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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6화 (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야시장에서(2)

야시장의 밤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달마다 한 번씩 열리는 야시장은 밤의 어둠과 침묵을 몰아내고, 대신 빛과 활기찬 소리들로 번화가를 들뜨게 만들었다. 여러 악세사리점, 서점, 무기상 등이 자리를 잡아 천막을 치고 저마다의 불빛을 비추며 호객행위를 했다. 이 날은 제국의 각지에서 여러 상인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헐값에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이 야시장의 묘미였다.

"카이! 빨리 가자!"

"알았어, 서두르지 마."

카이스는 빨간색 후드를 쓴 자신의 조그만 친구를 놓치지 않으려 걸음을 빨리했다. 즐거운 듯한 발걸음으로 가볍게 사람들 사이로 섞여든 그들은 곧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나란히 걸으며 야시장의 활기찬 기운을 만끽했다.

"역시 서점부터 갈 거야?"

"당연하지!"

카이스의 물음에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가끔 고물상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섞여 희귀본 책이 한 두권 쯤 매물로 나와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어느 새 살짝 카이스에게서 떨어져나갔던 아시엘은 양 손에 하나씩 꼬치구이를 들고 하나를 친구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

"빠르기도 하다. 고마워."

카이스가 피식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자 아시엘도 웃어보이고는 자기 몫을 고쳐쥐고 한 입 베어물었다.

"아 참, 우리 검도 장만해야지."

"왜?"

우물거리며 아시엘이 말하자 카이스는 그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그에 그래,검! 하고 한번 더 힘주어 말한 그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마지막 대련하다가 우리 둘 다 가검 부숴먹었잖아."

입학과 함께 지급받았던 가짜 검을, 두 사람은 졸업 몇일 전의 대련 중에 부러뜨렸던 것이다. 6년동안 써 너덜너덜해 진 가검은 두 소년이 힘차게 격돌하자 마자 부러져 버렸다. 웬만하면 부러질 일이 없는 검이었기에 그것을 지켜보던 한 교수의 눈은 휘둥그래졌고 결국 그 날의 대련은 아시엘 3승 카이스 2승 무승부 1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아저씨도 진검 하나쯤은 장만하라고 했잖아."

"아 맞다. 그런데 돈은 있어?"

"응. 아저씨가 마지막 용돈이랑 검 값이라면서 두둑히 주셨어. 이때까지 모은 돈이랑 합해서 80골드쯤?"

"그정도면 검이랑 책도 살 수 있겠네."

도둑맞지 않게 조심해, 하고 덧붙인 카이스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16살이지만 외견은 한 14살 쯤 되어보이는 이 친구는 좀도둑들에게 쉽게 표적이 되는 터였다.

"걱정 마,걱정 마! 평소처럼 봐주진 않을 거니까."

물론 그렇게 되면 소매치기만 험한 꼴을 당할 테지만. 보통은 모른 척 하고 넘어가주지만-저것들도 먹고살려고 하는 짓일 거 아니야, 라는 것이 속편한 아시엘의 희안한 지론이었다-오늘같이 거금을 들고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카이스는 어느 새 신나서 앞서가는 아시엘을 또 한 번 바라보고 책을 파는 노점을 찾기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때였다. 어느 악세사리를 늘어놓은 노점에서 붉은 색 물방울모양 귀걸이가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아."

몇 년 전부터 유독 오른쪽 귀에만 귀걸이 몇 개를 번갈아 끼고 다니는 아시엘을 떠올린 그는 다시 앞서가는 빨간 망토 소년을 힐끗 보고 조용히 그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어?"

여기저기 한눈팔며 앞으로 나아가던 아시엘은 어느 순간 카이스와 헤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췄다.

"놓쳐버렸나?"

뒤돌아서서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곧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그냥 가도 되지만 더 멀어져버리면 나중에 곤란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찾으러 돌아가도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를 찾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떡하지?"

잠깐 멀뚱멀뚱 서있던 그는 결국 돌아가보기로 하고 한 걸음 발자국을 뗐다. 그때, 툭. 사람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소년 하나가 아시엘을 치고 지나갔다. 흐음, 고개를 갸웃한 아시엘은 살짝 발을 앞으로 내밀어 그 소년의 발을 걸었다. 터억!

"으악!"

쿠당탕탕탕! 제대로 들어갔는지, 소년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넘어져버렸다. 그는 모자를 꽉 쥐고 상체를 일으키고는 고함을 빽 질렀다.

"크윽...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라니, 이쪽이 할 말 같은데."

아시엘은 허리를 숙여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아이는 후드 아래로 보이는 처음 보는 붉은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다 곧 들려오는 웃음기 섞인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돈 주머니, 내놓지 그래?"

"내가 미쳤다고 주냐? 돈 아까운 줄 알면 애초에 이런 곳에 혼자 돌아다니면 못 쓰지, 꼬마 도련님."

소년은 꾀죄죄한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 담아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아시엘은 가소롭다는듯,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꾸했다.

"그래, 그렇게 잘났다면 지금 벌떡 일어나서 도망가 보던가."

"그렇게 말 하면 내가 못 갈줄 알아?"

소년은 빽 외치고는 아시엘을 걷어차고 도망치려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 어라? 당황하며 소년이 꼼짝도 하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이리저리 비트는 것을 본 아시엘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꼬마 어쩌고 할 시간에 도망을 갔어야지."

"이, 이게 뭐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공포에 질린듯 소년이 바락 바락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시엘은 미소지으며 그대로 무시하고 그의 윗옷에 손어 자신의 주머니를 되찾아 다시 품에 갈무리했다.

"먹고살려고 이 짓 하는 건 아는데 이 돈은 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간단한 포박 마법이지."

빽 고함을 치는 아이에게 대꾸하며 그는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다시 소년에게 씌워주었다. 마법, 마법이라고! 배운 것이 없어도 그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소년의 눈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죄, 죄 ,죄송합니다! 부디 자비를! 죽이지 말아 주세요!"

"다음부터 이런 짓 안 할거라고 약속하면."

아시엘은 후드를 뒤로 젖히며 빙그레 웃었다. 그제야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나자 소년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하얗고 앳된 얼굴은 순간 눈을 의심할 정도로 고왔다. 뺨을 감싸는 금발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아시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멍하니 앉은 소년을 재촉했다.

"약속하면 풀어 준다니까?"

"아, 아, 네..."

소년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좋아, 하며 손가락을 탁 튕겼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무형의 기운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감각에 소년은 얼떨떨하게 손을 들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했다. 아시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멍청히 앉은 채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에게 바싹 다가갔다.

"많이 도와주진 못하지만."

아시엘은 주머니를 뒤져 은화 하나를 꺼내 소년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소년은 시선을 들어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프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거리에서 굴러봐서 알아. 그러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말고. 병 주고 약 준다고 욕해도 뭐라 할 말은 없어."

"......."

소년은 얼이 빠져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어버버, 멍청한 소리를 냈다. 아시엘은 소년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떠나려는 찰나 소년이 벌떡 일어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나리!"

"나리같은거 아니야. 안 빼앗기게 조심하고."

아시엘은 어색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그를 등지고 그 자리를 떠났다. 소년이 아주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등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는 모를 일이었다.

아시엘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다시 카이스를 찾는데 열중했다. 중간중간 다른 곳에 한눈을 팔아가며 얼마쯤 걸었을까, 그는 한데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싸움이라도 난 건가.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냥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몸을 틀려는 순간 그의 예리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잡혔다. 당황한 듯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아마 그 무리의 가운데. 어쩌지- 하는 고민도 잠시. 아시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그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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