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야시장에서(1)
"아시엘. 내가 널 데려온 지 몇 년이나 되었지?"
"네?"
우물우물 빵을 즐겁게 음미하던 아시엘은 루이스의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약한 포도주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술기운이 도는지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있었다.
"어.. 아마 6년일걸요?"
"그러냐?벌써 그렇게 됬나. 하긴. 하노빌 영지를 혼자 떠돌던 꼬맹이가 벌써 이만큼 컸으니."
"거기다 날 주운 교수님 얼굴에 주름이 이렇게 많이 늘었으니."
킬킬거리며 아시엘이 말하자 루이스는 뭐야? 하며 도끼눈을 뜨고는 손을 쭉 뻗었다. 그러고는 꿀빵을 먹던 그의 머리를 세게 꾸욱 눌렀다.
"아그아아아악!"
"야 이놈아. 내가 늙은 이유가 바로 네놈때문이다 이놈아. 알긴 아냐?"
"아,알았어요! 죄송해요! 아! 놔줘요! 아! 생명의 은인님! 악!"
얼굴이 찐득한 꿀이 담긴 접시에 처박히기 일보직전. 아시엘이 기겁하며 바둥거리자 루이스는 헹,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풀었다. 겨우 풀려난 아시엘은 투덜거리며 엉망이 된 금발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레이는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았다. 카이스는 묵묵히 아시엘의 머리칼을 같이 다듬어 줄 뿐이었다. 잠시 소년들을 노려보던 루이스는 팔짱을 척, 끼며 입을 열었다.
"자,그런 의미로 문제다."
"에?"
뜬금없는 문제타령에 전 아카데미 1,2,3등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러건 말건 교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세튼 제국의 현 상황에 어떻지? 카이스, 네가 말해봐."
난데없이 호명당한 카이스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대답했다.
"현 황제와 대공의 오랜 대립으로 귀족들도 양쪽으로 갈라섰고.. 그렇게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아카데미에서 배웠습니다."
"그렇지.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라."
다리를 꼬고 의자 뒤에 몸을 기대면서 루이스가 말했다.
"셀레니스 기사단, 그리고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은 황제와 대공이 각각의 장기말로 삼기 위해 만들었어. 뭐,들어가면 내부 상황을 차차 알겠지만 대충은 알아두는게 좋겠지."
마지막 말은 혼잣말하듯 끝낸 그는 세 명의 제자가 자세를 바로 하고 눈동자를 빛내는 것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좋아.잘들어 둬,꼬맹이들."
그리고 루이스는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첫번째로 알아 둘 것은 보기보다 이 대립은 평화롭지 않다는 거다. 카이스 말대로 귀족들이 갈라섬은 물론이고 신전마저 두 편으로 갈라섰지. 일부 중립 귀족들과 신전들은 눈치만 살피고 있는 처지라는 거야."
손가락을 까닥까닥거리며 루이스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우리 제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건 알지? 그럼 또 문제를 내지. 레이, 이번엔 네가 대답해 봐."
지목된 레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우리 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신전은?'
"어..그러니까 주신을 모시는 에레스 교 아닌가요?그곳과 비슷하게 마신 체르니온 교가 있어..요."
별로 자신없는 듯 그가 대답하자 루이스는 그렇지,하고만족스럽게 말했다.
"정확하게는 대공의 지지를 받는 체르니온 신전과 황제의 보호를 받는 에레스 교, 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제국 내의 다른 종교들은요?"
궁금해진 듯 아시엘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딱히 핍박받진 않지만 그래도 언제 두 변덕쟁이 수장들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중립 신전끼리 대충 연합을 맺고 있어. 현재 수장은 바람의 여신 헤스티아 교의 대사제고."
루이스의 설명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아시엘은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그 신전들 사이에도 긴장감이 돌고있다 이거야. 이 제국의 국교로 인정받기 위해서 각자 편을 정해 줄을 선 거지. 뭐,그건 그냥 그렇다고 해 두고.. 너희들한테는 정치판 상황보다는 기사단이 뭘 하는지가 더 도움되는 정보겠지?"
자신의 포도주잔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아시엘이 마시던 잔을 들고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일단 셀레니스 기사단은 조금 특이해. 그곳에 입단하는 순간 남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귀족의 지위는 사라지게 된다. 그 대신 '셀레니스'로서의 권리와 지위가 생기지."
"무슨 말이에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아시엘이 되물었다.
"그러니까-어.. 그럼, 카이스를 예로 들어볼까. 카이스는 백작가의 삼남이지."
끄덕끄덕.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미안하지만 현 메르티스 백작이 갑자기 급사 한다고 치자. 지금 백작은 카이스의 첫째 형이지. 그런데 아무런 유언도 없이 죽는다면 백작의 지위는 둘째 형에게, 카이스에게는 일부의 재산이 유산으로 남겠지."
여기까진 이해했지? 하는 교수같은 표정으로 학생들을 휘 둘러본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좋아. 하지만 카이스는 셀레니스 기사단이야. 그러니까 유산은 한 푼도 물려받을 수 없는거지. 그리고 만약 둘째 형도 죽고 남은 건 카이스 뿐이야. 그렇게 되면 선택해야해. 기사단에 남든지, 아니면 기사단을 나가 가문을 이을지."
"..뭔..가 어렵네요. 왜 그런거에요?"
레이가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루이스는 손짓을 하며 대꾸했다.
"당연히 다른 귀족의 힘을 차단하기 위해서지. 하지만 그 대신, 셀레니스의 이름은 이름 자체의 지위를 가진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후작 이하의 권력을 가질 수 있어.자,다음은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
헙,하며 레이가 숨을 삼켰다.
"루아 이클립스는 셀레니스와 반대로 완전한 계급주의야. 계급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물론, 그 단원이 속한 가문은 지위가 한단계 더 향상되지.예를 들어 후작가의 아들이 기사단에 들어간다고 치자."
아시엘의 포도주로 한번 더 목을 축인 교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가문은 아들 잘 둔 덕에 후작의 이름으로 공작가와 비슷한 위치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거야. 만약 돈이 많은 평민의 아이가 들어가게 된다면 거의 귀족 취급을 받을 수 있는거야."
그 말에, 레이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하지만 내부의 규범이 엄격해. 내가 있었을 때랑 같다면, 셀레니스는 아주 자유분방한 분위기지만 루아 이클립스는 굉장히 딱딱하다고 해야 하나. 서열 구분도 엄격하고. 쨌든 그래.설명 끝!"
후련하다는 듯 박수를 한 번 짝,치며 루이스는 말을 끝맺었다.
"아니 근데,아저씨."
"응?"
루이스는 옆에서 턱을 괴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거 다 어떻게 알았어요? 옛날에 황제 폐하 옆에 있어서?"
"아-"
그의 물음에 모두다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거야.."
꿀꺽. 세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셀레니스 기사단은 라이펜 그자ㅅ...아니, 그러니까 황제랑 내 합작품이니까."
"하아-"
피곤한 듯 한숨을 푹 내쉰 아시엘은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먼저 샤워할게."
그 꼴을 보고는 곧 움직일 것 같지 않자 카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지금은 황제의 곁을 떠나 있지만 친한 친구 사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었다.
세 사람이 당황한 줄도 모르고 그 선언 후에 황제의 뒷담을 얼마다 해대는지. 역대 최고의 수완가 황제라고 칭송받는 그의 험담을 늘어놓는 그를 바라보며 아시엘은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새삼 루이스의 쪼잔함에 대해 느낀 그들이었다.
본격적으로 맥주 한 잔까지 따로 주문해 술기운까지 더해져 주절거리는 루이스를 겨우겨우 돌려보내고 두 사람은 방으로 올라 온 것이다.
"아시엘."
"왜애?"
잠깐 상념에 잠겨있던 아시엘은 카이스의 부름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오늘 야시장 열리는 날인데."
벌떡! 바로 몸을 재빨리 일으키는 친구를 카이스는 피식 웃으며 바라보았다.
"갈 거지?"
"당연하지!"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덕이는 아시엘에게 카이스는 가방에서 후드 달린 망토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준비해,바로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