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제150화 오르엔 대교 (2)
강 중앙부에서 반으로 뚝 끊어진 대교가 보인다. 휑하니 사라진 나머지 다리는 성벽 옆에 붙어 길게 세워져 있었다.
8만에 이르는 군을 통솔하고 있는 군단장, 페치말로는 높은 구릉에 올라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콧방귀를 끼며 입매를 비틀었다.
반으로 끊겨 있는 다리 때문은 아니었다.
도개교야 다시 내리면 그만이고, 강이야 어떻게든 건너면 그만인데.
여전히 강의 중앙까지 뻗은 반쪽짜리 대교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점처럼 작게 보였지만, 햇볕에 반사되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있었다.
검이었다.
“제 무력만 믿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페치말로의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8만에 이르는 병력을 앞에 두고 홀로 서 있다니.
흰 사자의 자신만만함이 페치말로의 자존심을 뭉개고 있었다.
지금껏 남동부에서 아리아나 왕국과 전쟁을 치러 온 페치말로지만, 흰 사자의 명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최근 제국의 자존심, 레트로이나 6검을 꺾었다는 것도 알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혼자 8만의 병력을 막겠다고 서 있는 건 제국의 군대를 개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수많은 교본에서 소드 마스터가 하나의 군단과 같다고 비유하나, 그것은 전장에 끼치는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지 하나의 군단과 정면으로 대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소드 마스터도 역사에 존재한 적 없었고.
“본때를 보여 줘야겠군.”
페치말로는 저 멀리 서 있는 흰 사자를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 바라보았다. 당장에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 심경을 읽은 부관이 입을 열었다.
“어찌할까요?”
“우선 강을 건널 배를 제조하거라. 조악해도 좋다. 오늘 밤에 건널 것이다.”
아직은 이른 아침. 재료로 쓸 나무들은 근방에 널려 있었다. 일단은 최대한 많은 병력을 강 건너로 보낼 작정이었다.
흰 사자 혼자서 모든 병력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
천천히 강 건너에 병력을 쌓아서 스도스성을 수복한 뒤 도개교를 내릴 작정이다.
흰 사자의 무력은 매섭지만, 일정 병력으로 잡아 둔 뒤 동시에 여러 방면을 공략한다면 혼자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하나의 소드 마스터와 하나의 군단이 무엇이 다른지 톡톡히 알려 주마.’
가만히 서 있던 흰 사자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음?’
그는 페치말로의 다짐을 전해 듣기라도 한 것처럼 대오를 이루고 있는 제국군을 향해 망설임 없이 쭉쭉 뻗어 갔다.
마치 하나의 소드 마스터가 하나의 군단과 무엇이 다른지 알려 주겠다는 것처럼.
“네놈이 죽여 달라 용을 쓰는구나.”
페치말로의 눈썹이 뱀처럼 구불거렸다.
혼자 몸으로 군영을 향해 달려들다니.
잠깐의 소란이야 일으킬 수 있겠지만, 앞으로 있을 전장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아껴야 할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저리 날뛰니.
목을 베어 달라 소리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래, 한번 날뛰어 봐라.”
페치말로는 흰 사자의 실력을 가늠하겠다는 듯 오만한 눈으로 전황을 내려다보았다.
병사들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길을 열자, 그 사이로 기다란 먼지구름이 인다.
기마병들이 녀석을 향해 마주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부관이 말했다.
“포렌 소령이 나선 듯합니다.”
페치말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활약에 대해서는 종종 들어 왔다. 최근 공적을 탑처럼 쌓아 올리는 자였다.
그의 가슴팍에 훈장을 걸어 주었던 일을 페치말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흰 사자의 걸음을 저지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공을 세우려는 듯했다.
포렌 소령은 기억하기로 익스퍼트 최상급을 바라보는 자였다. 그 휘하의 기사들도 상당한 실력의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흰 사자의 전력이 무시무시하더라도 맹렬히 전진하는 기마대와 정면으로 맞서지는 않을 터였다.
하나, 흰 사자는 걸음을 틀지 않고 똑바로 달려왔다.
일순, 점처럼 보이던 흰 사자에게서 휘황한 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푸른 섬광이 폭발하듯 앞으로 뻗으며 기마대를 정면으로 뚫고 지나간다.
마치 기다란 막대가 평야에 자라난 듯했다.
그 주위로 붉은 구름이 일었다.
섬광이 흩어진 자리, 기마대의 중앙부가 기다랗게 뚫려 있었다.
지휘관과 동료들을 일시에 잃은 그들의 당혹스러움이 구릉 위에서도 잘 느껴졌다.
“…….”
페치말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소드 마스터의 검격을 직접 본 것은 그 또한 처음이었다. 충격적인 상황에 머리가 띵 울렸다. 전장을 이리저리 굴렀음에도 그랬다. 소드 마스터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음에도 그랬다.
그저 한 번의 찌르기로 이만한 광경을 만들다니.
페치말로 또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자였다.
그랬기에 그 검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살갗으로 와닿았다.
‘과연 무지막지하기는 하군.’
땀구멍이 따끔거릴 정도로 당혹스럽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소드 마스터의 검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감상으로 끝날 일이었다.
* * *
솨아아.
늦은 밤.
적막한 물가를 가르며 희미한 소음이 일었다.
첨벙, 첨벙.
그리고 이내 강의 수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통나무를 엮어 만든 조악한 배가 천천히 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유속이 빠른 강을 건너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단련된 기사들이었다.
허술한 배로도 충분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조류가 세고 폭이 넓어 강을 건너기 어렵지만, 한꺼번에 이동한다면 흰 사자가 막을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어둠을 가르는 기다란 불길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콰과과광!
채찍처럼 휘어지며 화살처럼 기다랗게 쏘아진 불꽃에 조악한 통통배가 그대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폭발음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타오른 불꽃에, 어둠에 잠긴 주변이 눈을 깜박이듯 풍광을 드러냈다가 숨기기를 반복했다.
휘릭.
일대가 번쩍일 때마다 그 빛줄기를 가르는 신형이 있었다.
“적이다!”
“흰 사자다!”
병사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하나, 적이 누군지 알았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콰과과과광!
불길이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내리듯 상류에서부터 밀어닥치고 있었다. 강물이 불꽃을 등에 얹고 흐르는 듯했다.
“으악-!”
병사들은 그 불길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강물로 뛰어내렸다. 찬물이 갑옷 사이로 스며들어 몸을 적셨지만, 병사들은 그 물이 찬지도 모르고 그저 뭍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밤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꺼먼 물길이 공포심을 증폭시켰다.
다들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그저 살고자 하는 본능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흰 사자는 그런 이들의 머리통을 징검다리인 양 밟으며 검기를 뿌렸다.
하류로 한차례 쓸고 내려갔던 불길이 다시금 상류로 거슬러 오른다.
“끄아악-!”
공포를 품은 비명이 곳곳에서 울었다. 부서진 통통배의 잔해와 죽은 시체들이 산 자를 끌고 하류로 떠밀려 갔다.
배의 태반이 강의 반도 건너지 못하고 침몰되었다. 널따랗게 포진했음에도 그랬다.
어느 순간, 불꽃이 사그라들고 푸른 섬광이 작살처럼 병사들의 등을 꿰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냥이었다.
선발대를 따르려던 제국군은 감히 배를 강물에 띄우지 못했다. 상류에서부터 쓸려 온 잔해와 시체들로 배를 띄울 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저게 정녕 같은 인간인가?”
페치말로 또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흰 사자는 수면 위를 백조처럼 날아다니며 병사들의 목숨을 손쉽게 취했다. 강물 위를 새처럼 날아다니는 그를 피해 뭍에 도달할 방도는 없어 보였다.
낮에 그만큼의 전력을 보였음에도 흰 사자는 여전히 끝없는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흰 사자의 신위는 하늘에 닿아 있었다.
홀로 전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마치 뒤에 세워진 스도스성을 하나의 몸으로 가릴 수 있을 듯했다.
그를 지나쳐 스도스성에 갈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손쉽게 느껴졌던 일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눈앞에 모든 전장의 수치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병력도 계책도 그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할 듯했다.
“후퇴하라!”
페치말로의 고성이 뭍을 쩌렁쩌렁 울렸다.
“후퇴하라!”
“모두 후퇴하라!”
그의 말을 따라 후퇴하라는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전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 전장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심경뿐이었다.
다행히 흰 사자는 후퇴하는 병력을 쫓지 않았다.
오전에 보인 신위를 생각했을 때, 그랬다면 추가적인 피해가 상당했을 터였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작태가 우습게 느껴졌다.
고작 한 명 때문에 회군하다니.
앞으로 보름 안에는 피노센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야 서부에서 온 병력과 시간을 맞출 수 있으리라.
이미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아무리 흰 사자라고 해도 체력이 무한정이지는 않을 터. 한 번에 총공세를 취하기로 그는 단단히 각오를 다잡았다.
‘내일, 이 강을 건널 것이다.’
한편, 고충을 겪고 있는 건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후발대가 왜 이렇게 늦어지느냐.”
“적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또!”
“예. 적들이 군수품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쥐새끼들 같으니라고.”
알롱드가 이를 악물었다.
피노센으로 진격하는 길.
적들의 매복이 파리떼처럼 귀찮게 달라붙고 있었다. 경계를 강화하고 있으나, 적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
보고를 들어 보면 용 사냥꾼과 검은 유성에 인간 성벽까지 나선 듯했다.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이들만 셋.
군수품을 지키는 일반 병사들만으로는 막아 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적이 군수품을 노리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피해가 없지는 않지만, 프렌치아는 총독부 권역 내였다.
어디서든 군수품을 조달할 능력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군수품만을 끈질기게 노리며 자신들을 귀찮게 괴롭히고 있었다.
“경계를 더욱 강화하고, 그것도 안 된다 싶으면 기사들에게 군수품을 경계하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가장 앞서 정찰을 나갔던 정찰병이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건 그때였다.
“들라 하라.”
알롱드의 하명에 병사 하나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거수경례 후 곧장 상황을 보고했다.
“적들이 협곡 사이에 토성을 쌓고 있다고 합니다.”
“토성을?”
“예. 그리 단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협곡에 저지선을 만들 작정인 듯합니다.”
“쓸데없는 짓들을 하는구나.”
알롱드의 볼이 푸르르 떨렸다.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버릇처럼 나오는 표정이었다. 성에 틀어박혀 공성전을 할 거란 예상과 달리, 적의 방어가 생각보다 적극적이었다.
후방을 교란하며 발목을 잡고, 협곡까지 나와 자신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성전을 벌이기 전부터 힘을 빼놓겠다는 수작이겠지.
알롱드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토성 따위, 어차피 뚫으면 그만이다.”
급히 쌓은 토성으로 자신들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수작이겠지.
총독부의 지원군이 후방에서도 밀어닥치고 있을 테니, 발등에 불이 붙었을 터였다.
“흰 사자에 관한 소식은 있더냐.”
“근래에 그를 본 자는 없는 듯합니다.”
역시.
아마 흰 사자는 예상대로 부상을 입은 듯했다.
그가 스도스성에서 남동부에서 올라오는 군단을 막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이들이었다.
알롱드는 적들이 쌓는 토성이, 흰 사자가 부상에서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한 움직임이라 여겼다.
멋대로 결론을 낸 그의 입가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우매한 프렌치 놈들. 한번 마음껏 발악해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