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대면하다(2)
"황제 폐하. 카시마엘 경이 찾아오셨습니다."
성 내부인데도 갑옷을 차려입은 황실 근위대병이 집무실과 연결된 수정구에 대고 말하자 곧 들이라는 황제의 허락이 들려왔다. 스륵.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자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루이카엔은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듯 다시 두 걸음 후진해 근위병 앞에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카시마엘 경."
당황해하는 근위병의 갑옷으로 둘러쌓여진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퉁, 친 루이카엔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에 담았다.
"이봐- 미안한데 난 나를 성으로 부르는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기왕이면 루이카엔 경이라고 해 주겠어? 자네도 셀레니스 기사단의 방침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병사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카엔은 만족스럽게 미소짓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격려하듯 두드려 주었다.
"이러는 편이 내 동생도 좋아할 테니까 말이야. 그럼 수고!"
"아... 들어가십시오."
병사는 절도있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닫히고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근위병은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구겼다.
"...버림받은 사생아 주제에 떨거지들 모아놓고 단장이랍시고 앉아있으니 아주 살판 났군."
빈정거리듯 중얼거린 그는 짜증스럽게 땅을 팍, 걷어찼다. 물론 병사는 그 당사자가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나 참.어이가 없네."
피식 실소를 지으며 루이카엔은 문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조금 더 들어가자 처음의 문보다 훨씬 화려하게 조각으로 장식된 문이 나왔다. 루이카엔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닥의 푹신푹신해 보이는 붉은 카펫과 역시 화려하게 장식된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 그리고 그 횅할 정도로 넓은 방의 중앙의 가장 커다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황제와 그 뒤를 지키는 듯 서있는 보좌관 페이튼이었다. 루이카엔은 황제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사례를 취했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루이카엔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
황제가 허락하자 루이카엔은 지체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를 보며 라이펜은 씨익 하고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안 어울리게 웬놈의 뵙습니다, 야. 소름 돋은거 안보여?"
"그래도 일단은 단장이니까요. 신입들에게 잘못된 풍습을 가르칠 필요는 없잖습니까. 아니면 혹시 소름돋게 했다고 벌하실 겁니까?"
루이카엔 역시 장난스럽게 웃으며 받아치자 라이펜은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킥킥 웃으며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벌? 내가 왜. 우리 루이카엔 꼬마 뒷담이나 까는 그놈 족치는 거면 몰라도."
"이런.. 그것도 들으셨습니까? 하긴 저쪽에서는 연결이 끊어진 걸로 보여도 이쪽에선 다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꼬마라뇨. 저 내일 모레면 서른이라구요?"
"어이쿠야, 우리 꼬마가 벌써 그만큼이나 됐어?"
"그만큼 폐하가 노쇠하셨다는 이야기겠지요."
루이카엔의 말에 라이펜은 이마의 힘줄을 세우며 호오? 하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놈이 지금 황제를 놀려?"
"편하게 대하라고 하신 건 폐하십니다."
"아오..진짜."
먼저 놀리려 했건만 어째 도로 놀려지게 된 건지.라이펜이 부들부들 어깨를 떨자 그 뒤에 서 있던 페이튼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루이카엔 경에게 말싸움으로 이기시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 정말. 이것들이 지금 황제를 봉으로 알아!"
그게 결정타였는지 결국 짜증에 머리를 쥐어뜯는 라이펜과 그 뒤에서 여유롭게 "폐하,탈모 생기십니다."하며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는 페이튼을 보며 루이카엔은 문득 저번의 대전회의에서 보았던 모습과의 괴리감에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능구렁이처럼 비리 귀족들의 숨을 조이던 능동적인 카리스마와 그리고 찬바람이 불 정도로 차가웠던 그날의 눈동자와 지금의 모습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페이튼과 말싸움을 벌이던 라이펜이 도끼눈을 뜨고 루이카엔을 노려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닙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셨나 싶어서요."
라이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쯧 차고는 몸을 똑바로 하고는 표정을 수습했다.
"....?"
평소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때와 조금 다른 분위기에 의아해하는 루이카엔을 보며, 라이펜은 결둑굳혔던 얼굴 근육을 참지 못하고 이완시키며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가 계속 뜸을 들이자 조금 조급해진 루이카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루이스 아르셰인이 돌아왔어."
"....네?
순간 머리에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았는지 루이카엔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점점 더 짙은 미소를 짓는 황제의 얼굴에 그의 두 눈동자는 놀라움으로 점점 커져갔다.
"루이스...경, 께서 돌아오셨다고요?"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하지만 믿기지가 않아 루이카엔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라이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바로 어젯 밤에."
"..헐. 아니 그동안 대체 뭘 하셨답니까? 루카인 아카데미로 가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어떻게 거의 10년동안이나 잠수를...!"
당황해서 다다다 외치는 루이카엔이 재미있어 라이펜은 킥킥 웃으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잠시, 황제는 설명을 재촉하는 수하의 사나운 눈빛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정말로 아카데미에 교수로 있었더라고."
루이카엔은 라이펜의 말에 저도 모르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버렸다. 물론 저 황제의 옆에 20년 이상 붙어있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설마 진짜 가출인건가? 하는 등등 다소 무례한 오만 가지 생각이 폭풍처럼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지만 그는 겨우겨우 눌러담고 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황궁으로 돌아오신답니까?"
"아-니. 어제도 아카데미 수업 준비해야 된다고 가버렸어. 당분간은 거기에 있을 건가 봐."
정확히는 흑마법사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황제의 옆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그것까지는 루이카엔에게 알려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라이펜에게는 더욱 흥미가 있는 것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어제 온 신입들은 어때?"
"네?"
뜬금없는 라이펜의 물음에 루이카엔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대답했다.
"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번에 우연히 만났던 적이 있는 녀석들인데 그 때 봤을 때는 실력도 꽤 괜찮은 것 같고..아! 한 명은 어리지만 마검사랍니다. 아카데미 수석이라고... 어쩌면 루이스 경의 제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설명에 라이펜은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어젯 밤 거의 1시간동안이나 루이스가 자랑을 늘어놓았던 그 양아들이-
"그 마검사라는 꼬마, 이름이 아시엘 이라던데 맞나?"
"네, 그렇습니다....마아안?"
자연스럽게 대답하다 루이카엔은 뒤늦게 문제를 깨달았다. 순간 사레가 들릴 뻔 한 걸 겨우 참은 그는 경악한 눈으로 라이펜을 바라보았다.
"폐하가 그 녀석을 어떻게 아십니까..? 아직 보고도 안 드렸는데! 설마 폐하께서 루카인 아카데미에서 올린 서류를 읽으셨을 리도 없고."
"물론 그렇긴 하지만 네놈은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라이펜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의자에 턱을 괴었다.
"어제 루이스 녀석이 자랑을 엄청 늘어놓았지. 내가 왜 그렇게 우리 1황자를 아끼는지 이해가 간다고."
"예...?"
루이카엔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라이펜은 모른척하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애 돌보는 재미에 눈을 떴나봐. 꼬맹이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하던 놈이."
"......?"
더더욱 의미 모를 말이었다. 어디서 뒤늦게 자녀라도 보셨나 는 생각이 퍼뜩 루이카엔의 머리를 스쳤지만 아무래도 그럴 일은 없을 터였고- 결국은 황제의 다음 말을 듣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다. 어느 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루이카엔을 보며 라이펜은 겨우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드디어 폭탄을 투하했다.
"그 아시엘이라는 녀석. 루이스가 양아들로 삼은 녀석이란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황망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루이카엔은 겨우 입을 떼 얼빠진 소리를 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