은 프렌치아 만세를 외치며 해방감을 누렸다.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으나, 그들에게는 독립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였다.
그와 반대로 지금의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결국 제국군이 피노센으로 밀어닥칠 것인데, 그들의 횡포가 두려운 까닭이다.
만약 독립군들이 성을 지켜 내지 못한다면 프렌치아 임시정부에 조력한 자들을 색출하여 모두 죽이겠지.
지금 프렌치아 임시정부가 숙청 작업을 진행하는 것처럼.
루시안은 시청에 남은 행정 자료와 시민들의 제보를 통해 제국에 빌붙어 시민들의 고혈을 빨았던 이들의 목을 쳤고, 그들이 부당하게 취한 재산을 몰수하여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통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길거리에 나와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으며 그간의 울분을 풀었다.
아직 제국군이 쳐들어올 것에 대한 불안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으나, 프렌치아가 하나의 도시를 완전히 수복한 건.
크레본과의 강제 합병으로 총독부 체제에 들어간 지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기다란 협곡을 빠져나가는 병력이 있었다.
뱀처럼 굽이치는 협곡의 옆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기다랗게 이어졌다. 폭은 끝이 아득히 보일 정도로 넓었지만, 앞뒤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닫힌 지형이었다. 그런 이들의 뒤를 쫓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성을 완전히 수복한 이후.
나는 네더만과 리포드, 드라칸을 데리고 이들을 쫓았다.
우리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병력이 하나로 뭉쳐 퇴각하고 있었다.
이대로 후퇴한다면 다른 병력과 합세하여 돌아올 이들.
굳이 보낼 이유가 없었다.
“흰 사자가 없다! 죽여!”
나는 일부러 가면을 쓰지 않았다.
적들은 흰 사자가 없다는 것만으로 금세 기세가 등등해졌다. 고작 넷이서만 온 이유가 강한 무력 때문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랬다.
흰 사자의 존재가 제국군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저것들은 이제 우리는 보이지도 않나 보군.”
네더만이 입을 빼쭉거리며 말했다.
적들은 도망치지 않고 우리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폭발하는 섬광이 찰나에 적의 전열을 휩쓸었다.
물결치듯 흐르는 검세에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병력의 머릿수는 우리의 전력 앞에 의미가 없었다.
“으악!”
협곡에 적들의 비명이 가득 차오른다.
나는 그들의 전열을 가로질렀다.
칼날이 미처 닿지 않은 이들은 운 좋게 달아났다.
물경 3,000에 가까운 병력.
모두를 죽일 수는 없었다.
하나, 적들에게 똑똑히 경고는 되겠지.
훗날 ‘두 개의 협곡’이라 불리게 될 전쟁의 서막이 지금 막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