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32.잠입(3)
한편, 보초 교대를 가는 두 대원의 뒤를 밟은 제르닌과 카이스는 구석에 몸을 숨기고 밖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
지하 감옥으로 갈 수 있는 통로는 거대한 문으로 막힌 채 아까 교대한 두 사람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문이 잠긴 것 같지도 않았고 두 명의 대원은 나오자마자 곧바로 벽에 기대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행태가 못마땅한 듯 제르닌은 작게 쯧, 하고 혀를 찼다.
"한심하군. 수도의 치안을 지킨다는 경비대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갈아엎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카이스가 소리 죽여 묻자 그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제 5구역의 경비대는 대공의 관할이다. 그래서 여태까진 손을 못 댔지만..우리가 직접 보고 들은 이상 이 곳의 대장은 문책을 피하지 못할 거다.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황제의 기사가 거짓말을 했다고 우길 순 없을 테니."
"......."
카이스는 침묵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잠시 무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던 제르닌은 다시 지하감옥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카이스. 저쪽은 부탁해도 되겠지?"
"네."
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르닌은 앞서서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이스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대원은 깩, 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그들을 대충 밀어버리고 카이스는 커다란 문을 살짝 밀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별 저항 없이 열렸고, 곧 시커먼 어둠 속 계단이 드러났다.
"..이거, 어두워서 육안으로 가기는 조금 힘들겠군."
제르닌은 쓰러진 대원의 옆에 세워져 있는 등불 하나를 집어들고는 팔을 뻗어 계단 안을 비추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지하의 차갑고도 퀴퀴한 공기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감쌌다. 잠시 그 끝이 어딜까 가늠해보던 제르닌은 카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자."
카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두 사람은 횃불에 의지해 조심 조심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대화도 끊겨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뚜벅 뚜벅.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의 발소리만 좁은 통로에 울려퍼졌다. 그러기를 몇 분. 먼저 입을 연 건 제르닌이었다.
"아시엘과 친한 것 같던데. 언제 만난거지?"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만났습니다. 그 뒤로 쭉 같이 지냈습니다."
카이스는 무뚝뚝하던 표정을 살짝 풀었다. 친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것인이 딱딱하던 어조 역시 약간 부드러워져 있었다. 제르닌은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통 친구 사이는 아닌 것 같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얼굴이 바뀌는 거 보니까."
"....뭐."
카이스는 얼버무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상황과 장소에 전혀 맞지 않는 대화였지만 제르닌은 즐거워졌다.
자신이나 카이스 둘 다 먼저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닌데다 과묵해 2주 동안이나 같은 방에 지내면서도 거의 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시엘과 카이스를 보면 꽤 오래 전, 루이카엔, 아델레트 그리고 케빈과 보낸 아카데미 시절이 새삼 생각나기도 했다.
슥슥. 다소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카이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
여태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제르닌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벙찐 카이스의 시선을 슬쩍 피한 그는 평소답지 않은 자신의 행동에 조금 머쓱해져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찾아온 침묵. 어느덧 계단은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마지막 바닥에 내려선 제르닌은 다시 미미하게 살짝 웃으면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매일 네가 아시엘한테 하던데. 직접 당한 기분은 어떤지."
"....예?"
"하긴, 그 녀석 머리 쓰다듬는건 한 두 명이 아니지만."
겨우 그의 말을 이해한 카이스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서서 고민하다 대꾸했다.
"..왜 그 녀석이 신경질내는지 알겠습니다."
뭐 그리 나쁘지 않지만. 뒷 말을 들릴 듯 말듯 중얼거린 그는 멋쩍게 손을 올려 다시 머리를 긁었다. 두 사람은 이제 지하의 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지만 더 이상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또 얼마간이 지났을 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호루라기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어..?"
그들은 동시에 발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았고 소리도 얼마 안 가 끊기고 말았다.
"..뭐였습니까?"
"글쎄. 아무래도 밖에서 난 것 같군."
의아하게 묻는 카이스에게 대꾸하며 제르닌은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머리를 굴려봐도 다른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카이스의 어깨를 툭 쳤다.
"어서 가자. 나중에 돌아가서 알아보고."
카이스는 어딘가 찜찜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를 따라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까의 소리 때문이었는지 두 사람의 걸음은 아까보다 한 층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또 얼마간이 지나고. 제르닌과 카이스는 또다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또 소리가.."
작게 중얼거리는 카이스에 제르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두 사람은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참으며 귀를 기울였다.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군. 이건.."
제르닌 역시 작게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쫃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카이스도 잠자코 따라갔다. 점점 가까워질수톡 소리도 명확해졌다. 두 사람의 걸음도 빨라져갔다.
젊은 여성의 흐느낌 소리. 어느 새 제르닌과 카이스는 전속력으로 지하 감옥의 좁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