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0화 (2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대면하다(4)

잠시 후. 두 사람은 저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각자 검을 챙겨 연무장에 섰다.

"저기.. 진검으로 해요?"

연무장에 가자는 말에, 자신이 먼저 대련신청을 했지만 진검은 조금 꺼려지는지 아시엘은 앞에 서 있는 케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케빈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럼! 어차피 진짜 베는 것도 아니고 실전에 쓸 진검을 손에 익히는 것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의욕 만빵인 케빈의 대답에 네, 조금 꺼림직한 대답을 하고 선배의 맞은편에 레이피어를 들고 설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자세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을 뿐. 아시엘의 가라앉은 눈빛을 본 케빈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더 세게 쥐었다.

'하하.. 순둥이같던 얼굴은 어디가고.'

한층 날카로워진 눈매에 무표정의 얼굴. 왠만한 기사 못지않는 기백에 감탄하던 케빈은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몇 초가 몇 시간처럼 지나가고. 긴장된 공기를 찢고 먼저 지면을 박차고 움직인 것은 아시엘이었다.

파박! 아시엘은 눈 깜짝할 새 케빈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조금 방심하고 있던 케빈은 상상도 못 한 스피드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되어 가까스로 쇄도해오는 레이피어를 막을 수 있었다. 카앙! 두 자루의 검이 강하게 맞부딪치며 거친 쇳소리가 연무장에 울려퍼졌고, 두 사람은 검을 교차한 채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끼릭끼릭.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한참동안 귀를 때렸다. 슬슬 시큰거려오는 손목에 아시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엘이 점점 밀려나기 시작하자 케빈은 더더욱 무게를 실어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 때, 갑자기 그의 시야에서 아시엘이 사라졌다.

"......!"

지탱하던 곳이 갑자기 사라지자 케빈은 균형을 잃고 순간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허점을 노려 아시엘의 레이피어가 옆에서 쇄도해왔다. 엄청난 속도에 살짝 경악하면서도,아시엘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부터 대충 그의 움직임을 유추해 낸 케빈은 한 걸음 뒤로 몸을 빼 금빛 레이피어를 여유롭게 피했다.

"앗..!"

이번에는 되려 헛손질을 한 꼴이 되어 아시엘은 살짝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지은 케빈은 순간 몸을 확 숙이더니, 놀란 아시엘의 발을 긴 다리로 확 걸었다.

"우아앗!"

갑작스런 태클에 완벽하게 몸의 밸런스가 무너졌고 결국 아시엘은 우당탕탕! 하는 소리를 내며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으아.."

세게 바닥에 찧어 아픈지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엉덩이를 쓰다듬는 아시엘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케빈은 어느 새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그에게 손을 뻗어 팔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제법인데? 깜짝 놀랐네."

"하하.. 고맙습니다. 것보다 역시 강하시네요! 마법 쓸 겨를도 없었어요."

아니, 마법을 안 쓰고 이정도라면 이쪽이 감탄해야 하는데.케빈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느 새 순한 표정으로 돌아온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아까 실력 차이를 이유로 마음을 놓았던 자신이 후회될 정도로 신입의 실력은 훌륭했다.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이정도라면 왠만한 기사들은 고개도 못 들 수준이었다. 검술 쪽은 카이스가 더 뛰어나다고 들었으니, 케빈은 다른 쪽 신입의 실력 역시 기대되기 시작했다.

"선배, 선배!"

잠깐 상념에 빠졌던 케빈은 아시엘의 목소리에 어?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시엘은 끙차, 하고 몸을 발딱 일으켜쑤다.

"우리 한 판 더 해요! 이번에는 목검으로."

"...하하, 체력도 좋다."

결국 아시엘의 재촉에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두고 마주보았다. 아까와 똑같은 자세와 분위기, 눈빛이었고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진검이 아닌 목검 승부라는 것.

진검을 사용할 때는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기 때문에 그저 제압하는 것으로 끝나는 반면 목검승부는 상대방의 몸에 먼저 타격을 주는 쪽이 이기는 것이라 케빈은 되도록이면 신입과의 목검 대련은 피했지만-오늘은 괜찮을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간다!"

파박! 이번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져-두 사람의 검이 재격돌하기 직전.

"야, 한창 재미있어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

갑자기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루이카엔의 목소리에 그들은 깜짝 놀라 급히 발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끼기기기긱! 하고 바닥에 그들의 발이 마찰하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졌고, 곧 아슬아슬하게 멈추는 데 성공한 케빈은 마찬가지로 멈추긴 했지만 비틀거리는 아시엘을 붙잡아 바로세워주었다.

"무슨 짓이야, 네놈은! 큰일 날 뻔 했잖아."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그리고 너한텐 볼일 없거든?"

역시나 그들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팔에 독수리를 얹은 기사단장이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이마에 힘줄을 세우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케빈을 귀찮다는 듯 밀어낸 루이카엔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아시엘에게 손짓했다.

"아시엘, 너 나랑 좀 같이가자."

"어딜요? 아침부터."

검을 허리춤의 검집에 꽂아 넣고 순순히 단장에게로 다가가면서도 아시엘은 의아하게 물었다. 루이카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서 너랑 카이스 좀 보자고 하셔서."

"폐하... 께서요?"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튼 제국의 황제, 어제부로 그의 주인이 된 사람이기도 했지만 아시엘이 먼저 떠올린 것은 루이스가 주절주절 늘어놓던 그에 대한 험담이었다. 루이카엔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재촉했다.

"원래 우리 쪽에 관심이 좀 많으셔. 그러니까 빨리 샤워하고 준비해."

"아, 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아시엘은 그대로 연무장 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루이카엔은 킥-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케빈이 눈살을 팍 찌푸렸다.

"뭐야, 왜 웃어."

"그냥- 저 녀석 귀여워서."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순진해서 그런지. 자꾸자꾸 변하는 그의 표정은 그의 생각과 기분을 솔직하게 비쳐 보는 사람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 때, 케빈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루이카엔을 상념에서 깨웠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황제폐하께 갔었냐?"

"아아. 어제 루이스 경께서 돌아오셨다고 하더라고."

그의 물음에 루이카엔이 고개를 살짝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케빈의 얼굴에 순식간에 경악이 서렸다.

"루이스, 아르셰인 경이? 지난 10년동안 황궁 떠나 계셨다며! 근데 갑자기 왜?"

예상보다 큰 고성이 터져나오자 루이카엔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케빈을 짜증이 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물론 자신도 황제의 앞에서 온갖 호들갑을 떨다 온 참이니 이해는 갔지만.

루이스 아르셰인. 황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는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이 세튼 제국 최강의 기사로 이름을 떨친,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었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초대 단장으로서 옛날에는 막 입단한 루이카엔과 케빈, 제르닌과 아델레트를 직접 지도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갑자기 가셨다가 갑자기 돌아오고.. 너무하시네."

케빈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때만큼은 루이카엔도 동감했다.

"뭐, 워낙 바람같은 분이셨으니까. 게다가 너나 나나 입단한 지 2년밖에 안 된 풋내기 19살이었으니 떠난다고 안 알려준 것도 당연하고."

"....."

케빈은 침묵으로 대꾸를 대신했지만 루이카엔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복잡한 표정을하는 오랜 친우이자 라이벌의 어깨를 퍼억 치며 씨익 웃었다.

"그동안의 일을 궁금해하는 건 이해가 되는데, 어차피 우리가 알아도 되는 거면 곧  알 수 있을거니까. 아시엘 녀석도 관련 있는것 같고."

"뭐? 그 녀석이 왜?"

케빈이 의아하게 되물었지만 루이카엔은 그의 등을 두어 번 더 치고 별 말도 없이 횅하니 등을 돌려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야, 잠깐만 어디가!"

"카이스 깨우러 간다. 그녀석 아직도 자고 있는 것 같더라고."

케빈의 다급한 부름에도 그는 여유롭게 대꾸하며 손을 훠이훠이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가는 문을 열기 직전 갑자기 생각났다는듯 등 뒤로 소리쳤다.

"아시엘은 데리고 놀만 하던?"

"그럭저럭 괜찮았어. 솔직히 상상 이상이었는데."

그런 그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루이카엔은 음- 하는 소리를 내며 턱을 쓰다듬고는 다시 외쳤다.

"적어도 휴온보다는 한 수 위겠네. 야, 그래도 16살 꼬맹이 상대로 쩔쩔매다니 너도 늙었구나."

"뭐야? 야!"

뒤에서 케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무시한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 녀석 실력에 감사해라. 걔 털끝만큼이라도 다쳤으면 넌 루이스 경한테 죽었어. 양아들이라고 엄청 아끼신다니까."

"....뭐?"

케빈은 순간 멍해져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양아들? 누가? 누구의? 루이카엔은 즐겁게 킬킬거렸다. 곧 생각을 정리한 케빈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양..아들? 그 루이스 경의? 아시엘이?"

하지만 그 물음에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지 루이카엔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혼자 남아버린 케빈은 이미 사라져버린 상대에게 야! 하고 소리를 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