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30.잠입(1)
끼이익. 오래된 방문이 열리며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내는 틈을 타 제르닌은 복도로 빠져나와 벽에 몸을 밀착했다.
"..."
잠시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 더 이상 보초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안쪽에서 숨을 죽이고 대기 중인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제르닌의 손짓에 그들-케빈, 카이스 그리고 헨슨 역시 소리 없이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나온 아시엘이 문을 살짝 닫고 그림자외 몸을 숨기자 제르닌은 네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가자. 헨슨, 앞장서라."
"ㅈ, 잠시만요."
헨슨은 불안하게 대답하며 벽을 의지해 주춤주춤 제르닌에게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케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용히 말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이렇게 어두운데 불빛도 없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하지만 곧 이게 당연하다는 듯 언짢게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에 그들은 뒤늦게 문제를 깨달았다.
마법사인 아시엘은 물론이고 제르닌, 케빈, 카이스 역시 마력을 다루는 훈련으로 감각이 일반인보다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어둠쯤은 그리 큰 장애물이 되지 못했지만 그렇지 못한 헨슨은 난감한 문제였던 것이다.
"죄송해요, 깜빡했네."
작게 사과를 한 아시엘은 아직도 봉사처럼 벽을 의지하고 서 있는 헨슨의 어깨를 눌러 몸을 숙이게 했다.
"..에? 무슨.."
"쉿."
의아해하는 그를 조용히 시킨 아시엘은 헨슨의 눈을 손바닥으로 살짝 덮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상태로 몇 초 후. 눈을 가리고 있던 손바닥이 치워지자 헨슨은 놀라움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둠 속의 물체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잠시 멍하니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곧 아시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아시엘 경이 하신 겁니까?"
"그냥 제 마력을 좀 불어넣었을 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보아는 아시엘. 그런 그를 칭찬하듯 두어 번 머리를 쓰다듬어준 제르닌은 다시 한 번 헨슨을 재촉했다.
"괜찮아졌으면 가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아..예."
그렇게 다섯 사람은 헨슨을 선두로 기척을 죽이고 앞으로 나가아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최대한 소리 없이, 신속하게 내려온 그들은 1층에 발을 딛자마자 층계참의 사각지대에 다시 몸을 숨겼다.
"이동 중에는 음파 차단마법, 못 써?"
"네. 비슷한 걸로는 은신마법이 있긴 하지만..제 실력으론 아직 무리에요."
케빈의 속삭임에 아시엘은 안타까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제르닌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와 카이스는 지하 감옥으로 간다. 너희 둘은 헨슨이랑 영상석실로 가서 자료를 빼돌려."
자연스러운 지시에 그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잠깐."
아시엘이 케빈의 옷깃을 붙잡고 저지하기 전까지는.
"...?"
반쯤 일어서서 그림자에서 벗어났던 케빈이 다시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오기가 무섭게 저쪽 코너에서 두 명의 남자가 등불을 들고 나타났다.
"...!"
순간 그들은 일제히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만약 그대로 케빈이 밖으로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일단 지금, 그들은 침입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속으로 아시엘의 예민한 청각에 새삼 절실히 감사하며 그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가만히 두 남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응시했다.
터벅, 터벅.
발소리는 점점 커져왔고 그와 비례해 다섯 남자의 심장 고동 속도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곧 그들이 숨은 사각 내에도 등불의 빛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바깥쪽에 있던 케빈과 카이스가 위기를 감지하고 살짝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아니나다를까 그들은 곧 카이스가 손만 뻗어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다다랐다.
"아-으. 귀찮게 정말.."
경비대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 중의 하나가 하품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내 말이..나 참, 살인을 했으면 잡히지를 말던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사람을 귀찮게 해?"
곧 다른 대원이 맞장구치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곧 층계참 아래에는 별 의심을 주지 않은 두 사람의 다리-쭈그리고 앉아있는 아시엘 일행에겐 그들의 다리와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 무탈히 멀어져갔다.
잠시 후. 불빛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숨을 죽이고 있던 다섯 명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살았다. 나이 먹으니 이 짓도 할게 못 되는구만. 간쫄려서 죽는 줄 알았다."
정말로 긴장했었던 듯 푸념을 늘어놓는 케빈.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제르닌도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나 참...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왠지 아카데미에서 밤에 몰래 기숙사 빠져나갈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말하는 아시엘의 목소리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카이스에 그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덕분에 긴장이 풀린 듯 헨슨은 조금 가벼워진 표정으로 두 대원이 사라진 쪽을 가리켰다.
"저 녀석들, 감옥 보초 교대하러 가는 모양입니다. 아마 저 둘을 따라가면 지하감옥 입구가 나올 겁니다."
제르닌과 카이스는 그가 가리킨 쪽으로 잠시 시선을 었다.
"..지금 쫒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겠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제르닌. 하지만 혼잣말은 아닌지 그의 눈동자는 카이스에게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쉽게 알아챈 카이스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자."
짤막하게 카이스를 향해 말한 제르닌은 후배보다 먼저 층계참 아래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 두 대원이 사라진 쪽으로 나아갔다.
카이스는 아시엘과 떨어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지 밖으로 나서려다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조심해서 갔다 와. 나중에 방에서 보자고."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시엘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 재촉 아닌 재촉에 카이스는 결국 망설임을 접고 "조심해."란 한 마디를 남기고 제르닌을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우리도 슬슬 가볼까!"
제르닌과 카이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케빈은 남은 긴장감도 털어버리듯 쾌활하게 말하며 몸을 슥 일으켰다.
"그래요."
아시엘도 대꾸하며 케빈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고 헨슨 역시 끙차,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절 따라오세요. 놓치시면 안 됩니다."
"어, 부탁할게."
케빈은 믿고 있다는 듯 헨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헨슨을 선두로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곧 잠시나마 일행을 숨겨주었던 층계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을 뚝 떼고 짙은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