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38화 (38/250)

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38)

다솜이의 어머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은 그제야 그녀의 승부사 기질이 떠올랐다.

내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이 그녀였다.

도훈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곳이라면…….”

“자네 할머니.”

“제 할머니요?”

“그래, 자네 할머니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일이 시간을 소비할 만한 일인지 아닌지를 말이야.”

“음…….”

“힘들면 포기해도 되고.”

말을 마친 최수미가 팔짱을 끼고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말에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릴 적 초등학교 친구의 어머니로만 생각했었는데, 왠지 도훈의 집안을 잘 아는 느낌이 들었다.

최수미가 다시 말했다.

“싫으면 말고.”

“아니에요, 일단 해 보죠.”

“그리고 다솜이가 작품을 쓰든 공부를 하든 나는 신경 안 써.”

“네?”

“뭔가 자네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나는 다솜이가 뭘 하든 신경 안 쓴다고.”

“그런데 왜 작품 활동을 말리십니까?”

“나하고 다솜이하고 약속한 게 있거든.”

“약속이요?”

“그건 다솜이한테 직접 물어봐. 그리고 온 김에 밥은 먹고 가야지.”

말을 마친 최수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주방으로 걸어간 최수미는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들어가라고 한 뒤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어서 기분 좋은 백숙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앞쪽에서는 다솜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약속이라는 게 대체 뭐야?”

“그, 그건 말 못 해요.”

“아.”

도훈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김다솜은 미안한지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도훈은 현관 앞에서 최수미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분 좋게 도훈을 바라봤다.

“그럼 조심해서 가고,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어?”

“말씀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야, 그럼 자주 놀러 오고.”

처음 왔을 때와는 약간은 다른 분위기에 도훈은 계속 의문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훈은 표정을 수습하고 인사를 건넸다.

“네, 건강하시고요.”

말을 마친 도훈은 잔디 사이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사라지는 도훈을 본 최수미는 조용히 거실로 들어가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 왔다 갔어요.”

싱긋 미소 지으며 통화를 마친 최수미는 김다솜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김다솜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그러다가 도훈이 오빠 집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지금 그게 문제는 아니지 않니?”

“그래도요, 괜히 피해 주는 것 같아서요.”

“도훈이가 약속 못 지키면 영화에 대한 꿈은 접는 거다, 아니면 결혼해서 마음대로 하던지.”

“왜, 자꾸 결혼 얘기를 해요!”

김다솜이 고개를 흔들었다.

최수미와 김다솜 간에 한 약속은 간단했다.

결혼하고 나면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김다솜은 작품에 대한 꿈을 버리기 싫었지만, 결혼도 생각이 없었다.

그때 뭔가 떠오른 김다솜이 물었다.

“그런데 왜 백숙을 한 거예요?”

“원래 사위는 백년지객이란 말이 있잖아, 그러니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네?”

“네가 다 크고 우리 집에 남자 데려온 거 이번이 처음이잖아. 그러니 당연히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김다솜은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 * *

한민국과 함께 할머니 장경자의 집으로 향하는 도훈은 재채기를 했다.

“에취!”

“아까 분위기가 그렇게 서늘했어요?”

“분위기는 괜찮았는데, 누가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네.”

“에이, 누가 실장님 이야기를 한다고 그래요?”

“왜 내 이야기 할 사람이 그렇게 없을 것 같아.”

“뭐, 그다지…….”

“아니, 내가 그렇게 인기가 없어 보여?”

“그게 아니라…….”

한민국이 고개를 흔들며 전방을 바라봤다.

도훈도 조용히 한강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작품에 대한 투자 금액이 문제가 아니었다.

적은 돈이라도 허투루 쓸 줄 모르는 할머니에게 영화에 투자하라고 한다?

거기에는 탄탄한 근거를 들이대야 했다.

과연 어떤 미끼가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도훈이 탄 차는 장경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 * *

안으로 들어가자 검은 복장의 엄지연 비서가 도훈을 맞이했다.

“오셨어요?”

“잘 지내셨어요? 누나.”

항상 진지한 표정의 엄지연의 표정에 살짝 틈이 생겼다.

누나라는 호칭에 당황하는 듯 보였다.

“누, 누나라고요?”

엄지연은 말까지 더듬는다.

“그럼 누나죠, 어릴 적부터 이렇게 봤잖아요.”

“그렇게 저를 부른 건 처음인 것 같은데요.”

그녀는 이제까지와는 확 바뀐 도훈의 태도에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그냥 제 이름 부르셔도 돼요, 솔직히 그룹 이인자가 한참 아래인 제게 말 높이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아니 반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이인자가 분명했다.

엄지연은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제가 이인자라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엄지연은 시선을 피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고놈.”

슬쩍 뒤쪽을 보니 할머니가 활짝 웃고 있었다.

도훈이 달려가서 허리를 숙였다.

“할머니, 잘 지내셨죠?”

“점점 인사성이 밝아지는구나. 언제는 회장님이라고 하더니 말이다.”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공이나 사냐?”

“당연히……. 사입니다.”

“흠, 그래?”

장경자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도훈이 활짝 웃으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건 손자가 드리는 뇌물입니다.”

“이게 뭐냐?”

“열어 보세요. 할머니.”

“어디 보자…….”

쇼핑백을 열어 본 장경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도훈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쇼핑백 안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앞쪽 시장에서 줄 서서 산 거예요.”

“음, 이건 청화당의 떡이 아니냐?”

장경자가 도훈과 쇼핑백 안쪽을 번갈아 봤다.

쇼핑백 안에는 장경자가 좋아하는 오메기떡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서 사 온 것이다.

보통 아침에 일찍 줄을 서야 살 수 있는 떡집.

사람을 시키던지 장경자의 이름을 팔면 그 떡을 못 먹을 리 없지만, 그녀는 이제껏 이 떡을 먹기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남들처럼 새벽부터 기다려 떡을 사 오곤 했다.

단순히 떡이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기다림이 묻어난 떡이 먹고 싶다는 그녀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런데 손자인 도훈이 새벽에 기다렸다가 이 떡을 사 왔다고 하니 놀란 것이다.

“네, 맞아요. 할머니. 그런데 오늘 산 건 아니고 어제 산 거예요. 냉동해 놨으니 나중에 녹여서 드세요.”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나 보다.”

“다름이 아니라…….”

도훈은 최수미가 했던 이야기를 건넸다.

이야기가 이어지자 장경자는 흥미롭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마친 도훈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패도 안 보여 주고 돈부터 달라는 것이냐?”

“패는 지금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말을 마친 도훈은 장경자를 조용히 바라봤다.

그저 바라보고만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도훈의 모습에 장경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뭐 하는 게냐?”

“패는 바로 저입니다.”

“너라고?”

“요즘 들어서 제가 변한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지금 제 모습이 패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사적으로 이야기할 때고. 용돈이라면 내가 이 자리에서 십억도 줄 수 있지만, 투자라면 말이 달라지는 게 정확한 게 아니냐?”

“손자에 대한 투자는 사적인 게 아닌가요?”

“내 생전에 투자란 이름을 붙였을 때는 사적인 감정을 붙인 적이 없었구나, 도훈아.”

장경자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지만, 마지막 도훈의 이름만은 부드럽게 불렀다.

도훈은 보이지 않게 눈을 빛냈다.

냉정하게 대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도훈은 그저 할머니가 아직은 정정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나와야 장경자였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렇게 산다면 앞으로 남은 생이 의미가 있을까.

장경자로부터 삶의 치열함에 대해서 한 번 더 깨달은 도훈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장경자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자신은 손자를 책망했다.

그런데 손자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그때 도훈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할머니, 그럼 간단하게 조건을 말씀해 주세요.”

“조건을 이야기해 달라…….”

“네, 무작정 안 된다고 하실 분은 아니시잖아요. 편하게 조건을 말씀해 주세요.”

“그럼, 네 힘으로 오억을 벌어 봐라, 그럼 내가 네게 오십억을 주겠다.”

“강영웅 콘서트만 한번 열어도 오억은 그냥 벌릴 것 같은데요. 이렇게 쉬운 숙제를 내주실 리는 없잖아요.”

“당연하지, 내가 물려준 것 말고 네가 가진 몸뚱이와 머리만 가지고 벌어 보란 이야기다.”

장경자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녀의 뜻은 간단했다.

도훈이 자신을 믿고 투자하라 했으니 그 가치를 증명하라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지금 상황에서만 해당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이제 도훈을 인정하고 본격적으로 시험을 해 보겠다는 이야기였다.

도훈은 그런 후계자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지금 눈앞의 투자금에만 신경이 갈 뿐이었다.

도훈은 아무 고민 없이 바로 답했다.

“저도 좋아요, 언제까지 벌면 되겠습니까?”

“급한 건 너니 기한은 따로 정하지 않겠다.”

“혹시 오십억에 조금 붙여도 되겠습니까? 돈은 아니고 부탁이에요, 할머니.”

“말해 봐라.”

“뭐, 다른 건 아니고…….”

도훈은 슬쩍 말끝을 흐리며 장경자의 눈빛을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억 번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허, 요놈이…….”

“그런데 할머니.”

“말해 봐라.”

“돈 빌리는 건 괜찮죠?”

“음, 내가 준 재산을 담보로 하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놈 그냥 한 번에 말하면 될 것을 자꾸 귀찮게 하느냐?”

“다른 건 아니고 계약서 좀 써 주셨으면 해서요.”

“계약서라고?”

장경자의 눈이 한계까지 커지자 도훈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할머니와의 약속이 공과 사 중에 공이라고 하셨잖아요. 사라면 굳이 계약서를 안 써도 되는데, 공이라면 쓰는 게 맞죠.”

“그래 네 맘껏 한번 써 봐라. 만약에 계약서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면 여기서 못 나갈 줄 알아라.”

엄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장경자의 눈빛은 따뜻했다.

그때 도훈이 아무렇지 않게 노트북을 꺼냈다.

그러고는 문서 하나를 화면에 띄우더니 숫자 하나만 고치고 바로 출력 버튼을 눌렀다.

거실 어디에선가 프린터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잉, 지잉.

그 소리에 장경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