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제228화 목적을 다한 검
나는 빠르게 마그네트를 향해 나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회군하는 제국군들의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몸 상태는 멀쩡해 보임에도 하나같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패잔병의 기색.
자의적인 철군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짙은 패배감이 자리해 있었다.
나는 그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그네트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은 더욱 가뿐해져 갔다.
전생의 연으로 짊어지게 된 책임.
나는 그것을 떨쳐 내기 위해 검을 들었다.
왕세자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도리였고, 여전히 나라를 잊지 않은 자들을 위한 도의였다.
이제는 나도 이 나라를 다시 내 것처럼 아끼게 되었지만, 내 역할은 이걸로 끝이었다.
이제 더 이상 프렌치아에 하늘을 벨 검은 필요치 않다.
검이란 자고로 베어야 할 적이 있을 때 의미를 갖는 법.
내가 벨 것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이상 검일 필요가 없는 나는, 모든 짐을 털어 낸 나는,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미뤄 왔던 은거. 안빈낙도의 삶.
그것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제 그것까지는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을 뿐이었다.
나는 점차 가벼워지는 몸을 이끌고 달렸다.
그리고 어느새.
수도, 마그네트의 그 기다랗고 웅장한 성벽 앞에 서 있었다.
도시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구름처럼 붕 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걸친 사람들처럼 만면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다.
마치 축제의 전야 같다.
나는 그 평화로운 거리를 걸어 왕성을 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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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냐.”
내 말에, 서류에 파묻혀 있던 레이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에 옅은 이채가 어렸다가 흩어졌다.
“오셨습니까.”
하여간 재미없는 녀석.
난데없는 등장이었음에도 마치 어제라도 만난 것처럼 대꾸를 해 온다.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말한 건 다 준비됐겠지?”
“물론이죠.”
레이크는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어 내게 다가와 건네주었다.
내가 가장 먼저 녀석을 찾아온 이유였다.
나는 그것의 내용도 확인하지 않았다. 알아서 잘했겠지.
“가 본 이가 좋다고 하더군요.”
“내 안목이니 당연하지.”
“언제 갈 생각이십니까.”
“내일.”
노후를 위한 모든 건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다.
집도 구했고, 돈도 평생을 펑펑 쓰고도 남을 정도로 풍족하게 모아 놨다.
돈이 어디서 났냐고?
3년 동안 부당하게 재산을 쌓은 놈들의 목을 베고 다녔다.
나는 몰수될 녀석들의 재산 중에 값비싼 것들을 따로 챙겼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루시안에게 받을 수 있었지만, 돈은 떳떳하게 벌어야 남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는 법이다.
“제가 더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없다. 넌 여기나 신경 써.”
“예. 주신 기회, 소중히 쓰겠습니다.”
그래야지.
내가 뼈 빠지게 검을 휘둘러서 되찾은 프렌치아인데.
“그런데 끝까지 제네스 님의 정체는 말씀해 주시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 * *
루시안과의 대화까지 마치고 거처로 돌아온 나는, 지붕 위에 가만히 앉아 눈앞에 깔린 야경을 바라보았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이곳은 내가 전생에 기거했던 웨일런궁이 있던 자리.
어렸던 내게는 한없이 넓게 느껴졌던 궁의 터가 한눈에 담긴다.
가끔 이곳에 올라 술을 홀짝일 때면 마음 한편이 무거웠는데, 오늘은 개운하다.
“여어, 왔는가!”
저택 앞에서 네더만이 술병을 짤랑짤랑 흔들어 댔다.
부른 적은 없으나 올 줄 알았다.
나의 존재감을 녀석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으니.
네더만은 지붕 위로 손쉽게 올라와 씩 웃어 보였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목 빠지게 기다린 줄 아는가. 자, 이거 보라고. 워레스트 120년산일세! 정말이지 천상의 맛일 거라고!”
기다린 건 내가 아니라 손에 쥔 술이겠지.
그는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며 영롱한 술병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제네스 니이임!!!”
뒤편에서 요란한 소음이 일었다.
알렌이 지붕 위로 머리통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울먹이는 표정이 참으로 볼만하다.
그는 지붕 위로 폴짝 올라오더니 눈물을 휘날리며 내게 달려왔다.
그 뒤로 이리엘이 지붕 위로 오르는 것이 보였다. 사내가 입을 법한 복장도 그렇거니와, 숙련된 도둑처럼 지붕 위를 가뿐히 오르는 저 녀석을 보고 누가 일국의 공주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어느새 지척에 이른 알렌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였다.
빡!
“끄악!”
나를 끌어안으려던 녀석은 비명과 함께 제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하여간.
술판은 자연스레 지붕 위에서 벌어졌다. 우리는 새 새끼들처럼 나란히 앉아 술병을 기울였다.
“제네스 님, 제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좀 얘기해 주세요! 저 궁금해 죽겠다고요!”
술이 좀 들어가자 알렌이 발을 동동거리며 보채 왔다.
“저는 그 이야기들을 다 들을 때까지 제네스 님 옆에 꼭 붙어 있을 겁니다!”
나는 답을 하는 대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알렌은 슬쩍 발을 빼며 네더만에게 말을 돌렸다.
“이거 어디서 훔쳐 온 겁니까? 술맛이 일품인데요?”
“앞으로는 어쩔 작정인가?”
네더만은 알렌의 말에 대꾸도 않고 내게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리며 호기심을 빛냈다.
나는 술병을 들며 말했다.
“쉬어야지.”
내 거취에 대해 말한 적은 없으나, 내가 더 이상 마그네트에 머물지 않을 거란 것 정도는 모두 알 터였다.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려고?”
“여행은 충분히 했어.”
“맞아요. 제네스 님이랑 저랑 프렌치아를 얼마나 이 잡듯 돌아다녔는데요.”
“그래도 대륙은 넓다고.”
네더만의 말대로 대륙은 넓었다. 가 본 곳보다 가 보지 않은 곳이 더 많을 터였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절경들과 관광을 목적으로 개발된 유적들.
갈 곳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적한 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거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일세. 내 오랜 꿈이 그거였거든. 방랑벽만 없었다면 진즉 그렇게 살고 있었을 걸세. 이참에 나도 자네 옆에 눌러앉아 볼까!”
“죽고 싶다면 언제든지.”
네더만은 곧장 알렌에게 고개를 돌리며 술병을 들어 보였다.
“오늘 술맛이 특히 좋기는 하지?”
“그래서 언제 가려고요.”
이번에는 이리엘이었다. 이리엘은 술병을 꼭 붙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얘 눈빛이 왜 이래?
입술을 빼쭉 내민 게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내가 말했다.
“내일.”
“예에?!”
내 대답에 이리엘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네더만과 알렌도 놀란 눈치였다. 이리엘은 내게 몸을 한껏 기울이며 질문들을 다다다 쏘아 댔다.
“아니! 무슨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요! 누가 쫓아와요?! 빚이라도 졌어요?! 어디로 가는데요! 언제 다시 올 건데요!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게 어딨어요!”
“갑자기 가는 거 아니야.”
발렌시아 대륙으로 돌아오기 훨씬 이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늦어졌지만, 이제는 내 앞을 막아 올 것이 없었다.
“그래도요! 그럼 저는 어떡하라고요!”
이리엘이 빽! 소리를 질렀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모였다. 당황한 이리엘이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횡설수설했다.
“하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다들 떠나면 이제 나 혼자 뭐 하고 노냐, 이런 거죠.”
아무래도 벌써 취했나 본데.
“그건 걱정 말게. 내가 있지 않나.”
네더만이 제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으나, 이리엘은 들은 척도 않고 내게 질문을 이어 갔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요? 얼마나 오래 쉴 건데요? 왕궁에는 자주 놀러 올 거예요?”
“모르지.”
어디로 가는지 외에 답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도 내가 얼마나 그곳에 있을지는 기약이 없다.
잠깐일 수도 있고, 일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후로도 녀석들은 이것저것 질문을 해 왔지만,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질문은 자연스레 서로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이제 데이지랑 결혼해야지.”
전쟁도 끝났겠다, 알렌의 거취를 막을 것은 없었다. 물론 그전에도 그를 막고 있는 것은 없었다. 스스로 세운 장벽일 뿐.
본인이 그토록 타령하던 이 이야기의 끝을 보았으니, 데이지와 오순도순 평범한 일생을 살아갈 테지.
“뭐, 나야 뭐 있겠나. 여기 머물면서 놀고먹는 거지 뭐.”
네더만은 레오니랜서의 기사단장의 자리를 계속해서 이어 가게 될 터였다.
이제는 그만이 황제의 검이다.
못 미더운 녀석이지만, 나를 제외하면 프렌치아에서 가장 강한 검이었다.
평소에 뺀질거리기는 해도 루시안에게 큰 도움이 될 터.
“에효. 알렌 형님이 떠나면 나는 이제 누구하고 논담.”
이리엘이 한숨을 푹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다.
“내가 있잖은가!”
그녀의 눈에는 네더만이 아예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일전에는 상단의 지부를 이끌었었고, 나를 만난 뒤에는 프렌치아를 이곳저곳 쏘다녔다.
왕궁에만 있으려니 답답할 만도 하다.
밤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술에 취해 웃고 떠들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밤은 이제 쉽지 않을 터였다.
시끄럽고 성가신 녀석들이기는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가끔은 적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 * *
빼곡한 수풀 사이로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그네트를 벗어난 지도 어느덧 2주.
나는 산속에 잠긴 작은 통나무집을 앞에 두고 있었다.
과거 숲지기가 사용하던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머물 곳이기도 했다. 나는 소박한 통나무집을 한차례 삥 둘러보았다.
한쪽에는 장작들이 쌓여 있었고, 그 앞으로는 장작을 패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꽤 오래전에 사용했는지 그 위로 세월이 얹어져 있다.
나는 나무 밑동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았다.
눈앞에 기다란 협곡이 뱀의 몸뚱이처럼 굽이치고 있었다.
안주 없이도 술이 달 만큼 경관은 흡족했다.
변절자들의 목을 치기 위해 프렌치아를 들쑤시고 다니던 중에, 알렌과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다.
나는 그때 이곳이 썩 마음에 들었고, 레이크에게 말해 주변의 땅과 이 집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간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경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왜일까.
그렇게 청량하고 푸르른 공기를 마시다 보니 루시안 녀석이 떠올랐다.
왕궁에 도착했던 밤.
나는 레이크와의 대화 이후에 루시안을 찾았었다.
“멍청한 표정이군.”
“상당히 놀랐으니까. 올 때가 됐다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일 줄은 몰랐거든.”
그는 금세 미소로 놀랐던 표정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산책 좀 할까?”
나와 그는 정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눴다.
연못 위로 휘영청 뜬 달이 비친다.
문득 그 앞에 걸음을 멈춘 루시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밤에 정원을 걷다 보면 자주 생각나. 너와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
팔레이트 정원에서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던, 그 순간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네가 강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진짜로 내게 프렌치아를 안겨 줄 줄은 상상도 못 했었지.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됐네.”
밤하늘로 시선을 옮긴 녀석이 말을 이었다.
“고맙다, 프렌치아의 국민이었던 사람으로서. 지금은 프렌치아의 왕이 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고맙다.”
나는 묵묵히 녀석의 진심을 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네스가 아닌, 전생의 제네스 쿤 프렌치아로서 루시안에게 말했다.
“이 나라를 잘 부탁한다.”
루시안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가려고.”
“내일.”
“급하기는. 끝까지 네 정체에 대해서는 말 안 해 줄 생각인가?”
“너도 그 소리냐.”
“레이크가 먼저 물었나 보군. 이제는 답해 줄 수 있나? 네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긴 누구야. 제네스지.”
과거에는 녀석에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나,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제네스 쿤 프렌치아도 아니고 이검학도 아니고.
그냥, 제네스다.
그게 루시안이 원하는 답은 아니겠지만.
녀석은 내 진솔한 답변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말이 안 되잖아. 이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 나이에 그만한 무력을 가졌다는 게. 그리고 그런 자가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뚝. 마치 프렌치아를 위한 선물처럼.”
루시안의 입장에서는 그럴 터였다.
내 존재 자체가 설명이 안 될 테지.
그는 나에 대해서도, 황제의 회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나는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막 사라지는 건 아니지? 이후로는 영영 볼 수 없다거나.”
“그럴 일 없어.”
“뭐, 그렇다면야 네가 누구인 게 뭐가 중요하겠어.”
루시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할 수도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모두 증명할 수 있다. 루시안 또한 순순히 믿어 줄 것이고.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건.
모든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나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루시안과 내 관계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앞으로 흘러갈 프렌치아에서도 그렇고.
나의 전생과 황제의 회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지금처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백으로 처리되어 흘러가는 게 낫다.
“가끔 왕궁에 놀러 올 거지?”
“여기 놀거리가 있나.”
“구하기 어려운 명주들이 있지.”
“가끔 불러.”
내 말에 루시안은 환히 웃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없다고 생각해라.”
“그래. 흰 사자는 없지. 제네스는 있고.”
내 말을 이해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답했다.
“물론.”
나는 이제 그의 검이 아니었다. 흰 사자는 그 쓰임새를 다했다.
그 부분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간 이유는, 강력한 힘은 모든 일을 쉽게 만들기 때문이다.
앞으로 프렌치아에서 벌어질 크고 작은 소란과 분쟁들.
그것에 내가 나선다면 모든 문제는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될 거다.
황제의 목마저 베어 버릴 수 있는 나는, 그토록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리고 매우 편리한 힘일 테지.
하지만 나는 이제 쉬고 싶다.
모든 걸 맡길 사람을 찾기 위해 루시안을 왕으로 만든 것이다.
거기까지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 나는, 루시안의 검이 아니다.
물론 내 존재의 그림자만으로도 프렌치아는 꽤 긴 평안을 누릴 수 있을 테지.
루시안은 나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동안 고생했다. 안 괴롭힐 테니까, 몸이 근질거릴 만큼 쉬어.”
그래야지.
이제 쉬어야지.
내가 천살성(天殺星)의 운명을 타고났다던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이 적이라도 마찬가지다.
나의 검은 정의(正義)가 아니다.
나는 그저 내게 반하는 자들을 베었을 뿐이다.
칼날에는 생과 사.
그것만이 갈릴 뿐, 누구의 옳음이나 그름도 없다.
나도, 내가 죽인 자들도 결국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따라 움직인 것일 뿐이다.
나는 옳았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라, 강했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을 베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죄의식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없었어도 흐를 피였다.
내가 없었으면 아군에서 그만큼 많은 피가 흘렀겠지.
단지 나는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 편히 쉬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벨 것이 없기에 검을 칼집에 넣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택한 칼집이 바로 여기였다.
물끄러미 전경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푸르른 창공을 바라보았다.
이로써, 나의 검은 평안에 잠겼다.
이제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일까.
떨어져 내리는 햇살이 유독 따사로웠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