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야시장에서(7)
제르닌이 거침없이 문을 열자 오랫동안 기름칠을 안 한 나무 이음매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영감- 영감!"
그의 뒤를 따라 주춤거리는 루이카엔 그리고 아시엘과 카이스도 어두운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확실히 사람이 있긴 한 듯,낡은 마룻바닥에는 먼지가 거의 앉지 않았다. 하지만 각종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듯한 진열대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채 먼지가 보얗게 앉아있었고 벽에 걸려있는 기다란 장검 같은 것들에도 거미줄이 쳐져있었다.
그마저도 다시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나자 스며들어오던 달빛이 차단되어 완전히 깜깜해져버리고 말았다.
"쳇... 어이, 영감!"
어둠 속에서 혀를 차며 제르닌은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쥬토 영감!"
"혹시 안에서 쓰러지신 거 아녜요?"
오랫동안 답이 없자 아시엘이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죽여도 안 죽을 거 같은 영감인데."
투덜거리는 듯 한 그의 말은 흘려버리고 아시엘은 안쪽을 향해 살짝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드디어 안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고 생각했을 때. 어둠 속에서,무언가가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휘리리리릭!쉬익!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아시엘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저것을 피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히이익!"
그가 기겁하고 몸을 살짝 틀자마자 곧 등 뒤의 벽에 푹, 하고 무언가가 박히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엘은 하,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런 그에게 나머지 이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낡은 벽에 기세좋게 꽂힌 단도를 보고 루이카엔이 질린 얼굴을 했다.
"와..영감, 별로 안 반길 건 알았다만 단도를 던져?"
"괜찮아?"
걱정하는 카이스의 목소리에 아시엘은 후덜덜덜 떨며 겨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이,영감!안에 있지?"
마지막으로 제르닌이 안쪽으로 한번 더 소리를 치자 그제야 불이 켜졌다. 그리고-정확히 단도가 날아온 방향에서 체구가 왜소한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하다니, 용하구만."
아무렇지도 않게 칭찬 아닌 칭찬을 한 노인은 아시엘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서는 벽에 박힌 채 아직도 푸르르 떨고있는 단도를 뽑아 품 안에 넣었다. 그런 그를 보며 루이카엔이 황당하다는 듯 따졌다.
"피하다니,라니. 맞출 생각이었어?"
"넌 어른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루이카엔. 그리고 할일없는 늙은이가 장난질 좀 친 거 가지고 그렇게 나무랄 셈이냐?"
노인은 고함을 치며 손에 쥔 지팡이를 번쩍 들고는 루이카엔의 정수리를 따아악, 후렸다.
"크아아악!!아프잖아요!"
"그럼 아프라고 때렸지 살찌라고 때렸겠냐? 무식한 놈."
또다시 대드는 루이카엔을 한 마디로 눌러버리고는 그에게서 매정하게 등을 돌려버린 노인은 그 날카로운 눈매로 아시엘과 카이스를 살피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전에 이 약해보이는 늙은이에게 칼침을 맞을 뻔한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키며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노인은 제르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제르닌 꼬마, 내 가게까진 또 왜 온거냐?"
"아."
본래의 목적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듯 아시엘은 그제야 박수를 딱, 쳤다.
"검 보러 왔어요."
"역시 그렇지. 무기상에 그거 말고 무슨 볼일이 있겠누.어떤 검?"
노인의 질문에 아시엘은 잠시 고민하고는 대답했다.
"얇고 가벼운 검..세검이요."
"레이피어..그렇군. 네놈은?"
"무거운 롱소드."
카이스도 답하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한 눈치더니 곧 따라와,하고는 그들을 가게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가 잠시 후 멈춰선 곳은 진열대 앞이었다.덮힌 천을 훌렁 벗긴 노인은 대충 그것들을 훑어보다 세검 하나를 집어들고는 아시엘에게로 던졌다.
"잡아라."
"네? 아!"
황급히 공중에 붕 떠있는 레이피어를 붙잡은 아시엘은 어리둥절하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하아. 휘둘러 봐."
"아.."
답답한 한숨을 푹 쉬며 노인이 말하자 그제야 알아들은 그는 익숙하게 한 손으로 검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오~폼 나는데?"
루이카엔의 탄성을 뒤로 하고 아시엘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사선베기를 했다. 부웅, 부웅. 공기가 깔끔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고 마지막으로 찌르기를 한 아시엘은 잠시 그 자세로 멈춰 서 있다가 몸을 바로했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 보통의 레이피어 보다는 무거우면서도 단단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도신은 붉은기 섞인 금빛으로, 틀에 부어 만든 건지 이음매가 없는 검자루 역시 금빛에다 붉은 색 보석이 박혀있었다. 멍하니 검을 살피는 그를 보며, 노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떠냐. 예쁜 놈이지? 네놈이랑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다.아주 오래 전 내가 만든거지."
"아..마음에 들어요! 손에도 딱 맞고..그냥 레이피어는 솔직히 너무 가볍거든요."
아시엘은 환하게 웃으며 도신을 만지작거렸다. 매끄러운 검날이 빛을 반사시키며 살짝 금빛으로 빛났다.
"그럼 그걸로 할테냐?"
"네."
한번에 맞췄군. 노인은 만족스럽게 중얼거리고는 카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롱소드라고?"
"예."
어디보자..하며 노인이 검 무더기를 뒤지기 시작했다.그러기를 몇 분. 노인의 옆에 점점 검들이 쌓여갈 무렵, 그는 마음에 든 것을 찾았는지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 오른쪽 손에는 보통 롱소드보다 조금 더 길고 폭이 좁은 검이 들려 있었다.
"자.옛다."
카이스는 노인이 건네는 것을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묵직한 무게감과 키가 큰 카이스에게 딱 맞는 검신. 꼭 맞춘 것처럼 기분 좋게 다가오는 육중함이 마음에 든 그는 곧 양손으로 검자루를 잡고 자세를 잡았다. 부웅! 아까 아시엘의 빠른 움직임과는 다르게 강하고 확실한, 무거운 일격이 공기를 양단했다. 이번에도 역시 루이카엔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았다.
"호오.. 이쪽도 멋진데?"
"그래,넌 어떠냐?"
"..저도 이걸로 하겠습니다."
노인의 말에 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인지 그는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노인에게 정중히 검을 건넸다.
"검집은 알아서 찾아. 기존에 나오는 검이랑은 다르니 맞는 검집도 잘 없을거다. 돈은 필요 없다."
"네?!"
뜻밖의 말에 아시엘과 카이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어보였다.
"어차피 네놈들 아니면 쓸 사람 없는 녀석들이다.이제라도 주인을 만나 다행인거지."
"하지만.."
아시엘이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그런 그를 루이카엔이 말렸다.
"포기해. 이 영감 고집 장난 아니거든."
"시끄러! 이놈아."
노인은 한번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검집 가지고 얼른 꺼져! 라며 그들을 재촉했다. 루이카엔은 빙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들었지? 챙길 거 챙겨서 나가자고."
"챙길 거 챙겨서 나가자니..꼭 도둑같잖아요."
아시엘은 황당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검집을 찾아 들었다. 카이스 역시 마찬가였다. 그 때,한번 더 불호령이 떨어졌다.
"안 나가고 뭐해, 이놈들아!"
"거참, 성질 더럽게 급하네. 나가요, 나가!"
귀를 막아보이는 시늉을 해보인 루이카엔의 등을 노인은 마구 떠밀었다.
"얼른 꺼져, 잠좀 자자."
"우앗,영감님 밀지 말아요!"
잠시 반항 아닌 반항을 해 본 그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추운 바깥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철컥! 네 사람 모두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낡은 문은 매정하게 잠겨버렸다. 거 너무하시네,라며 문을 째려보던 루이카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아시엘과 카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리들은 이대로 야시장에 돌아갈거야.너희들은 어쩔래?"
"아. 저흰 이만 여관으로 가야 할것 같아요. 아까 일 때문에 좀 찝찝하기도 하고."
아시엘의 그렇지,하는 눈빛을 본 카이스 역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시엘은 조금 아쉬운듯 앞머리를 긁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여기서 작별이네요."
"그럼 저흰 이만 가 보겠습니다."
카이스도 아시엘을 따라 간단하게 묵례했다. 그리고 두 소년은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점점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이카엔은 입맛을 쩝 다셨다.
"씁, 갔네. 매정한 것들. 아까 검 쓰는 거 보니까 둘다 제법이던데. 저런 애들이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
루이카엔이 한탄 비슷하게 말하자 드물게도 제르닌이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루이카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다시 야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