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제193화 세계의 그림자 (1)
자욱한 안개를 지나 도착한 이모텔섬.
섬을 정상적으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이 섬을 찾으니 기분이 좀 색다르다.
여기까지 오는 길도 그랬다.
회귀를 하게 된다면 이와 같을까?
비슷하지만 다른.
간혹 기시감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배를 해안가에 접안했다.
섬은 별다를 것 없이 푸르렀다.
나는 숲을 가로질러 어렵지 않게 불멸의 도시에 다다랐다. 높이 쌓인 제단이 도시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었다.
“어? 누구세요?”
“응? 뭐야?”
“누구지?”
나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움파움파족의 주민들.
나는 별 대꾸 없이 족장의 거처를 찾아갔다. 어차피 까먹을 거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프지.
“응? 누구시오?”
족장의 시중을 들던 부족원이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족장을 만나러 왔다.”
나는 나침반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나침반은 움파움파족의 귀중한 손님이라는 징표.
다행히 그것을 한눈에 알아본 부족원은 화들짝 몸을 떨더니 곧장 족장의 거처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밖으로 나온 그가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이리로 오시지요.”
족장은 언제나처럼 근엄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 관한 설명은 들어본 적 없다는 순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분은 누구신가?”
나는 별말 없이 나침반을 꺼내 보여 주었다. 백 마디 말보다 이것이 내 존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어엇! 외부인이 그것을 어떻게? 내가 준 적이 있던가?”
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설명했다.
족장은 회귀와 세계선에 관한 개념을 이미 알고 있어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허어…… 그런 일이. 그렇다면 지금 이 세계가 최초의 세계선이란 말이겠구만.”
“네. 저는 황제의 회귀를 막기 위해 왔습니다.”
“알겠네! 회귀의 권능이 개인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지! 우리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네!”
황제가 회귀의 권능을 얻는 걸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가 회귀의 권능을 얻지 못하게 하면 된다.
세계선은 하나의 나무와 같다.
최초의 세계선은 줄기고, 회귀를 통해 분화되는 세계들은 무수한 가지.
결국 회귀란 나무줄기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회귀의 권능을 얻지 못한다면 황제는 더 이상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을 터였다.
“이 섬에 저 말고 다른 누군가가 와 있습니까?”
“아닐세. 외부인이 온 건 정말 오랜만이라.”
“잘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를 믿지 못해 한 번 더 물었다.
족장은 고심하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90일의 기한 중 10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10일 뒤에 황제는 회귀의 권능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 능력을 줄 수 있는 건 눈앞의 족장뿐.
“회귀의 권능은 어떤 경우에 주는 겁니까?”
이미 본 세계의 족장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눈앞에 족장의 의견은 다를 수도 있었다.
그는 결국 황제에게 그 권능을 건네주는 장본인이니까.
하나, 그의 의견 또한 본세계의 족장과 다르지 않았다.
“회귀의 권능은 인류의 존망을 앞둔 경우에나 허락한다네. 세계의 멸망이 다가오지 않는 이상 그 권능을 줄 수는 없지. 대체 열흘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내가 그에게 회귀의 권능을 주게 되는 건지…….”
지금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었다.
“그럼 족장님 없이 회귀의 권능을 얻을 방법이 있습니까?”
“불가능하네! 회귀의 권능을 부여할 수 있는 건 오직 신의 축복을 받은 움파움파족만 가능하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축복을 받은 족장만이 대대로 그 힘을 전승해 왔네! 이 몸 없이는 절대 얻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단호한 강변이었다.
다른 방법을 까먹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황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족장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열흘.
그 끝에서 황제는 회귀의 능력을 얻게 된다.
아직은 가늠할 수 없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
일단 제단을 지키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제단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단 하나.
또한 제단은 마을의 중심에 세워져 있기에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쉬이 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 준다면야 우리야 고맙지!”
족장은 내 손을 양손으로 포개어 잡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거기는 왜 막고 있겠다는 겐가?”
그의 물음을 깔끔히 무시하고 거처를 나선 나는, 제단의 입구 앞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황제가 회귀의 권능을 얻기 위해서는 이곳을 반드시 지나칠 수밖에 없다.
즉, 여기를 10일만 지키면 황제는 회귀의 권능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
나는 눈을 감고 무극천승심결을 운용했다.
나를 중심으로 퍼진 기의 파동이 은은하게 마을을 훑고 지나간다.
도시 전체의 소음을 따라 그 물결이 천천히 흔들렸다.
나는 그 일렁임으로 도시를 읽었다.
흐르는 물소리처럼,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평안하게 흩어질 만큼의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상의 소음이 튀는 순간을 잡아내기 위함이었다.
황제가 움파움파족과 조우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
나는 그 순간을 잡아내고자 했다.
언제 그가 이곳에 올지는 모르겠다만, 이 정도의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내게 조금만 집중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저 소음을 자장가 삼아 잠시 눈을 붙이고 있으면 된다.
그런데 도시의 흐트러짐은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왔다.
“@#%#%.”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마을 입구에서 소란이 잡혔다.
그 소음에 감각을 집중하자, 움파움파족의 목소리가 귓가에 담겼다.
“누구세요?”
“어? 외부인인가?”
“아까도 오지 않았어?”
“아까?”
단숨에 상황을 이해한 나는 눈을 뜨는 즉시 걸음을 박찼다.
도시의 풍경이 하나로 뭉그러져 쓸려 내려갔고, 나는 어느새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응? 아까 온 사람이잖아!”
“우리 친구래!”
“맞아, 맞아!”
부족원들이 나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나는 앞에 선 세 명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개중 한 사내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내륙 분이시오?”
녀석들은 모두 가벼운 흉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행색은 용병 같았지만, 기도가 정갈했다.
어렸을 적부터 체계적으로 검을 배운 이들.
궁에서 나온 이들이 분명했다.
“태풍을 만나 우연히 섬에 들어섰는데, 식량을 모두 잃어버렸지 뭐요. 그래서 높이 솟은 건물을 보고 오게 되었소. 그리 경계할 필요 없다는 말이오.”
그는 맨손을 들어 보였다.
확실히 위협을 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랬다면 이리 접근하기보다 기습을 했을 테니.
“좋군.”
그들의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
모습을 드러낸 한 사내가 손차양을 한 채 불멸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발과 금안을 가진 사내.
씨익 웃은 그가 천천히 걸어온다.
사내들은 그런 그를 위해 길을 비켰다.
입가에 걸린 작은 웃음부터 걸음걸이까지.
가벼운 평복을 입고 있음에도 귀족적인 태가 그것을 뚫고 뿜어져 나왔다.
마주한 이를 절로 고개 숙이게끔 할 만한 기도.
태생적으로 갖는 우월함과 예법을 몸에 새겨 넣은 자에게서 뿜어지는 자연스러운 품위가 있었다.
이자가 바로.
황제, 아스라낙 윈 크레본.
그의 이름을 듣지도 않고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열댓 명의 기사들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아스락이라고 합니다. 저희 때문에 많이 놀라신 듯합니다. 태풍으로 식량을 모두 잃어 이 숲에서 식량을 구할까 합니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테니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상당히 공손한 태도였다.
그 뒤에 숨은 의중은 파악할 수 없었다.
“우와! 밖에서 온 손님이 얼마 만이더라?”
“어서 족장님께 알려 드리자!”
“맞아! 연회를 열어야지!”
움파움파족은 폐쇄적인 부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부인을 반가워하며 요란법석을 떨고 있었다.
황제의 일행은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환영해 주셔서 다행이군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황제 옆에 있던 자가 나서서 말했다.
“사람이 먼저 소개를 했으면 답하는 게 도리 아니오.”
나는 지금 내적 갈등에 빠져 있었다.
손끝이 칼자루로 갈 듯 말 듯 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녀석의 목을 베면 끝날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황제는 회귀의 권능을 얻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눈앞의 이 녀석은 황제가 아니다.
내가 알기로 그는 5황자로 제국의 막내 황자였다.
본래의 세계에서는 서열 싸움에서 승리하여 황위에 올랐으나, 아무래도 최초의 세계에서는 황권에서 밀려난 듯했다.
자신을 따르는 몇몇 수행원들만 데리고 온 듯한데.
그는 정말 태풍을 만나 우연히 이곳에 온 것일까?
아니면 회귀의 권능을 알고 이곳을 찾은 것일까?
그것에 대한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내가 말했다.
“크레본 제국의 5황자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라낙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눈을 부릅뜨며 검을 뽑았다.
시퍼런 칼날이 곳곳에서 세워졌다.
날카로이 일어난 기세가 삽시간에 나를 조여 온다.
아스라낙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내 정체를 아는 자를 만날 줄이야. 어느 쪽에 속해 있었소? 둘째 형님? 아니면 셋째?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걸 보면 내 목을 베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목을 베러 왔다고 할 수도 있었다.
사실 이렇다 저렇다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목을 베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아직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
회귀의 권능으로 내 인생을 빼앗은 자는 이자가 아니었다.
이 세계의 내가, 내가 아니듯이.
그런 그를 오직 내가 사는 세계를 위해 목을 벤다는 건, 그가 자신의 삶을 위해 내 삶을 무너뜨린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와 같은 인간이 될 생각은 없었다.
같은 인간이 되는 순간, 나는 그를 심판할 자격을 잃는 것과도 같다.
내게는 힘이 있다.
녀석과 같은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를 가만히 둘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판단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회귀의 권능을 얻는 건 10일 후.
녀석의 목을 베는 건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니 이 자식이 어떤 이유로 회귀를 했는지.
어떻게 회귀를 하게 된 것인지.
또, 대체 무엇을 위해 회귀하고자 했는지.
나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자 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입을 열었다.
“제네스다. 프렌치아 사람이지.”
“프렌치아? 이거 반갑군. 우리도 마침 프렌치아로 가는 중이었거든.”
“왜지?”
“삭막한 제국과 달리 살기 좋은 나라라고 들었거든.”
“네 이놈!”
내게 무례하다고 꾸짖었던 기사 녀석이 다시 한번 눈을 부라렸다.
“이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도 감히 반말을 지-.”
“됐어, 에로인. 이제 황자도 아니니.”
“하지만 전하.”
아스라낙은 소탈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프렌치아 사람이야. 우리의 법도를 강요할 필요는 없지.”
“……끄응.”
에로인은 앓는 소리를 내며 불만을 삼키고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스라낙이 나를 보며 말했다.
“배고픈데, 못다 한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하는 게 어떤가. 내가 사실 프렌치아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