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재회(2)
루이스가 황제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고 있을 때, 처음으로 황성의 내벽 안에 발을 들인 아시엘과 카이스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혀있었다. 아카데미를 다닌 6년 내내 수도 헤크란의 중심부에서 살았지만 항상 멀찍이서 외벽만을 바라보며 저 안은 어떨까, 하고 상상한 것이 다였던 그들이었다.
"..멋지다."
차오르는 모든 말을 삼키고 겨우 아시엘이 뱉아낸 말은 그것이었다. 카이스 역시 일절 의이 없다는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 그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황제의 궁은 웅장했다.
굉장히, 라는 말로 다 표현이 되지 않을 만큼 넓고 광대한 내벽의 안쪽. 정면으로 보이는 본궁의 입구에 다다르려면 아시엘과 카이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도 20분은 걸릴 듯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새하얀 돔 형식 지붕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대리석 축조물의 위풍당당함은 생생하게 다가왔다.
황제의 취향대로 꾸며진 정원 역시 화려한 것 보다는 우아했고 군데군데 장식되어있는조각상 하나하나 역시 너무나 섬세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 난 내가 평생 살면서 내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하긴 그럴 만도 했지.. 일반인들 한테는 외벽 안까지만 출입이 허용되니까."
오랜만에 카이스가 긴 문장을 내뱉자 생긋 웃으며 아시엘이 대꾸했다. 출입이 허락된 것은 남작 이상의 귀족들과 업무상 드나드는 하인들, 그리고 황제나 대공이 직접 출입증을 내어준 상인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경비가 꽤 삼엄하네.'
아시엘은 성벽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를 올려다보았다. 지루한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마침 아시엘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이며 눈인사를 했다. 아시엘도 한 번 마주 웃어주고는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료를 한 움큼 안고 바쁘게 오가는 말단 관리들과 분수대 근방에 앉아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 한 귀족 그리고 수하들을 데리고 무언가 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 마치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듯 한 분위기였다. 굉장하네, 다시 속으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아시엘의 귀에 문득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지죠? 초대 황제께서 하얀색을 좋아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건물도 온통 백색이죠."
"......!"
아시엘과 카이스는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황궁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빠진 탓에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새하얀 제복. 그리고 그 가슴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을 닮은 문양이었다.
"아..놀랐어요?"
그는 미안하다는듯 눈꼬리를 휘었다. 잠시 멍해 있던 아시엘은 바로 그가 마중오기로 했던 셀레니스 기사단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시엘이라고 합니다."
"카이스 루 메르티스 입니다.처음 뵙겠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저는 베르칸이라고 해요.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이에요."
베르칸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체구가 작고 얼굴에는 아직 조금 앳된 감이 남아있는 것이 대충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독특한 은회색 머리칼에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가 선량하게 빛나고 있어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가지 않겠어요? 모두들 기다리고 있어요."
"아... 네!"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아시엘은 재빨리 짐가방을 챙겨들었다. 카이스 역시 자신의 짐을 들고 앞서가는 베르칸의 뒤를 좇았다.
"이야.. 그나저나 이번 후배들은 둘 다 굉장한 미인이네요! 귀엽고 예쁜 꼬마에 잘생긴 총각이라니."
농담인지 뭔지 모를 선배의 말에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꼭 자상한 형이 동생에게 하는 말 같은 느낌이라 반발심은 들지 않았다.
"감사합니다.하지만 카이라면 몰라도 전 근육도 없이 키도 작고 볼품없는걸요."
"하하! 세상엔 키나 근육으로도 보충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어요."
베르칸이 재밌다는듯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시엘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그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 얼른 가요."
잠시 후. 그들 사이에서 대화가 멈췄다. 아시엘은 황궁의 내부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버렸고, 카이스는 여느 때처럼 묵묵히 그런 친구의 옆을 지킬 뿐이었다. 베르칸은 이것저것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여기에 오기 전에 오랜만의 신입이라며 들떠 있던 단장과 동료들이 떠올랐다. 최근에는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해도 셀레니스에 오는 기사들은 적었던 탓이었다. 아마 복잡한 정치판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겠지. 베르칸은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꺼번에 두 명이나, 거기다 한 사람은 그 드문 마검사라고 하니 인력난에 시달리던 기사들의 눈이 번쩍 뜨이는건 당연했다. 마검사라면 어느 쪽일까. 마력의 흐름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마 금발 소년 쪽. 하지만 카이스라고 한 적발의 소년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
'기대되는데.'
베르칸은 살짝 미소지었다. 조금 더 정원에 난 길을 따라 걷자 곧 본궁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저택같이 생긴 건물에 다다랐다. 베르칸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뒤를 따르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자, 여기가 셀레니스 기사단의 생활관이에요.."
아시엘은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고 카이스 역시 감탄하는 눈빛으로 저택을 살폈다. 하얀 대리석 건물이 볕을 받아 반짝반짝하게 빛이 났다. 간간히 섞여 있는 분홍빛 벽돌 역시 때탄 곳 없이 깨끗했다. 베르칸의 제복과 같은, 새하얀 백색. 베르칸이 뿌듯하게 웃는 옆에서 두 사람이 소리 없는 탄성을 지르고 있는데 마침 생활관의 문이 벌컥 열리고 한 남자가 나왔다.
"어라, 베르칸? 앞까지 와 있었네. 하도 안 와서 찾으러 가려고 했지."
"늦어서 죄송해요, 단장."
그가 웃으며 하는 말에 아시엘과 카이스는 새로 등장한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말끔한 제복에 큰 키, 잘생긴 얼굴과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
"아."
아시엘과 카이스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왜 그래요?"
옆에서 베르칸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지만 둘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영문을 몰라 이번에는 기사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단장 역시 얼어붙은듯 멍하니 서서 두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칸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아시엘의 벌어진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루이카엔씨?"
"아는 사이였어요?"
베르칸은 단장과 아이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완전히 굳어버린 듯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그리고 곧 기사단장- 루이카엔이 하, 하하,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의 단장,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과 아시엘, 카이스의 조금 황당한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