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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39화 (3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39. 깊어지는 의혹(3)

긴장을 풀지 않고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지나던 카이스와 제르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감옥 밖까지 계단만 남은 시점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정체불명의 물체들이 그들의 앞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분명히 내려올 때는 없었던 것들. 제르닌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카이스가 내미는 등불을 받아들었다. 곧 그가 등불을 든 팔을 앞으로 살짝 뻗자 길을 막고 있는 것들의 윤곽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흡, 순간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며 몇 걸음 물러섰다. 빛이 물러나고 그것들도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제르닌과 카이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거... 분명 사람처럼.."

보였는데, 카이스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제르닌 역시 곤혹스러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눈앞의 장애물을 응사했다.

확실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그것은 여러 명의 사람이 부자연스럽게 축 늘어진 채 겹겹이 쌓여있는 형상이었다.

시체, 라는 소리가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꾹꾹 눌러담은 제르닌은 다시금 내 등불을 올렸다. 그리고-이번에야말로, 그들은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건..."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카이스와 제르닌은 얇게 신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있고, 몸통이 있고 팔다리가 있는 그것은 분명 인간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사람이라고 하기엔 거칠고 단단해 보이는 검은 외피가 그것이 시체라는 제르닌의 가정을 부정해주었다.

"..인형이로군."

하지만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체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제르닌과 카이스는 널부러진 흙-보다는 돌-인형들에 더더욱 가까이 다가서 불빛을 비췄다.

처음보다 확실하게 드러난 그것의 형체는 두 사람이 살짝 얼굴을 찌푸릴 정도로 괴이한 모양이었다. 눈 자리에 뻥뻥 뚫린 두 개의 구멍은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었고 움직이도록 만들어 둔 듯한 턱은 떡 벌어져있었다.

"절대로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네요."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간 얼굴로 카이스는 그것들 옆에 쭈그려앉았다. 그 무모한 행동에 제르닌은 그의 어깨를 잡고 말리려 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덜컥.갑자기 가장 위에 널브러져있던 인형의 몸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카이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관절을 괴상하게 꺾으며 몸뚱아리를 반쯤 일으킨 인형의 주먹이 정확하게 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빠악! 손을 쓸 틈도 없이, 둔탁한 타격음이 좁은 통로에 울려퍼졌다. 상상도 못 한 기습에 카이스는 그만 나가떨어져 복도의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크윽!"

"카이스!"

제르닌이 재빨리 다가왔지만 카이스는 턱에 느껴지는 알싸한 고통과 충격으로 어질어질해진 머리 때문에 대꾸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널브러져있던 인형들은 모두 끼릭끼릭,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점차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관절을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며 균형을 잡고 벽과 바닥을 디디며 일어서는 그것들의 모습은 심히 괴이했다.

곧 5개의 인형 모두 제르닌과 카이스 쪽 방향으로 안정감있게 두 발로 버티고 섰다.

".....!"

칫, 하고 혀를 차며 검을 뽑아든 제르닌은 카이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후배가 제정신을 차릴 때 까지 지켜낼 심산으로 그는 검에 검기를 일으켰다. 검신이 부르르 떨리며 기운이 요동쳤다. 그리고 곧 검에서 케빈의 것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짙푸른 빛이 배여나왔다.

덜커덕. 덜그럭. 인형들이 에워싸듯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제르닌은 근육을 더욱 긴장시키며 자세를 낮추고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태세를 취했다.

덜커덕. 덜커덕. 덜커덕. 턱관절을 마구 움직이며 움직이던 것들이 일순간 일제히 멈추는 듯 했다. 그리고 몇 초 후- 그것들은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듯 했다가, 다음 순간 제르닌의 코앞에 나타났다.

"......!"

제르닌은 급히 오러가 서린 검을 들어 그것을 세로로 베었다. 아니, 베려고 했다. 분명히 막았다, 고 생각하고 다른 쪽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르닌의 머릿속에 스쳤을 때였다. 검기에 베였어야 할 아무렇게나 휘둘러진 인형의 주먹이 정확하게 그의 배에 꽂혀들어간 것은. 빠아악!

"커헉!"

엄청난 격통에 제르닌은 허리를 푹 숙이며 비틀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 라는말.

분명 베었다고 생각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가 실수를 할 리도 없었고, 그 사실을 그 자신 역시 잘 알았다. 하지만 곧 또다시 날아오는 공격에 제르닌은 그 생각을 이어 갈 수도 없이 피해야만 했다.

다행히 뒤쪽에서는 카이스가 벽을 지탱하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르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귀하게 자라서 얻어맞은 건 처음이었을 텐데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군."

"돌아가신 아버지가 옛날에 제 뺨을 쳤을 때보단 낫습니다."

카이스가 검을 뽑으며 대꾸하자 제르닌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두 사람과 다섯 개의 돌인형의 조금은 이상한 대치가 시작되었다.

그 뒤는 상당히 일방적이었다. 카이스 역시 검기를 옅게나마 일으켰지만 곧 그 인형들의 몸뚱이는 '베이지 않는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검은 분명 돌인형을 노리고 베어들었지만, 허공을 휘젓거나 뒤쪽의 애꿎은 감벽을 박살 낼 뿐. 하지만 인형들이 가하는 공격은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타격을 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게 뭐야.."

제르닌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기사 경력동안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여기저기 얻어맞아 멍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고?"

제르닌의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케빈은 기가 차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새삼 입 밖으로 꺼내놓으니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듯 제르닌과 카이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딱한 꼴을 보이는 두 무뚝뚝한 남자들을 감싸며 아시엘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말도 안 돼는 상황이었잖아요. 이쪽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니... 게다가 그것들은 선배랑 카이스한테 고스란히 타격을 줬다면서요. 이제 단순히 환영마법이라고 할 레벨이 아니에요."

꽤 심각한 소년의 목소리에 두 사람을 야단치던 케빈도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헨슨은 살짝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마법들을, 어째서 대원들은 눈치채지 못 한겁니까?"

"그쪽에서 무슨 수를 쓴 거 아닐까요? 예를 들면 대원들에게 항마 아티팩트를 나눠줬다거나."

아시엘이 그럴싸한 추측을 내놓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티팩트는 꼭 액세서리 모양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죠.. 가령, 지금 헨슨 씨가 하고 있는 명찰이라던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살인범을 찾는 거야. 의외의 꽤 '큰' 복병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우리끼리 해결 할 수도 없잖아."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자 케빈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제르닌은 짜증스레 머리를 북북 긁었다.

"하지만 황성으로 가서 황제께 보고를 드린다고 해도 우리가 최대한 조사해 가는 게 낫겠지. 대공이 낌새를 채고 증거를 없앨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방은 침묵에 휩싸였다. 창문 밖 하늘이, 슬슬 해가 뜨려는지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시엘은 눈을 돌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헨슨과 자신의 친구 그리고 선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일단 오늘 할 일은 정해졌네요."

그 쾌활한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확 그에게로 쏠렸다.

아시엘의 아름다운 얼굴에 깃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활기찬, 장난스러운 '미소'. 그것은 한없이 천진난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 어른스럽고, 성숙했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 되어 네 사람은 그를 응시했다. 빠르게 밝아오는 하늘의 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소년과 방 안을 가볍게 감싸안고 있었다.

"선배, 이거 봐요."

아시엘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케빈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자료실에서 빼돌린 것들 중 하나였다. 케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서 종이를 받아들고,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시 아시엘을 올려다보았다.

"야, 이거.."

"아까 제르닌 선배가 이야기 할 때 읽다가 찾았어요."

아시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케빈이 이윽고 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자 헨슨과 카이스, 제르닌도 다가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단 한 줄의 짧은 문구였다.

[제 1사체 레베카 뉴튼. 첫 발견자 니엔 크라인]

"일단 그 니엔이라는 경비대원 아저씨를 만나고, 감옥의 함정이 대원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아낸다. 어때요?"

마치 헨슨 납치(?) 모의를 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미소로 아시엘이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이래저래 열 받는 상황에 조금 스트레스를 풀어도 괜찮겠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인듯 했다. 영문을 모르는 헨슨이 괴물이라도 보는 듯 한 눈빛을 보냈다. 안 좋은 예감이 찾아든 탓이었다.

"고마워, 카이. 데려다줘서."

아시엘은 자신의 방까지 부축해 준 카이스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혼자 갈 수 있다고 했는데도 발목을 다쳐 걷기가 불편할 거라며 굳이 여기까지 데려다 준 그였다.

"뭘... 헨슨 씨가 적어도 두 시간 뒤에야 대원들이 깨우러 올 거라고 했으니까 그때까지 푹 쉬어 둬."

카이스는 친구에게 염려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것을 느낀 아시엘은 장난스럽게 웃어보이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 마셔. 너도 얼른 가."

"...그래."

카이스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시엘은 그런 그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내고는 문을 탁,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후아..."

잠시 문에 기대어 서 있던 아시엘은 곧 비틀거리며 힘겹게 방 안쪽으로 들어가 거의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눕혔다.

피로가 마치 해일처럼 밀려왔다. 마법을 많이 사용해 마력과 정신력의 소모는 거의 한계치였고, 몸은 마치 납덩이처럼 무거워져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점점 몽롱해지는 머릿속, 반쯤 눈을 감은 아시엘은 의식의 저편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지금쯤 루아 이클립스의 붉은 제복을 입고 대공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을, 또 하나의 친구.

'..레이.'

물론 이번 일에 그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에는 그와 직접 부딪힐 날도 올 터였다.

하지만 아시엘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는 새털배게에 머리를 파묻고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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