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36. 첫 실전은 혹독하다(4)
급한 마음에 무작정 달렸던 처음과는 달리 제르닌과 카이스는 차분히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쪽으로 간 아시엘이 상당히 아쉬워졌지만-정확히는 그의 예리한 청각이- 별 도리가 없으니 그저 직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환영이 만든 기나긴 복도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은 환영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것.
사실 길을 막고 있는 벽을 그냥 통과해보려고도 했지만-보통의 환영 마법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상상과는 다르게 새로운 길이 나타나기는 커녕 딱딱한 벽에 부딪힌 이마만 알싸하게 아파와 결국 그냥 걷기로 한 것이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한데.. 통과할 수 없는 환영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어. 아니, 환영이 맞긴 한가?"
"환영이 아니라 최면 마법이라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최면? 제르닌이 호기심을 보이자 카이스는 예전에 아시엘에게 들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5서클의 고위 마법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제대로 걸리는 순간, 의식을 잃게 되고 최면에 걸린답니다. 실제로는 걷고 있지 않은데 걷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부딪히지 않았는데 부딪혔다고 느끼거나요."
대충 납득한 제르닌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건 두 사람에게 동시에 걸 수 있는 건가? 환영이든 아니든, 지금 우리는 같은 장소에 있는 건 확실하고."
"맞습니다. 이 마법은 한 사람에게밖에 걸지 못하고, 환영 마법과는 달리 시전자가 바로 앞에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시전자와 상대의 거리에 따라서 정신력의 소모가 다르다고 합니다. 멀면 멀수록 시전도 어려워지고 성공 확률도 떨어진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뭐지?"
"환영 마법과 최면 마법을 적절이 혼합한다... 고 하더군요. 뭐, 순전히 아시엘 녀석의 이론이지만요."
기억의 한쪽 귀퉁이에서 몇 년 전 아시엘이 흥분하며 떠들던 것을 자연스레 떠올린 카이스가 상상만 해도 복잡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마력이 담긴 수정, 그러니까 마수정을 이용하면 아티팩트를 만드는 요령으로 계속 마법 시전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상황도 잊어버린 채 제르닌이 흥미롭게 되묻자 카이스는 말을 이었다.
"마수정으로 가벼운 최면 마법을 유지해 두고 환영 마법을 펼치는 겁니다. 그러면 의식은 잃지 않고 계속 착각만 하게 되죠. 눈에 보이는 환영은 진짜다, 라고."
"그게 아시엘이 생각해 낸 거라고?"
제르닌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과거의 대대적인 흑마법사 토벌로 최근 세대는 마법사가 흔치 않아 연구가 미미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발상을 했다니 제르닌으로서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이스는 태연하게 옆의 벽을 톡 톡 두드렸다.
"뭐.. 겨우 12살짜리 꼬맹이가 했던 생각이니까 실현은 힘들 겁니다. 게다가 마정석 구하는 게 쉽지도 않고. 마정석으로 이만큼 넓은 범위에 마법을 시전한다는 것 역시 무리니까요."
마법과 기사학을 함께 공부한 아시엘과 붙어다녀서 그런지 카이스는 다른 기사들보다 마법 쪽에 밝았다. 제르닌 역시 대충 짐작은 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이후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귀를 기울이며 직진할 뿐. 그리고 곧 그들은 한 여자가 갇혀있는 감옥에 도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