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8.때로는 과감하게(2)
제 5구역 경비대원들 중 한 명인 헨슨은 경비대의 캄캄한 복도를 홀로 걷고 있었다. 이미 모두가 잠든 시간. 가끔씩 심야 순찰을 나가기는 했지만 오늘 따로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경력이 꽤 오래된 헨슨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부 순찰이라니..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짚이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평소 셀레니스 기사단을 동경했던 동료,니엔. 하지만 정작 그들이 도착한 이후로 계속 불안감에 떠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기사들을 철저히 사건에서 배제하려는 듯 한 부대장 에슈튼.
'꼭 그 사람들을 꼼짝도 못하게 하려는 것 같군.이미 끝난 일인데 말이야.'
헨슨은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두 보초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는 그들.속으로 혀를 쯧 찬 그는 등을 돌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끼익.끼이익. 낡은 나무계단 특유의 기분나쁜 소리가 침묵에 잠긴 건물을 울렸지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는 신경쓰지 않고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었다.
'2층은... 그 기사 분들이 곯아떨어져 있겠군.'
그는 속으로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리며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방들의 불이 다 꺼져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어둠에 휩싸인 복도를 단 하나의 등롱에 의지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의미 없이 세며 코너를 돈 직후.갑자기 억센 손 하나가 헨슨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읍...!"
기겁하며 그는 자신의 목에 감긴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 손 역시 누군가에 의해 제압되고 말았다. 헨슨은 발버둥을 쳤지만 손길은 그쯤은 아랑곳않고 무지막지하게 잡아끌었다. 이윽고 그는 바로 옆의 방 하나에 질질 끌려들어갔다.
끼이익-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매정하게 울리고 한바탕 소란이 인 후의 복도에는 짙은 어둠만이 감돌았다.
딱딱한 방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진 헨슨은 알싸하게 치밀어오르는 통증에 쿨럭, 하고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크윽... 누구시오! 쿨럭!"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억지로 입을 열어 외쳤지만 그런 그의 의문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이번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묵직하고도 냉기가 어린 음성. 헨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긴장시켰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대꾸했다.
"이번 사건이라니, 무슨 말.."
하지만 그는 곧 목 근처에서 느껴지는 검의 싸늘한 예기에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멈춰야만 했다.
"여자 시체가 둘이나 발견되고! 그런데도 경비대는 쉬쉬하고. 끝내는 엉뚱한 사람을 범인이랍시고 잡아넣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예, 예?"
이번에는 윽박지르는 목소리. 목 언저리에 놓인 검에서 일순 살기마저 느껴지저 헨슨은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 자들이 원하는 대답이 도대체 뭘까. 말의 어투가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는 것을 보아 사건 해결에 대해 긍정적인 말은 절대로 아닐 것 같았다.
"안 들리냐! 어서 대답 안 해?"
"히익!"
하지만 그것도 더욱 깊숙히 검을 들이밀며 재촉하는 남자 때문에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부, 부당합니다!"
"뭐가 부당한데? 이름까지 붙여서 똑똑히 말해!"
남자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평소같이 때려눕히고 도망칠 생각도 못할 정도로 혼이 쏙 빠진 헨슨은 정신없이 덧붙였다.
"나 헨슨 파블은 이번 사건 해결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딸깍.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버튼을 누르는 듯 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목 주변의 검도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었고 더 이상 남자들도 더 이상 위협하지 않았다. 의아해진 헨슨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후.
"이야~ 미안, 미안. 그나저나 이거 제대로 먹히네."
분명 고함을 치던 그 목소리와 똑같은 음성이, 쾌활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 된 헨슨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 어두컴컴하던 방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갑작스럽게 빛에 노출되어 시큰거려왔지만 헨슨은 애써 눈을 부릅뜨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른어른거리는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를 둘러싸듯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두 명의 키 큰 청년.눌랍게도 그들은 헨슨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기, 기사님들?"
"험하게 다뤄서 미안하게 됬네, 헨슨씨. 그래도 그렇지, 너무 쉽게 넘어오는 거 아니야?"
키 큰 청년들 중 한명- 케빈이 씨익 웃으며 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어리벙벙한 정신으로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고 일어선 헨슨은 멍하니 물었다.
"저... 이게 무슨..?"
"아아. 원망하려면 저 꼬마를 원망해. 이 작전을 낸 주범이니까."
헨슨은 케빈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침대에 누워있었는지 한 소년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또 다른 장신의 소년은 그의 곁을 지키듯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야, 괜찮냐?"
케빈은 침대에 걸터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고 끙끙거리는 아시엘에게 물었다.
"그럭저럭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헨슨은 케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아프십니까?"
"음파 차단 마법 유지랑 청력 증폭을 동시에 해서 그렇다네. 그나저나 너한테 볼일이 있어."
볼일? 잠시 이곳에 끌려왔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헨슨은 그 말에 살짝 몸을 굳혔다. 그런 그를 보며 살짝 혀를 쯧, 하고 찬 제르닌은 막 입을 열려는 케빈을 옆으로 밀어내버리고 대신 말했다.
"우리에게 협력해라."
"예?"
나름대로 용건만 간단히, 였지만 헨슨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결국 제르닌을 쏘아보던 케빈이 다시 그를 밀어내고 헨슨 앞에 섰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거든, 우린. 우리가 파견 오기 바로 전날에 잡혔다는 그 범인 얘기도 수상하고, 자료를 주지 않으려는 것도 이상해. 하지만 이 경비대는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별 수 없이 조용히 경청하던 헨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쨌든 의심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찜찜해서 철수도 못 하겠거든. 그래서 어쩔까, 하고 머리를 쥐어짜다가 결론이 난 거지."
"결론?"
"한 놈만 잡아서 족치자고. 저 녀석이 그러더라."
케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헨슨이 황당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아시엘은 애써 그의 시선 을 피했다.
"뭐... 아까 에슈튼 씨가 니엔 씨한테 밤에 내부에 보초 세우라고 말하는 걸 엿들었으니까요."
"아시엘이 귀가 좀 좋거든."
변명하듯 말하는 그의 뒤를 이어서 케빈이 덧붙였다. 헨슨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가끔씩 오감 중 하나가 유별나게 특화된 사람이 있다는데 정말이었군요."
"그렇지."
헨슨의 발소리를 아시엘이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코너를 도는 순간 케빈과 제르닌에게 신호를 보내 타이밍 좋게 끌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케빈은 헨슨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둘렀다.
"왜 이러십니까?"
"협력 해줄거지? 헨슨."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헨슨은 떠보듯 말했다.
"안 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흠...카이스!"
케빈의 부름에 아시엘 곁에 있던 카이스가 앞으로 나섰다. 헨슨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카이스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네모반듯한 상자처럼 생긴 물건. 저게 뭐야, 하고 잠시 고민하던 헨슨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래졌다.
"...설마..?"
그리고 짤깍, 하고 울려퍼지는 소리. 그 직후 한 남자의 목소리가 상자에서 흘러나왔다.
[나 헨슨 파블은 이번 사건 해결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적. 카이스는 한번 더 소형 레코더의 버튼을 눌렀다.
[나 헨슨 파블은 이번 사건 해결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헨슨의 옆에서 케빈은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뭔지는 알지? 메모리얼 기능이 있는 마법석을 가공한 레코더야."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있던 아시엘이 몸을 일으키며 끼어들었다.
"굳이 안 도와주셔도 괜찮아요. 단, 저 레코더가 내일 아침이면 에슈튼 씨의 손에 있겠죠? 헨슨 씨는 오랜 직장을 잃을 거구요. "
"....."
헐. 헨슨의 입이 떡 벌어지던 말던 아시엘은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올 뿐이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예쁘기만 하던 저 미소가 지금은 마치 소악마 같이 보이는 건 내 잘못이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애써 털어내며 케빈과 제르닌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헨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하..."
헨슨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황당하고 허탈한 마음에 뭐라도 말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결국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하아..알겠습니다."
항복 선언을 한 그는 한번 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함정에 빠졌음에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너무 완벽하게 당해 화낼 기운도 없었다. 하하.. 하고 영혼 없는 웃음소리를 낸 헨슨은 다 포기한 듯 방의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도대체 뭘 도와 드리면 되는 겁니까?"
"크하핫! 좋은 자세야."
그리고 케빈은 그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