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3화 (2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첫 파견(1)

"렌 씨, 계세요?"

소년의 경쾌한 목소리에 테이블을 정리하던 렌은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이제 제법 익숙해진 얼굴의 아시엘이 양 팔에 짐을 한가득 안고 낑낑거리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짐을 구석에 쿵! 하고 내려놓은 아시엘은 산뜻하게 미소지었다.

"좋은 낮이에요, 렌 씨."

"어서 오세요."

렌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시엘은 휴, 숨을 돌리고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 앉자 그는 후후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잘 지냈어요?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요즘 이래저래 바쁘기는 해도 재미있어요. 2주밖에 안 됐는데도 엄청 부려먹더라구요."

아시엘은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렌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은 처음으로 파견 근무에 나서는 건가요?"

"아, 어떻게 아셨어요? 예지로 알 수 있는거에요?"

"그런 거죠.

아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흥미로움을 가득 담은 채 금가루를 뿌린 것 처럼 반짝였다. 렌은 그를 귀엽다는듯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그리고 굳이 미래를 읽지 않아도 아시엘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걸요. 아시엘은 그때 그때 기분이 다 얼굴에 드러나니까."

"엑, 그래요?"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졌다. 어린애다운 그 모습에 렌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을 이었다.

"단, 몇 가지 감정에 한해서이지만요."

"네?"

"아시엘만큼 솔직하면서도 자기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의 말에 아시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직 이런 말 하기는 좀 이른것 같지만, 그래도 언제나 웃는 게 능사가 아니란 것은 기억해 주세요. 의외로 화도 잘 내는 것 같지만 그런 것보다 좀 더 깊은 곳을 직시해야 할 때도 있어요."

"아아, 뭐."

잠깐 눈을 깜빡이던 아시엘은 대답 대신 싱긋 웃기만 했다. 그는 곧 아참, 하며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냈다.

"이 여관 쿠키가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처음 알았어요! 선배가 사다달라고 부탁하시더라구요. 녹차가 들어간 거랑-"

"그럴 줄 알았어요."

렌은 앞치마에서 종이에 예쁘게 싸인 쿠키 다섯 개를 내밀었다. 아시엘은 입을 헤 벌렸다. 아직 주문이 채 끝나지도 않았지만 그의 손에는 정확히 아델레트가 주문한 녹차 쿠키가 두 개, 단호박 쿠키가 세 개가 올려져 있었다. 아시엘이 다시금 눈을 빛냈다.

"굉장해요!"

"뭘요. 어서 가 봐야하지 않아요? 여기서 5분만 더 지체했다간 쿠키를 부탁하신 분한테 불벼락을 맞을 걸요."

"아, 맞다...!"

아시엘은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절대 시간이 여유로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쿠키를 부랴부랴 품 속에 넣고 다시 묵직한 짐을 들어올렸다.

"그럼 저 가볼게요!"

"다음에 봐요."

렌이 웃으며 배웅하는 것을 뒤로하고 아시엘은 빠르게 여관을 빠져나갔다. 쿵! 그가 나간 후 다시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렌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고생하세요."

파견도, 그리고 앞으로의 일도.

"하아..후..하아.."

번잡한 시내를 거의 뛰다시피 해 가까스로 통과해 웅장한 황성의 외벽 앞에서 멈춰선 아시엘은 그제야 짐을 내려놓고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뒤늦게 짐에다 경량화 마법이라도 걸어둘걸,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것도 부족한 체력과 근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거라 스스로 위로한 그는 다시 끙차,하고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는 문 앞으로 질질 끌듯 걸어갔다. 아시엘은 커다란 성문 앞에 다다라, 몇 주 사이에 얼굴을 익힌 보초병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어,아시엘 경.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짐이 많은 것 같은데 들어 드릴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수고하세요."

아시엘이 생글 천진하게 웃어보이자 그들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재빨리 입구에서 비켜섰다.

"무거우실텐데, 어서 들어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한번 더 빙그레 웃으며 감사인사를 하고 아시엘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보초병들은 소년의 결코 크다고는 할 수 없는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아쉽게 입을 쩝 다셨다.

"구김살도 없으시고, 싹싹하고, 능력도 좋고... 사기네, 사기야. 여자였으면 좋으련만."

"저 나이에 마검사라고 불린다면서요? 굉장하네요. 진짜 저 얼굴에 남자라니... 아직 어리셔서 그런가."

그 때, 빠악!누군가의 손이 푸념하던 그들의 뒤통수를 어마어마한 힘으로 강타했다. 끄악, 커억! 두 병사는 순간 휘청하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얼얼안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들은 사납게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누구..!!"

"나다,이 멍청이들아."

그들은 얼굴이 새파래져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부하들에게 불주먹을 날린 경비대장은 곰같은 주먹을 두 사람 앞에 디밀며 으르렁거렸다.

"그렇지. 싹싹하고 귀엽고 착하고 솔직하신 분이지. 남자라서 안타깝기도 하고. 하지만! 네놈들이 일찍 결혼했으면 저만한 딸이 있었을거다, 이 멍청이들아! 아니면 그렇게 남자가 좋냐? 앙? 성격 좋은 남자는 황성 밖으로만 나가도 찾을 수 있어!"

빠악! 어마무시한 불호령과 함께 그들은 다시금 가차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아야 했다. 차마 상관에게 대들지도 못하고 그들은 한참동안 이어지는 고함소리에 두 손 두 발 싹싹 빌어야 했다.

혹시라도 늦을까 종종걸음치며 황성의 넓은 광장을 가로지르고 정원을 통과한 아시엘은 생활관 앞에 도착해 짐을 가득 안고 발로 문을 두드렸다. 곧 그 소리에 화답하듯 제르닌이 문을 열어주었다.

"다녀왔냐."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아시엘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로비의 테이블 위에 짐을 내려놓았다. 쿠웅! 꽤 육중한 소리가 로비에 울려퍼지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아시엘은 후하,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케빈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수고했어, 꼬맹아."

"꼬맹이 아니거든요."

"무겁진 않았어?"

자상하게 웃으며 다가온 슌이 자신이 부탁한 물건을 챙기고 아시엘의 무거운 것을 들고오느라 지친 아시엘의 어깨를 안마하듯 주물러주었다. 아시엘은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늘어졌다.

"으아아.. 조금요? 감사합니다아.."

"처음 파견 나가는 날에 심부름이나 시키고, 너네들이 사람이냐."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오던 루이카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단장은 곧장 그에게 다가와 종이를 내밀었다. 아시엘의 곁에 있던 카이스와 케빈에게도, 제르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엘은 슌을 기분 나쁘지 않도록 떼어놓고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이게 뭐에요?"

"파견 명령서랑 간단한 자료. 준비는 다 해 뒀겠지? 제군들. 슬슬 출발할 때야. 제르닌, 케빈. 신참들 잘 부탁한다. 첫 임무니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거야."

"알았어, 알았어. 걱정 마셔."

케빈은 그에게 손을 훠이훠이 내저어 보였다. 그의 목에서 애완뱀 앤이 쉬익 혀를 낼름거렸다. 제르닌은 대충 명령서를 주머니에 집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제 가자. 마구간에서 집합니다."

"...마, 마구간이요?"

순간 아시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케빈이 이변을 알아차리고 왜 그래? 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오랜 친구인 카이스는 그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세 알아차리고는 이마를 턱 짚었다. 아무래도 출발부터 난관일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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