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8.야시장에서(4)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구경꾼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사람들이 약간 비켜서더니 2명의 남자가 당당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시엘과 렌 그리고 그 주정뱅이가 대치 중인 중앙의 빈 공간에 들어왔다.
뭐야,누구지? 아시엘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잊고 멍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낀건지, 난입한 둘 중 한 남자가 아시엘에게 살짝 한쪽 손을 들어보이며 싱긋 웃어보였다.
"윽....?"
아시엘이 저도 모르게 진저리치며 시선을 피하자 남자는 잠시 의아하단 표정을 얼굴에 띄우더니 곧 피식 웃어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의 술주정뱅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봐요, 형씨. 그 나이 먹고서 이런 꼬마 아가씨를 괴롭히고 싶습니까?"
아까 아시엘이 하던 것 처럼 짝다리를 짚고 건들건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느 새 치밀어오르던 화도 잊어버리고 머리회전이 스톱해버린 아시엘은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불쑥 마른수건을 내밀었다.
"엥?"
"쓰도록. 감기 걸린다."
언제 다가왔는지, 또 다른 키 큰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시엘은 아, 네.. 하고 얼떨결에 수건을 받아들고 말았다. 곁에 서 있던 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시엘 씨. 춥진 않으세요?"
"괜찮아요."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끈적한 술에 젖어 찝찝하긴 하지만 훈련된 몸이라 춥지는 않았다. 빌린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아시엘은 다시 주정뱅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당황했던 주정뱅이는 곧 정신을 차렸는지 너 뭐야! 라며 눈앞의 연한 갈색 톤 머리의 남자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남자가 2명이 개입해 온 시점에서 수적으로 밀린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주춤거리는 기색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에 반해 그의 정면에 서 있는 젊은 미남자는 여유만만이었다.
"저? 지나가는 행인 1이었는데 왠 아저씨가 예쁜 아가씨를 괴롭히는 걸 목격해버려서. 정의의 기사 정도라고 해 두지."
아가씨? 무슨 소리지? 아시엘이 고개를 갸웃 하는 순간, 그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또 아시엘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왠지 아까처럼 소름이 돋는 느낌에 아시엘은 모르는 척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시엘에게 수건을 건네줬던 블루블랙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인상이 차가워 보이는 남자가 하아ㅡ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사람을- 제르닌, 이라고 불렀던가.'
아시엘은 살짝 기억을 더듬으며 그-차가운 인상의 남자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갈색 머리의 남자도, 이 앞의 제르닌이란 사람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답네, 이런 걸 호감형이라고 하는 건가. 잠깐 그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주정뱅이 사내가 고함을 쳤다.
"웃기고 자빠졌네! 이래서 오지랖 넓은 것들은 안 된다고. 애송이들 주제에 어디를 끼어들어?"
"아저씨, 술 먹었으면 그냥 집에 가서 주무세요. 여기서 이렇게 행패부리지 말고."
그가 으르렁거리자 다시 고개를 바로 한 갈색머리 남자는 타이르듯 술고래를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답답했던 것일까. 제르닌이라고 불린 남자가 결국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 실랑이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라서 저 비리비리한 청년이랑 허여멀건 꼬마를 괴롭히고 있었던 거냐."
"야, 제르닌!"
"가만히 있어, 루이카엔."
그 주정뱅이와 정면으로 맞서던 남자- 이름이 루이카엔인듯 했다- 가 작게 항의했지만 제르닌은 인상을 팍 구기며 그를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는 멍청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 다시 또박또박 말을 반복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저 꼬마들을 괴롭히는 건지 물었다."
한 단어씩 일부러 딱딱 끊어서 말하는 낮은 목소리에는 신경질이 배여나오고 있었다. 이런 귀찮은 상황에 끼어들게 한 루이카엔이나 행패를 부리는 주정뱅이 때문에 짜증이 난 듯했다.
"저 놈이 내가 지나가는데 부딪혀서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그런데 저 꼬만지 계집앤지가 끼어들었다고!"
긴장한 듯 목소리까지 갈라지며 주정뱅이가 말하자 제르닌의 옆에서 루이카엔이 갈비뼈? 하고 어이없는 듯 소리내어 되뇌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있어,라며 다시 조용히 시킨 제르닌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귀하의 갈비뼈가 부러졌단 말인가."
"..그래."
"그래?"
그리고 그 다음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퍼억! 제르닌은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의 주먹을 주정뱅이의 푹신한 배에 꽂아넣었다.
"크억!"
아시엘은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허리를 푹 숙이고 곧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잘 쉬지 못하겠는지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가 고통스럽게 배를 부여잡고 있는데, 제르닌은 아무런 변화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용병인 것 같은데 방금의 일격으로도 귀하의 갈비뼈는 부러지지않았다."
"....!"
"하물며 저 가느다란 청년이 부딪혔다고 해서 당신의 갈비뼈가 부러질 수가 있겠는가."
차마 대꾸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남자를 차갑게 내려다보던 제르닌은 만족했냐, 하는 듯 한 눈빛으로 루이카엔을 바라보았다. 루이카엔은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오, 좀 과한 것 같지만 나이스, 제르닌. 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이제 일 끝났으니까 돌아들 가 보라고요."
그가 손을 마구 휘젓자 구경꾼들은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도 빠르게 흩어져갔다. 차차 밀도가 낮아져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아시엘은 그 틈바구니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혔다.
"카이!카이스!"
눈치를 보아하니 그 역시 아시엘을 찾고 있었던 듯 했다. 카이스는 안도한 표정으로 빠르게 아시엘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까이에 온몸에 독한 술냄새를 풍기며 푹 젖은 친구를 보고 인상을 와락 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꼴은 이게 또 뭐고."
"약간 좀 트러블이..하하. 별일 아니야."
아시엘은 미안하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카이스는 그의 뒤쪽에 낯익은 청년, 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그러니까, 종업원.."
"렌이에요. 곤란했는데 아시엘 씨가 도와주셔서.. 그리고 저분들도."
렌이 미안하다는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카이스의 뒤쪽으로 눈짓했다. 그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대로 시선을 돌렸고, 바로 곁에 서 있던 루이카엔과 눈을 딱 마주쳤다.
"여, 안녕."
루이카엔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잠시 상황파악이 안 돼 그와 그 옆에 있는 남자, 제르닌을 번갈아 보던 카이스는 최대한 무례하지 않게 하지만 무뚝뚝하게 물었다.
"저...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