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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2화 (12/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재회(1)

이 곳은 세튼 제국의 황제들이 대대로 서류에 파묻혀 머리를 쥐어뜯던 집무실. 선대와 마찬가지로 서류를 붙잡고 골머리를 앓던 세튼 제국의 32대 황제 라이펜 디아란 세튼은 밖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콰앙! 곧 집무실의 멋들어진  문이 우악스럽게 열리고 황제폐하를 부르며 보좌관 페이튼이 쳐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허둥대?"

자연히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꼴은 심각했다.어찌나 급하게 달려왔으면 항상 단정하던 그의 흑발은 다 헝클어져있었고 외알 안경은 코밑까지 내려와 덜렁거리고 있었다.

보통이면 함부로 들어온 것에 대해 한마디 해 줄 테지만 그의 모양새를 보니 그럴 때가 아닌 듯 하다. 보좌관 페이튼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빠르게 자신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안경을 똑바로 올렸다.

"황제폐하, 큰일 났습니다!"

"그러니까 큰일 뭐?"

이제 라이펜의 목소리에는 약간 의아함마저 담겨 있었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페이튼은 한번 더 숨을 고르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누가 돌아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지 황제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깨달은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거의 발작적으로 외쳤다.

"루이스 아르셰인 님이 돌아오셨다고요!!"

"...뭐?"

쿠당탕! 황제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하지만 그것조차 깨닫지 못한 듯 라이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진짜?"

"진짭니다! 지금 문 밖에 계신다구요."

눈을 휘둥그레 뜬 라이펜이 책상을 손으로 꽈앙, 치며 빨리 데려와! 하고 외치자 페이튼은 대답도 안 하고 총알처럼 밖으로 달려나갔다.아니, 나가려고 했다.

콰앙!! 하고 기다리다 못한 루이스가 직접 문을 열어제끼기 전까지는.

"아.."

라이펜과 페이튼은 황소같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쳐들어온 루이스는 눈앞에 멍해진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에게 거침없이 다가서서는-덥썩.

"라이펜,이 미친 놈아!"

멱살을 잡아올렸다.

"하.. 하하.. 오랜만이네, 루이스... 이거 좀 놔주면.."

"안녕 좋아하시네. 야, 황성 뒤쪽 성벽.아주 박살이 났더라? 네놈 짓이지?"

"잠, 잠깐. 말할테니까 놔. 켁,켁.놔달라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페이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 누가 이들이 제국 최고의 기사와 엄청난 수완가 황제라고 생각하겠는가. 험악한 얼굴로 라이펜을 짤짤짤 흔들던 루이스는 친구의 얼굴이 거의 사색이 되어서야 놓아주었다.

"거의 10년만에 쳐들어와서는 멱살부터 잡고.. 너무하네."

툴툴거리며 옷매무새를 정리한 라이펜은 뒤로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도대체 9년 8개월동안 어디서 뭘 한거야?"

그동안 간간히 짧은 편지만 보내오고 완전히 잠적을 해버린 친구에 대한 섭섭함일까. 라이펜의 금빛 눈동자에 언뜻 원망이 스쳐지나갔다.그것을 눈치챘는지 루이스는 미안한 듯  지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여러 일이 있었지. 그 전에.성벽 어쩔거냐고,성벽!"

그러다 말투를 바꿔 다시 고함치는 그. 잠시 잊고 있다가 다시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에 라이펜은 귀를 파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거? 내가 한 거 맞아. 새로 개발한 폭탄의 위력이...커헉! 잠깐만!"

"내가 이걸 그냥..!"

콰악! 결국 다시 멱살을 잡힌 라이펜은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나서야  억센 손아귀어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 참. 그럴 시간에 일이나 해! 화약 나부랭이 좀 그만 만지작대고. 다치면 어쩌려고.."

그걸로도 부족했던지 잔소리를 한바탕 더 퍼부은 루이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손님용 소파에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른 라이펜은 다시 옷과 을 정리하고 자리에 똑바로 앉아 분위기를 바꿔 물었다.

"그래서. 진짜 그동안 루카인 아카데미에서 뭘 한거야? 갑자기 교수 임명장을 보내달리고 하질 않나."

"뭐 좀 알아본다고."

마침 페이튼이 차와 과자를 두 사람 앞에 내려놓자 라이펜은 잠깐만.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페이튼, 나가봐도 좋아. 기왕이면 문 좀 잠궈주고."

"네."

철컥. 문이 닫히고 보좌관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라이펜은 다소 신경질적 으로 입을 열었다.

"야,너 부재중인거 숨긴다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그래그래. 수고했다."

루이스는 황제의 최측근 중 한 명. 그래서 부재중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문제가 생길 게 뻔하기 때문에 라이펜과 그의 측근들은 그것을 숨기느라 땀을 깨나 쏟아야 했다.

그러다가 루카인 아카데미 추천장을 써달라는 말에 인재 육성이라는 임무를 명분으로 공식적으로 자리를 비웠다는 핑계를 댈 수 있게 되어 황제는 거의 기쁨의 눈물을 뿌리며 당장에 들어줬던 것이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루이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11년 전에 그 일 기억하지? 마을 하나가 완전히 초토화됐었던."

"아.."

라이펜에게 11년 전 사건이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루이스는 말을 이었다.

"그 바로 옆에 하노빌 백작의 영지가 있잖아. 그것도 알지?"

"응."

하노빌 백작 이라는 말에 황제는 얼굴을 약간 굳혔다.

그는 대공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뒷동네의 사업에 손을 대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그 아들은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의 단원이었다. 그런데 그의 영지에 무슨 일이?

"10년 전..그러니까 그 사건 조사하러 갔을 때 하노빌 영지에 잠시 들렀어.그런데 거기에서.."

말을 잠시 멈춘 루이스는 말하기가 꺼려지는 듯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라이펜의 시선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하급 마족이 소환된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뭐?"

뜻밖의 엄청난 말에 경악하며 라이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충격에 차가 쏟아져 옷을 적셨지만 뜨거움조차 느낄 수 없는 듯하다.

"야, 야 진정해. 근거라고 해도 나 역시 옛날 고문서에서 우연히 읽은 것 뿐이니까.."

루이스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앉히고 수건을 내밀었다.하지만 라이펜은 젖은 옷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자신의 연두빛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마족 소환.. 그게 진짜라면 큰일인데..야, 루이. 그 근거라는 게 뭐야?"

하아-하고 한숨을 쉰 루이스는 비어버린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푸르던 숲 한 가운데에 직경 100m인 원이 생겼어. 아무 풀도, 나무도 자라지 않는.. 거기다 그 11년 전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가까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는군. 증상도 가볍고 아무도 죽지 않아 신고는 안했다지만.."

그가 말끝을 흐리자 라이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마족과 관련된 것이라면 흑마법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흑마법은 아주 오래 전에 금지된 터였다.

마족을 소환해 계약에 성공하면 그 계약한 마족의 힘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순수 마력만을 사용하는 마법사와 다르게, 마족의 마력을 빌린 흑마법사는 평소에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높은 경지에 이르면 마족 고유의 탁한 기운까지 가질 수 있다.

이렇게 강력한 흑마법을 금지한 이유는 단 하나.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몸과 마족의 몸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 억지로 마족의 힘을 몸에 가둔 흑마법사는 점점 미쳐가고, 망가져간다. 거기다 옛날부터 마족이 소환된 지역에는 마기 때문에 전염병이 돌거나, 몬스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거나  하는 이상현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었다.

게다가- 마족은 인간의 영혼을 조건으로 소환에 응한다.하지만 고위급이 될수록 원하는 영혼의 수가 많아지고 그에 여러 명의 산제물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곁을 벗어나 있을 수 밖에 없었던거야. 황제의 최측근이 흑마법에 대해 들쑤시고 다녔다는 게 알려져봐라. 난리날걸?"

분위기를 바꾸려 루이스가 장난스럽게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라이펜은 여전히 굳어진 얼굴이었다.

"야,루이. 근데 이거 10년 전에 발견했다면서. 왜 진작 말 안했냐?"

"그때 한창 '그 사건'으로 바빴을 때잖아. 네놈한테 이것까지 말했으면 너 미쳐버렸을걸."

흑마법은 금지되었지만 아직까지 그 존재감을 숨기지 않았다. 공공연히 아직도 흑마법사가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서민들 사이에 돌고 불법적으로 흑마법에 대한 책도 몰래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혀를 한 번 쯧, 찬 라이펜은 오랜만에 와서는 이런 이야기만 전해준 루이스를 잠시 흘겨보고는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거 조사하는 데 10년이나 걸린거야? 별로 알아낸 것도 없구만."

"하하.. 별로 알아낸 거 없어서 미안하네.. 사실 나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뜻밖의 걸 주워버려서 말이지."

루이스가 이미 식어버린 차를 마시며 대꾸하자 그는 뭘 주워? 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그 하노빌 영지에 한 번 더 갔었거든..조사차로. 그 때 고아 꼬맹이 하나를 주웠는데, 도저히 그놈을 혼자 두고 돌아올 수가 없어서말이야."

"꼬마? 어린애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던 놈이?"

헐.그의 말에 라이펜이 아연실색했지만 루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그랬던가? 어쨌든 오늘 돌아온 것도 내 '아들' 때문이야."

"아, 아들?"

친구가 된지 20여 년. 라이펜은 처음 보는 루이스의 부드러운 얼굴에 거의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아들'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친구의 이상상태에도 루이스는 그저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네놈 아들, 유트리안보다 1살 적을걸?"

"그... 그래?"

"우연히 검을 가르쳐 봤는데 제법인거야. 거기다 노력파지. 그래서 루카인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다. 올해 졸업했어."

겨우 평정심을 찾은 라이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겨우 물었다.

"그런데 그녀석 때문에 돌아왔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그게, 그 녀석이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거든.그래서.."

그까지 이야기를 들은 황제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 역시 루카인 아카데미의 전통을 아는 게 당연했다.

"설마.."

"어. 셀레니스 기사단에 입단한대. 말리고 싶었지만 뭐..지가 좋다는데 어쩌겠냐. 그래도 쓸모는 있을거야."

"아.."

그런 확답이 루이스의 입에서 나오자 라이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절친의 아들, 이라고 하기는 묘하지만 어쨌든 루이스가 보장하는 인재였다. 나이가 좀 어린 게 흠이지만 그런 아이가 자신의 직속으로 들어온다면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 아들에 루이스가 푹 빠져 있는 듯 하니 그 녀석을 인질으로 잡으면..

"으흐흐."

"아, 맞다. 혹시나 말하는데. 부려먹는 건 상관없지만 내 핑계로 괴롭히면 죽는다."

"쳇, 들켰네."

진짜 죽을래? 루이스는 무섭게 웃으면서 라이펜의 코앞에 주먹을 들이밀었다가 거뒀다.

"..가끔 욱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착한 녀석이야.머리회전도 빠르고."

"그래?그거 기대되네."

라이펜은 싱글벙글하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루이스는 눈썹을 찌푸리고 슬금 몸을 뒤로 뺐다.

"뭐,뭐야? 징그럽게."

"아니. 아무것도."

라이펜은 여전히 기분 좋게 빙글거리며 친구를 응시했다. 기분 나쁘니까 얼굴 치워. 싫은데, 싫은데! 그런 일련의 대화가 오간 후에도, 둘의 담소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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