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대면하다(6)
"유쾌하지 못한 녀석이랑 마주쳐 버렸군."
루이카엔이 짜증이 실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얼굴을 살짝 구긴 채 그의 뒤를 따르던 아시엘 역시 동의했다.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볼 때마다 불쾌한 사람이에요, 그 백작은."
"시골에 처박혀 영주민 피나 빨아먹고 살던 그 놈이 감동적으로 자수성가 하셨으니 어떻게 목에 힘이 안 들어가시겠어. 거기다 몇 년 전부터는 뒷세계에도 손을 대서 돈을 모조리 제 주머니에 쓸어넣는 중이고. 나 참... 그 놈이 만든 추문이 몇 갠데 파면을 못 해?"
"추문이요?"
의아하게 되묻는 아시엘에 그는 한번 더 한숨을 내쉬고는 이마를 짚었다.
"어린애는 몰라도 돼ㅡ 라고 하고 싶지만. 저놈이 황궁의 시녀를 몇이나 건드렸어. 자기 부인 멀쩡히 살아있는데 왜 그런대? 그것보다 넌 하노빌 백작이랑 어떻게 아는 거야?"
"아아. 아카데미에서 그 아들놈이랑 일이 좀 있었거든요. 한 2년 전인가."
"일?"
아시엘의 대꾸에 루이카엔이 의아하게 물었다. 카이스는 그 때 일을 떠올린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시원스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기어 오르길래 좀 밟아 줬어요."
"... 세상에."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야.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감탄사가 루이카엔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카이스의 반응이 그런 것도 이해가 갔다. 루이카엔이 무어라 더 말하려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숙이자 아시엘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루이스 아저씨랑 만나기 전까지 하노빌 백작령에 있었거든요."
"뭐? 무슨 말이야?"
"아아."
아시엘은 잠시 말을 고르듯 큰 눈을 데구룩 굴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 들어가기 전까지 거기서 살았어요. 길거리에서."
길거리에서, 라는 말에 루이카엔은 움찔했다. 세튼 제국은 풍요로웠지만 귀족들의 횡포로 영지는 서민들이 각박한 곳이 많았다. 무거운 세금과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빼앗는 벌금, 토지, 집. 덕분에 집의 어른들이 모조리 잡혀가거나 자식을 버리고 도망치는 바람에 고아가 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노빌 백작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루 한 끼 벌어먹고 살다가 우연히 루이스 아저씨를 만나서 팔자 폈죠, 뭐. 그래서 하노빌 영지에는 별로 다시 가고싶지가 않네요. 분명 들어가자마자 옛날 친구들이 날 죽이려고 달려들걸요? 혼자서 잘 먹고 잘 산다고."
아시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순간적으로 루이카엔은 그의 미소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천진하지만 어린 것 같지 않은, 그런 오묘한 미소가 소년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어쨌든 그 때도 영주가 뒷동네 사업에 손을 댔다는 소문이 돌았었어요."
너무 말이 많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인지 아시엘은 재빨리 입을 닫았다. 루이카엔은 어이없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너도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군. 안 삐뚤어진게 용하다고 해야 하나, 은근 성질 더러운 점이 이해가 간다고 해야 하나..."
"제 성질이 뭐가 어때서요."
아시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겨보았다.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카이스는 정말 진지하게 운을 뗐다.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건ㅡ"
"뭐라고 했어?"
"아냐."
루이카엔은 단숨에 꼬리를 내리는 카이스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시끌벅적한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 어느새 세 사람은 집무실 앞에 다다라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루이카엔 경."
어느 새 교대가 된 건지 집무실 앞의 근위병은 바뀌어 있었다. 그가 사람좋게 웃으며 가볍게 경례를 올리자 루이카엔도 좋은아침, 하고 마주 웃어주었다.
"그 뒤쪽의 분들은 새로 오신 기사님들이십니까?"
"어. 시간이 촉박한데 어서 안으로 좀 고해줘."
평소에 안면이 있던 사이였는지 루이카엔이 편하게 부탁하자 그는 깜빡 잊었다는 듯 아, 하고 쑥쓰럽게 웃고는 수정구에 대고 안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고풍스럽게 조각된 문이 소리 없이 열렸고 루이카엔은 조금 망설이는 아시엘과 카이스의 등을 떠밀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스륵. 문이 닫히고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근위병은 순식간에 딴사람이라도 된 듯 싹싹하게 웃던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손에 들고 있던 수정구의 연결을 끊은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주머니에서 또다른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들고 누군가와 연결했다.
곧 희미하게 자줏빛을 내며 수정구가 빛나기 시작하고 빛 속에서 중년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대공 전하.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이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갔습니다. 신입 기사 두 명과 함께입니다."
[알았다. 하지만 이런 건 일일히 보고하지 않아도 돼.]
뚝. 그 쪽에서 연결을 끊어버린 듯 수정구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근위병은 황급히 통신용 수정구를 다시 품 안에 감추었고 그것을 끝으로 복도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열 걸음쯤의 짧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또 하나의 큰 문이 그들을 마주했다. 루이카엔은 바깥의 것보다 조금 더 두텁고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문을 두드리고, 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여, 루이카엔. 데려왔냐? 뭐 이렇게 오래 걸려."
그들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라이펜은 읽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팽개치고 짜증을 부렸다. 황제와 눈을 마주치자 아시엘과 카이스는 급하게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시엘 아르셰인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메르티스 가의 삼남 카이스 루 메르티스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두 소년을 라이펜은 흡족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라."
허락이 떨어지자 고개를 한번 더 숙여보이고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켜 황제를 바라보았다.
세튼 황가 특유의 에메랄드빛 머리칼에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피부. 결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그의 부드러운 황금빛 눈동자에 흐르는 것은 기품있는 카리스마였다. 잘 생겼다ㅡ 아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 봤어?"
"아!"
갑자기 들려오는 라이펜의 목소리에 아시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송, 송구합니다.
"송구는 무슨. 내가 너무 잘생겼는데 뭐 어쩌겠냐."
휘잉. 그 한 마다에 마치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닥친 듯한 냉기가 방 안을 감쌌다. 동상마냥 굳어버린 카이스와 루이카엔, 그리고 아시엘을 번갈아 둘러보던 라이펜은 조금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들 하네. 그렇게 굳어버릴 건 또 뭐야?"
"아... 아닙니다. 정말 그런걸요."
실제로 방금 전까지 아시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방금의 그 썰렁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한 마디에 두 소년의 황제에 대한 환상은 대면 후 5분만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하지만 라이펜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네가 루이스의 아들이라고?"
갑자기 날카로워진 라이펜의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음... 루이 녀석 말대로 엄청ㅡ"
라이펜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아시엘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그는 눈높이를 맞추며 관찰하듯 하나하나 소년을 뜯어보았다. 화사한 금발, 커다란 눈과 투명한 피부. 그가 멍청히 눈을 꿈뻑거리기를 몇 번, 라이펜은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턱을 쓸었다.
"엄청 예쁘게 생겼네? 진짜 아들 맞아? 뭐, 농담이고. 이거 루이스가 마음에 들어할 만 하네. 움츠러들지도 않고,눈빛도 나쁘지 않고."
마치 감평하는 듯 한 라이펜의 말에 조금 기분이 나빠졌지만 아시엘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눈치도 좀 있는 것 같고. 루이스가 마음에 들어할 만도 하네. 그래, 오로지 친구만을 따라 이까지 왔다는 애가 너냐?"
이번에 라이펜의 시선이 닿은 것은 카이스였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라이펜은 마냥 재미있다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황제에 대한 충성도 아니고 그저 소중한 친구를 위해 지위며 상속권을 모두 포기하다니 어이없을 정도로 멋진 놈이네."
"... 과찬이십니다."
"더럽게 무뚝뚝한 녀석일세. 제 2의 제르닌이냐?"
"거의 비슷해요."
끼어들어 대꾸하는 루이카엔에게 황제는 불쌍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재미없는 녀석이 둘이나 있다니 좀 불쌍해지는데."
"가만히 보고있으면 은근히 재미있습니다, 제르닌도. 가끔씩 놀려주면 반응이 제대로니까요. 안 어울리게 질투도 하고."
그의 말에 라이펜은 은근한 미소를 루이카엔에게 보냈다.
"아델레트 부단장은 잘 있냐?"
"잘 있죠."
역시 마찬가지로 루이카엔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곧 서로를 마주보며 음흉하게 웃는 황제와 단장의 사이에서 아시엘과 카이스는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이카엔 씨, 그게 무슨 소리에요?"
"꼬마들은 몰라도 됩니다ㅡ 그리고 같이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거야."
루이카엔은 아시엘과 카이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아시엘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그 때. 똑똑 하고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라이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고, 보좌관 페이튼이 들어왔다.
"폐하, 대전회의 시간입니다. 어서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엥, 벌써?"
페이튼의 말에 라이펜은 입맛을 쩝 다셨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루이카엔과 아시엘, 카이스에게 손을 슥 들어보였다.
"이까지 불렀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
"폐하."
아시엘은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가려는 그를 불렀다. 라이펜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자 아시엘이 생긋 웃었다.
"지금 문 앞을 지키는 근위병은 조사해 보심이 좋겠습니다."
"뭐라고?"
뜬금없는 아시엘의 말에 라이펜은 물론이고 루이카엔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설명을 요구하는 그들의 시선에 아시엘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를 안으로 들여보낸 뒤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수정구로 연락을 취하더군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라이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카이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지만 아시엘은 낯빛을 바꾸지 않고 톡톡. 붉은색 귀걸이가 달랑거리는 자신의 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제가 귀 하나는 좋아서요."
"....."
잠시 놀란 황금빛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던 라이펜은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루이카엔,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루이카엔이 얼떨떨하게 답하자 라이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는 다시금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보좌관 페이튼을 따라 문 밖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