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제198화 지금 살아가고 있는 (2)
“무자비한 놈이라니까.”
리포드는 전도유망한 훈련생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있는 제네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 보이기는 하는군.”
옆에 있던 드라칸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저 경험이 훈련생들에게 얼마나 값진지 알고 있음에도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풀썩.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검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훈련생이 바닥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훈련생이었다.
둘은 그 모습을 보며 동시에 흠칫했다.
제네스가 그들을 보고 있던 까닭.
“너희들도 와라.”
“…….”
리포드는 못 본 척 고개를 홱 돌렸으나 드라칸은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고통이 따를 테지만 제네스의 가르침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젠장.”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는 드라칸을 보고 리포드가 툴툴거렸다.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엉기적엉기적 그 뒤를 따른 리포드가 제네스를 보며 입을 삐쭉거렸다.
“뭐 우리까지 훈련시킬 작정이오?”
“검이나 들어라.”
제네스의 말은 언제나처럼 짧았다.
“누가 먼저 할 테냐.”
“내가 먼저 하겠소.”
훈련용 창을 쥔 드라칸이 앞으로 나섰다.
“팔자 좋수.”
뒤로 물러선 리포드는 네더만의 옆으로 서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군. 나까지 꼼짝없이 당할 뻔했어.”
네더만이 씩 웃었다. 둘이 없었다면 다음은 꼼짝없이 그의 차례가 될 뻔했다.
둘은 드라칸과 제네스의 대련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괴물 같은 놈.”
네더만의 입가에서 자연스러운 탄성이 흘렀다.
훈련생들과 드라칸의 격의 차이는 아득했다.
하나, 제네스 앞에 서니 훈련생과 드라칸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드라칸의 매서운 창날이 봄바람처럼 가벼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의 창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제네스의 검이 압도적인 것이지.
그다지 빠르지도 않은 검인데도, 그렇다.
궤적이 눈에 훤히 보인다.
하나, 검은 유성이라 불리는 드라칸의 창격은 그런 검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드라칸의 팔뚝 위로 굵은 핏줄이 꿈틀거린다.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창이 한 번을 시원하게 뻗어 나가지 못한다.
드라칸의 본 실력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의 실력을 형편없다 여겼을 정도였다.
빠각!
온몸을 두들겨 맞던 드라칸은 결국 정수리에 강한 일격을 허용하며 허무하게 무너졌다.
제네스의 시선은 리포드를 향하고 있었다.
“쳇.”
혀를 찬 리포드가 나섰다.
처맞으러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제네스와 검을 겨루는 것은 기사로서 굉장한 기회였다.
문제는 이미 충분할 만큼 겪어 봤다는 거다.
“후.”
제네스 앞에 선 리포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저 마주 선 것만으로도 하늘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다.
마치 온몸이 깊은 물속에 잠긴 듯한 기분.
드라칸이 왜 바보같이 허우적거렸는지 이해가 간다.
“전력으로 가겠수!”
말을 끝내기 무섭게 리포드의 발끝이 지반을 밀어냈다.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검을 얹었다.
초장부터 작정을 하고 뻗은 일격.
하지만 과정도 결과도 드라칸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빠각!
눈에 별이 보였다.
완벽한 패배였다.
“와…….”
쓰린 몸을 부여잡고 한편에 모여 있던 훈련생들의 입가에서 절로 탄성이 일었다.
드라칸과 리포드를 모르지 않았다.
검은 유성과 인간 성벽.
그 이름의 무게는 태산과도 같았다.
하나, 그 둘마저도 흰 사자 앞에서는 자신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검이 헛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리길래 그리 빠르지도 않은 검으로 대련 상대를 맥없이 만들어 버리는지…….
제네스가 그린 궤적들을 머릿속에 그저 새겨 넣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암기였다.
조금의 순간도 잊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언제고 눈앞에 놓여 있을 검.
그들은 이제 평생을 그 검의 그림자를 쫓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닿지 못할 테지.
하나 확실한 방향이 되어 줄 터였다.
“눈치 빠른 녀석.”
제네스의 눈가가 빈 공간에 닿았다.
네더만은 진즉에 도망간 지 오래였다.
제네스는 훈련을 끝내고 걸음을 옮겼다.
레이크와 약속된 만남이 있었다.
* * *
“오셨습니까.”
나는 자리에 앉았다.
“내일 출발하신다고요.”
“아마 2년은 걸리겠지.”
전 국토를 누벼야 했다. 이동 시간까지 합하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예, 알겠습니다. 뒤처리는 저희가 할 테니 쭉 나아가시면 됩니다.”
레이크와 나는 앞으로 움직일 구체적인 경로에 대해 논의했다. 프렌치아에 남아 있는 제국군과 변절자들을 모조리 벨 것이었다. 넓은 반경에 퍼져 있기에 무작정 움직이기보다 세력의 이동이나 연합 등을 고려하여 경로를 설정해야 했다.
매우 세밀한 작업이었으나, 레이크가 모두 완료해 놓은 상황이었다.
“제네스 님이 돌아오실 때쯤이면 프렌치아는 안정화되어 있을 겁니다.”
살생부에 적혀 있는 이들의 목을 베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루시안과 레이크가 처리할 터.
썩은 것들을 도려내는 건 내 몫.
그 자리에 새살을 채워 넣는 건 이들의 몫이었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꽤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다시 만나려면 긴 시간이 지나야 할 터였다.
모든 일정을 맞출 수야 없겠지만,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이야기해 놓아야 수월하게 일이 풀릴 터였다.
“아직 세계 정상회담의 날짜가 정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기한은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세계 정상회담.
녹색의 오로라 이후 3년이 지나면, 아르에리아 왕국에서 세계 회의가 개최된다.
다시 한번 인류의 결속을 다지기 위함이고,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우리 또한 그곳에 참석할 겁니다.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마그네트를 수복하며 자주국임을 선포했다지만, 아직 세계의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제국 또한 여전히 프렌치아를 노리고 있었고.
세계 정상회담은 모든 국가가 참석하는 회의.
“대륙의 모든 나라에게 프렌치아의 해방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지요.”
프렌치아의 이름으로 참석하고 그 안에서 발언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막강한 공신력을 가지게 될 터였다.
프렌치아 입장에서는 대외적인 공증을 받을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이제 각자의 역할을 따라 움직이면 될 터였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 목적지는 이리엘이 머물고 있는 궁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따뜻한 톤에 하늘하늘하게 꾸며진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이리엘이 다소곳이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왜 저런 설정을 하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지만.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내 같은 복색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도 많이 길어 옛날 그 시절의 이리엘이 기억이 났다.
“깡! 깡!”
푸다닥 달려온 네스가 품으로 폴짝 안겨 들었다. 나는 이리엘의 맞은편에 앉아 네스를 무릎 위에 두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인사해 주러 오셨네요.”
그제야 찻잔을 내리고 나를 본 이리엘의 입은 댓 발로 튀어나와 있었다.
“먼 길을 가야 하니까.”
“저번에는 먼 길이 아니라 엄청 가까운 길이었나 봐요. 몇 달 만에 돌아와 놓고서는.”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차를 음미했다.
그리고 말했다.
“넌 이 모습이 더 어울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리엘은 확실히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나와 여행할 때보다는 훨씬 평안한 삶이기도 할 테고.
“…….”
이리엘은 별말 없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얼굴이 달아오른 게 부끄러운 듯했다. 망나니처럼 굴던 과거가 떠오른 듯했다. 지금에 비하면 거지꼴이나 다름없었으니 민망하기야 하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나 걸리는데요?”
“2년.”
“그렇게나요? 중간에 들르는 일은요?”
“상황이 맞으면 들를 수도 있지만, 웬만해서는 빠르게 마무리할 생각이야.”
“……웬만하면 들러요. 몸 상해요. 그리고 저 없다고 알렌 형님 너무 들볶지 말구요.”
“그건 장담 못 하겠군.”
“하여간 못됐다니까.”
이리엘은 그제야 입꼬리를 옅게 들어 올렸다. 왠지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벌써 가게요?”
“얼굴 봤으니 가야지.”
“내일 가는 거죠?”
“그래.”
“이따 저녁에 한잔해요! 알렌 형님이랑 네더만 씨도 불러서! 가기 전에 찐하게 놀아야죠!”
“뭐, 마음대로.”
나는 그 말과 함께 발을 돌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내 방에서 조촐한 술 파티가 열렸다.
이리엘은 물론이고 네더만에 알렌, 그리고 루시안과 레이크까지 함께였다.
“여어, 같이 즐겨야지.”
“왕이란 놈이.”
“왕? 왕이 뭔데? 먹는 건가?”
그날 저녁, 녀석들은 여느 때처럼 웃고 떠들었다.
시끌벅적 가벼운 시간들.
왕과 신하를 떠나 그 이전부터 함께해 온 이들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격 없이 가까웠다.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보며,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행복이 있음을 쉬이 알았다.
많은 것을 잃고 빼앗겼지만, 이 세계에도 분명 지키고 싶은 기억과 소중한 순간들이 있었다.
평안해 보였지만 꿈처럼 멀게 보이던 순간들이 아닌.
우리가 지금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세계.
그렇기에 나는 황제의 회귀에 대해.
최초의 세계선에 대해.
누구에게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나와 알렌은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왕성을 나섰다.
말은 천천히 대로를 가로질러 성문으로 향했다.
마그네트는 과거의 모습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보다도 빠르게 일상에 적응해 가는 듯 보였다.
나는 어느새 자리를 잡아 가는 국민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그리고 성문을 넘었다.
마그네트의 드높은 성벽이 등 뒤에 놓였다가 점차 멀어진다.
“아직도 저 위에 걸린 국기가 프렌치아의 국기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알렌이 마그네트를 돌아보며 감상에 젖은 소리를 했다.
“2년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지 않겠습니까?”
“마그네트뿐만 아니라, 프렌치아 전체가 달라질 테지.”
“맞습니다. 분명 그리되겠죠. 그러고 보면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제네스 님을 만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돌아보면 한눈에 잡히는 그 시간들은 짧았다.
“물론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요.”
그러면서 또 길었다.
“이제 서서히 이 이야기의 결말이 다가오는 거 같아요.”
알렌이 씩 웃으며 나를 보았다.
“아직 할 일이 많기는 하지만, 왠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갈 거 같거든요. 지금까지에 비하면 좀 시시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지금까지 해 온 일이 뿌리를 뽑는 일이었다면, 앞으로 남은 일은 잔가지를 쳐 내는 정도였다.
바레인가를 비롯한 변절자들의 중추 가문은 대부분 무너졌고, 상주하고 있는 제국군들의 수 또한 여러 번의 전쟁으로 확연히 줄어 있었다.
제국의 지원도 받지 못할 이들을 상대하는 건, 전에 비해 손쉬운 일이 될 거다.
“네가 하냐.”
“하핫, 그러게요. 하지만 저는 지금처럼 옆에서 제네스 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그동안 혼자 여행하느라 힘드셨죠! 지금부터 마음껏 부려 먹어 주세요!”
기분에 취해 한 말이었을 거다.
나는 그 말을 금세 후회하게끔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예상대로 알렌은 그 말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하지만 녀석의 말이 맞는 것도 있었다.
시간은 정말이지 눈 깜박할 사이에 쏜살같이 흘렀다.
우리가 마그네트를 떠난 지도 어느새 2년이 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