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제173화 공식 선포
나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탑들이 늘어선 도시.
아르에리아.
도시국가이자, 아르아나 교단이 이끄는 신성왕국.
아르에리아는 하나의 거대한 교단으로서 대륙에 유일한 중립 국가였다.
대륙의 모든 국가가 아르아나교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대륙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당했다.
과거, 테이난가에서 소동이 있었던 네스테르 신전 또한 아르아나의 교파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나, 혹은 다른 이유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내 목적지는 이 너머에 있었으니.
“출입패를 확인하겠습니다.”
나는 마부에게 검과 방패가 그려진 은패를 보여 주었다. A급 용병이라는 의미였다. 이곳에서 용병패는 신분증이나 다름이 없었다.
“예, 오르시지요. 출발은 30분 후에 할 예정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형 마차에 올랐다. 지붕도 없는 허름한 마차였다. 보통의 마차와 달리 측면이 아닌 후방에 입구가 있었다.
거대한 수레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했다.
내부에 오르니 양 측면에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 면에 열 명은 앉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넓었다.
‘시커먼 놈들이군.’
마차에는 용병 몇이 이미 올라 있었다.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의 소유자들. 관상을 보고 용병을 뽑았나 싶을 지경이다. 덩치 또한 산만 해서 넓은 공간이 벌써 가득 차 보였다.
나는 입구에 가깝게 가장 끄트머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들썩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차는 어느새 가득 차 있었고, 어깨가 맞닿을 만큼 비좁았다.
불편했지만, 잠시간은 참아야 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탄 것 외에도 마차는 많았다.
하얀 눈이 흩뿌려진 평원에, 오가는 마차 행렬이 줄지어 이어졌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무한의 속검이 패배했다더군.”
용병들의 시답잖은 대화 사이로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무슨, 말도 안 돼. 무한의 속검이 대체 누구한데 패한단 말인가.”
“흰 사자에게 패했다던데.”
“흰 사자?”
“자네는 흰 사자에 대한 소문도 못 들어 봤나? 이번에 프렌치아에서 나온 소드 마스터일세.”
“아아, 들어 본 거 같군. 패망한 왕국에서 소드 마스터가 나왔다지 아마. 그런데 그가 무한의 속검을 이겼다고?”
“그렇대도. 지금 독립군이 수도로 진격하고 있다더군. 아마 지금쯤이면 결판이 나지 않았겠나.”
“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대륙 제일검이 패할 줄이야.”
“독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거나 무한의 속검이 죽은 건 사실일세.”
“제국이 가만히 있지 않겠구만. 곧 전쟁이 벌어지겠어. 한 탕 하러 가야겠는데?”
“오래가겠나. 전면전으로 가면 금방이지.”
“하긴. 요새 제국 쪽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흉흉하다고. 제국에 반하는 쪽에는 서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야. 기사들이 마법을 부린다는 헛소문도 돌고 있다던데.”
무한의 속검, 바르안 알센도르는 대륙의 정점에 있던 거물.
그의 죽음이 이 멀리 북부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프렌치아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뭐, 잘 하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저편을 바라보았다.
점차 멀어지는 아르에리아가 담겼다.
하나 내 시선은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득히 먼 남쪽.
그곳에 프렌치아가 있을 터였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갔다. 사람들은 각기 자리를 잡고 안내자가 끓여 준 스튜를 먹었다.
맛은 한참이나 부족했다.
잔소리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정도였지만, 참았다.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빨랐다.
“어이.”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차에 한 녀석이 거슬리는 태도로 말을 걸어 왔다.
“애송이가 검은 숲에는 무슨 일로 가나? 외로운 용병 누나들의 노리개라도 하려고?”
털이 수북한 거구의 사내였다. 그는 호탕한 척 웃으며 농담을 따먹었다. 검은 숲으로 가는 이들 대부분은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거친 자들이었다.
심심하니 만만해 보이는 내게 시비를 거는 것이겠지.
서걱.
나는 검으로 답했다.
녀석의 턱 밑으로 난 수염이 반듯이 잘려 툭 떨어졌다.
“다음에는 목을 베어 주마.”
휑한 수염을 더듬은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물러났다.
다들 휘둥그레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내게 말을 거는 자들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마차는 황폐한 평원을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산자락처럼 기다랗게 늘어선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그네트의 성벽만큼이나 높다란 벽이 수평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대륙과 검은 숲을 가르는 장벽.
사람들은 이 벽을 ‘최초의 벽’이라 불렀다.
* * *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레이크의 말에, 루시안은 뒤로 돌았다. 그는 예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가자.”
그의 걸음이 떼어지기 시작한다.
총독저를 넘어 내성을 지나 도시의 중심으로 향하는 행렬이 있었다.
“와아아-!”
“프렌치아 독립 만세-!”
시민들은 프렌치아를 국기를 들고 길가에 늘어서서 일제히 환호하고 있었다.
나란히 도열하여 걷는 기사들 머리 위로 꽃가루가 휘날렸다.
루시안이 탄 마차를 호위하는 행렬이었다.
모두 루시안에게 뜨거운 함성을 보내고 있었다.
참혹했던 전장이 끝난 지 일주일.
수도는 조금이나마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갈 길은 멀었고, 할 일은 태산이었으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루시안은 그것을 위해 테나스타 광장에 왔다.
시계탑 앞으로는 높은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루시안은 그 단상 위로 올랐다.
그리고 너른 광장을 빼곡하게 메운 국민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의 국민이 될 자들.
커다란 환호가 잦아들며 루시안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루시안의 앞으로는 확성기 아티팩트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음성 출력기가 수도 곳곳에 놓여 있었다.
루시안의 목소리는 광장을 넘어 마그네트에 널리 퍼질 터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동안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프렌치아를 되찾기 위해 싸워 왔고, 지금 막 첫발을 떼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그저 수도를 수복했을 뿐이었다.
국토에는 여전히 제국군이 남아 있었고, 그들을 모조리 몰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제국과의 전면전도 피할 수 없었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아득히 높고, 가는 길은 가시밭과 다름이 없습니다.”
지난한 길이 될 터였다.
피로 얼룩진 고행의 길이 될 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출발선에 서기 위해 10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언제 도착할지, 혹 도달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깜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고작, 시작이었다.
하나 그 시작을 위해 10년이 걸렸고,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프렌치아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시안은 씩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프렌치아 임시정부의 수장, 루시안 세리어스라고 합니다.”
루시안의 정체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리어스라니. 세리어스 공작가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예. 그 세리어스 공작가의 장남이었지요.”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해 갔다.
“제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흰 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독립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지난 10년간 많은 이가 죽었습니다. 제국에 부모를, 형제를, 자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겁니다.”
싸늘한 정적이 일었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또 누군가를 잃어 본 자들이었다.
“이 나라 프렌치아를 위해서.”
그런 이들에게 루시안은 다시금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앞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테지만 저는 그들에게, 여러분들에게 감히 이 나라를 위해 죽어 달라고 부탁할 생각입니다.”
전쟁은 참혹하다.
“그 죽음 위에 세워질 새로운 나라를 위해서.”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 나라에서 자라게 될 새로운 아이들을 위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짓밟히지 않기 위해.
나라를, 고향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습니다. 제국은 우리를 프렌치아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모멸하고 멸시해 왔습니다.”
“공정과 정의는 사라졌고, 울분과 고통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나라의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무너지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으나, 이제 프렌치아 국민들은 모두 알았다.
나라를 잃는다는 게 무엇인지.
“저는 과거, 왕세자였던 제네스 쿤 프렌치아와 함께 이 나라를 이끌 꿈을 꾸었습니다.”
“그와 함께 꾸려 갈 나라를 꿈꾸며 자랐습니다.”
“지금 그는 비록 세상에 없지만, 저는 그 뜻을 이어받아 이 나라를 이끌고자 합니다.”
“저 루시안 세리어스는 앞으로 루시안 세어 프렌치아가 될 것이며, 프렌치아의 뜻을 이어받아 새로운 왕가를, 새로운 프렌치아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왕이 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프렌치아의 국새가 그 정통성을 증명할 것이며, 임시정부 이전부터 독립 활동을 지속했던-.”
“북부의 흰사자, 굽이치는 해협, 작렬하는 태양, 혁명의 칼의 지도부가 지금처럼 함께 정부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루시안의 눈빛은 굳건했다.
“그 누구도 새로이 들어설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를 프렌치아 임시정부라 칭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프렌치아 왕국의 지도부이며, 새로운 왕가이자 새로운 정부입니다.”
시계탑 앞에 높게 세워진 단상.
프렌치아의 마지막 왕이 처형됐던 자리에서 새로운 왕이 태어나고 있었다.
“프렌치아 왕국은 현 시간부로 제국과의 합병을 전면 거부하고, 하나의 자주국임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싸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워 왔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루시안의 목소리가 뜨거웠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워 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루시안의 연설에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 안에는 눈물이 담겨 있었다. 그 함성에 담긴 함의는 깊었다.
프렌치아 국기가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발렌시아력 549년 1O월 18일.
프렌치아 정부는 강제 합병된 지 10년 만에 프렌치아가 자주국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