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프롤로그_전야제
피처럼 검붉은 하늘에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불길이 치솟았다. 새카만 연기가 그 뒤를 따라 뭉클뭉클 뭉쳐져 허공을 채웠다. 후두둑,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건물에서 파편이 떨어지는 소리가 이 지옥같은 세상에 간간히 현실감을 우겨넣었다. 숨이 끊어진 숱한 시신들은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살해당한 그대로 지면에 엎어져 자신의 혈액을 쏟아냈다. 텅 빈 동공이 향한 것은 두번 다시는 보지 못할 하늘.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은 이제 영영 미소지을 일이 없어졌다.
시선을 어디로 돌리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참혹한 풍경이었다. 비릿한 혈향이, 매캐한 연기의 냄새와 까닭 모를 악취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귓가 언저리에서 서서히 울려퍼지기 시작하는 여성의 맑은 웃음소리.
폐허에, 지옥에 둘러싸인 광장의 한 가운데에 유일하게 두 발로 선 여자는 즐거워 미치겠다는듯 천진하게 활짝 두 팔을 벌리고 그 자리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사뿐 사뿐 피로 더러워진 맨발을 옮겼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아름다운 백금발과 하얀 원피스가 그녀를 따라 나풀나풀 움직였다.
"하하하하! 하하!"
아시엘, 나의 아시엘. 여자의 앵두같은 입술이 속삭였다. 하늘로 뻗은 그녀의 양 손에서 진득한 혈액이 뚝뚝 뭉쳐 떨어져 원을 그렸다. 마치 얇은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여자는 춤을 췄다. 붉은 세상을 배경으로.
숨이 턱 막혀오는 느낌에 소년은 목을 감싸쥐었다. 분명 꿈 속일 텐데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아아, 싫어. 귀를 틀어막고 도리질을 쳐도 여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그만, 싫어. 싫다고. 죽음으로 점칠된 세상이 소년의 작은 몸을 압박했다. 왜 이렇게 됐게, 왜 이렇게 됐게? 노래하듯 속삭이는 여자가 미소지으며 폭포수같은 금발을 쓸어넘겼다. 이때까지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눈이 있어야 할 곳은 시커멓게 비어 있었다. 눈물 대신 흘러넘치기 시작하는 피가 그녀의 가느다란 턱선을 타고 떨어져 하얀 원피스에 얼룩을 그렸다.
그녀는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가까워질수록 압박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안 돼, 오지 마. 당신은 누구야?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말은 목 언저리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찰박, 찰박. 시신에서 비롯된 붉은색의 웅덩이를 맨발로 밟고 그녀는 소년의 앞에 섰다.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목을 살짝 감싸안은 그녀는 그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허억!"
아시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푹 젖은 머리칼에서 땀방울 하나가 똑 떨어졌다. 한참 동안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곧 자신이 있는 곳이 아카데미 기숙사 방임을 깨닫고 허탈한 한숨을 터뜨렸다.
"하아아...."
아시엘은 이마를 짚고 몸을 뒤로 푹 기댔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왜 언제나 이 모양인지-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픽 터뜨렸다.
어디선가 들어온 찬바람이 아시엘의 젖은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침대 맡의 작은 창문이 조금 열려 커튼이 새벽공기에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틈으로 스며든 새하얀 달빛 역시 바닥에 내려앉아 일렁였다.
꿈 속의 하얀 원피스 자락이 떠올라 아시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부스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창가로 갔다.
휘이잉. 순간 꽤 강한 바람이 불어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얇은 커튼이 젖혀지며 희미하게 비치던 달빛이 유리 너머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
창 밖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검은 밤하늘은 얄미울 정도로 맑았고, 이지러진 달은 부드럽게 하지만 차갑게 어두운 세상을 굽어보았다. 언제나 보이던 아카데미의 지붕 위에는 은색의 창백한 손길이 닿아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아시엘은 그제야 자신의 눈에서 물방울이 하나 둘 굴러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시엘은 황급히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바보같이 이게 뭐야. 창문을 꽉 닫고 커튼까지 쳐버린 그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나와 똑같을 뿐인 꿈이었다. 무너진 폐허도, 시신도, 금발의 여자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밤에 나타나는 그녀는 매번 아시엘의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갉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본 적 없는 폐허에 둘러싸인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자신. 모든 것이 죽어버린 둘만의 세계.
아시엘은 걸리적대는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안락하고 따뜻한 기숙사의 방이 들어왔다. 그래, 괜찮아. 단순한 악몽일 뿐이니까. 누구에게랄것 없이 속으로 되뇌며 그는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지만 몸은 점점 무거워지기만 했다.
언제부터 그 꿈을 꾸게 됐더라.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가라앉는 눈꺼풀과 싸우며 아시엘은 생각했다. 아마, 기억도 없이 버려진 조각상처럼 덩그러니 세상에 던져졌을 때-
아시엘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말았다. 봄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아직 추웠다. 기숙사 방에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서운 것을 본 어린애마냥 숨고 싶었다.
새털 이불의 온기가 다시금 몸 곳곳으로 퍼졌다. 괜찮아. 따뜻하잖아. 그는 주문처럼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졸업식
루카인 기사 양성 아카데미.
세튼 제국의 수도 헤크란에 위치한 제국 최대의 인재양성소.
긴 역사를 자랑하는 이 아카데미는 오늘 제국력357년 3월 13일-성대한 졸업식이 치러지는 중이었다.
[먼저 친애하는 졸업생 여러분,그리고 참관해주신 학부모님들과 여러 귀빈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저는 루카인 아카데미의 이사장인 라칸.드.루카인이라고 합니다...]
주신께 드리는 간단한 기도가 끝나고 통통한 몸매에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이사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단상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그 순간 만큼은 아시엘은 진심으로 자신이 일반 졸업생 무리에 섞여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험상, 이사장의 연설은 한 번 시작되면 좀처럼 끝나는 법이 없었다.
아시엘은 커튼 사이로 빼꼼 내밀었던 머리를 다시 집어넣고 무대 뒤쪽으로 돌아갔다.
"정말-저 이사장 할아버지 연설 안 들어도 되서 다행이야.무대 뒤쪽에는 음파 차단 마법도 걸려 있어서 마음껏 떠들어도 되잖아."
"드디어 학년 수석의 장점을 찾았어?"
그가 안도했다는 듯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며 말하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키가 큰 적발의 소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적발에 흑안을 가진, 차가워보이는 인상의 소년의 이름은 카이스.루.메르티스. 메르티스 백작가의 삼남으로 아시엘의 룸메이트이자 절친, 그리고 학년 차석이기도 했다.
"별로 수석이라서 싫다고는 안 했어.그저 저 많은 학생 앞에 나서는게 별로 좋지 않을 뿐이야."
아시엘은 올해 졸업생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학생이었다. 그 이름하여 학년 수석. 곧 저 이사장의 연설이 끝나면 무대 앞으로 나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몸이었다.
"답지 않게 긴장이나 하고.그래서, 결정은 했어?"
"당연하지."
카이스가 퉁바리를 섞어 질문을 하자 아시엘은 친구를 향해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카이는?"
"나?어디든지 너랑 같이 갈 거야."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아시엘은 미소를 지었다.
카이스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연 그였지만,곧 연설이 끝난 이사장이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바람에 서둘러 무대 쪽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학년 수석,위로."
이사장이 드디어 학년 수석을 부르자 학부모들과 졸업생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곧 "예."하는 간결한 대답과 동시에 당당한 걸음걸이로 학년 수석-아시엘이 무대 위로 나타나자 뒤쪽에 서 있던 학부모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귀 밑에서 찰랑이는 결 좋고 화사한 금발에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붉은색 눈동자, 그리고 새하얀 피부.
거기다 작지만 날씬하고 탄탄한 몸에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화려한 외모까지.일순 숨을 죽였던 그들은 곧 어느 가문의 아이일까,하고 추측하는 대화로 작게 소란스러워졌다.
아시엘이 절도있게 기사례를 취하며 자신의 이름을 대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이사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학년 수석, 아시엘..군은 드물게도 아카데미의 기초마법 부문과 검술 부문에서 모두 훌륭한 성적을 거둔 제국의 인재입니다.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인 이 시점에서 우리 아카데미의 명성을 더욱 높힐 뿐만 아니라, 어지러운 정세의 우리 제국에 큰 힘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아시엘이 더더욱 고개를 숙이자 이사장은 한번 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술렁임이 점점 커져가는 학부모석을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명성 높은 귀족가문에서 오신 학부모님들, 성씨가 없는 평민 아이가 수석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에 당황하신 줄은 알지만 조금 정숙해주시기 바랍니다..... 네,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수석과 차석에게는 제국의 최고라 불리는 두 개의 기사단에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입단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가 잠시 말을 끊고 무대 뒤로 눈짓을 보내자 곧 붉은 머리의 잘생긴 청년-카이스가 한 손에 하나씩, 고급스러운 휘장이 걸린 커다란 깃발 두 개를 가지고 걸어나왔다.
오른손의 붉은 깃발에는 두 발로 딛고 서서 마주보고있는 이 나라의 대공을 뜻하는 두 마리의 사자 문양이, 왼손의 순백의 깃발에는 황제를 뜻하는 태양을 배경으로 비상하는 독수리가 금빛으로 수놓아져있었다. 두 개 모두 화려한 금술로 테두리가 장식되어 두 눈을 자극했다.
카이스가 그것들을 이사장에게 건네고는 아시엘의 옆에 서서 기사례를 취하자 이사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붉은 깃발을 선택한다면 대공 직속 기사단, 루아 이클립스에 입단하게 되고 이 하얀 깃발을 선택한다면 황제 직속 기사단,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에 입단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 입단 시험을 볼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학부모들과 학생들, 그리고 교사들마저 숨죽이는 가운데 아시엘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시엘은 잠시 심호흡을 하는 듯 하더니 결심한 듯 단호한 눈빛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사장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와아아-!"
넓은 강당 안이 함성소리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아시엘의 손에는 순백의 깃발이 들려있었다.
무대의 가운데에 서서 순백의 깃발을 두어 번 크게 흔든 그는 그것을 다시 이사장에게 공손히 건네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폐하께 영광을."
다시 한 번 강당에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차츰 박수가 잦아들고 이사장이 카이스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 그는 곧바로 말했다.
"황제폐하께 영광을."
와아아!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또 한번 강당에 울려퍼졌다.
진심이 우러나오는 것이든 아니든,그 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두 소년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그것으로,성대했던 졸업식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