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40화 (4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40. 파헤치다(1)

똑, 똑똑. 다소 거친 노크음이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좁은 방에 울렸다.

"....."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소년- 아시엘은 침대에 파묻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 이라기보단 두 시간 전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눕고 나서 계속 그 상태. 널브러진 소년의 온몸에 고스란히 묻어있는 먼지와 나무조각 파편 그리고 상처들이 어제의 그 사투가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똑똑. 재촉하듯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문 밖에서 한 남자의 굵은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기사님, 아침입니다."

그 소음이 거슬려 눈가를 찌푸리던 아시엘은 살짝 눈을 떴다. 눈꺼풀이 들리고 그 안에서 초첨을 잡지 못하는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여전히 반쯤 잠에 빠져 풀린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으-"

머리가 띵하게 아파왔다. 마치 전날 독주를 실컷 마시고 눈을 뜬 것처럼.

이마를 짚고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제대로 차리려 애쓰던 그는 잠시 후 말라비틀어진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좀 씻고 내려갈게요."

우려한 것과 같이, 아니 예상보다 훨씬 더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겨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되다니 정말 가공할 만 한 야근이었다는 것을 새삼 체감한 아시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는 밖의 대원이 문 앞에서 멀어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완전히 침대에서 나와 샤워실로 들어갔다.

다시는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찢기고 더러워진 후드는 파이어 마법으로 태워버리고 상의와 하의는 벗어서 곱게 개어 가지고 온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찬물로 10분만에 몸을 깔끔히 씻은 그는 깨끗한 새 셔츠를 꺼내 걸쳤다.

아시엘은 거울 앞에 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덜 마른 금발을 손으로 빗어 뺨의 검상을 교묘히 가렸다. 좋았어.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피로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뺨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어 번 치자 다소 창백했던 피부에 생기까지 돌기 시작했고- 너무 세게 쳤는지 얼얼했다- 눈은 총기로 반짝거렸다.

'난 어젯밤에 이곳에서 편안하게 푹 잠든 거야. 그래서 침입자 소동도 몰랐어.'

완벽하게 고단함을 숨겨버린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리를 절지 않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여, 아시엘. 잘 잤어?"

아시엘이 말끔한 모습으로 계단에 모습을 나타내자 케빈은 속으로 작게 감탄하며 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제르닌 선배도 좋은아침!"

아시엘은 생긋 웃으며 아침인사를 건넸다. 저 애는 연기력이 대단한 걸까, 체력이 대단한 걸까- 케빈은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헷갈려하면서도 아무 대꾸 안 하고 멍하니 앉아있는 제르닌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아아."

그에 제르닌은 간단하게 고개만 까닥거리며 나름 반가움을 표했다. 그들은 곧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대원까지 합해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고 잠시 후 카이스가 뒤늦게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그런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은, 정말로 지난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했다.

식당 안은 이미 아침식사를 시작한 경비대원들로 바글바글했다. 그 속에서 아시엘은 헨슨을 발견했지만 곧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 했다.

"어젯밤은 편안하셨습니까?"

어느 새 다가왔는지 그들의 정면에 경비부대장, 에슈튼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앉으라는 듯 앞의 테이블을 공손히 가리키는 그의 손짓에 네 사람은 순순히 그 곳에 앉았다. 그리고 곧 뒤이어 자신도 앉은 에슈튼은 이 곳에서 일하는 듯 보이는 앞치마를 두른 여자에게 식사 좀 부탁해, 하고 점잖게 말했다.

그 모습들이 어쩐지 모두 보여주기 위해 꾸민 듯 해 아시엘은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하지만 곧 남말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러 폈다.

에슈튼에게 신경을 꺼버린 아시엘은 그대신 식당 내부를 살폈다.

식당은 기다란 테이블이 수없이 열을 지어 서 있는 모습. 루카인 아카데미의 학생식당을 연상시키게 하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접시를 들고 배식받는 것 대신에 일하는 하녀들이 직접 식사를 가져다 주는, 그런 시스템인 듯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아시엘은 누군가가 자신의 비어있던 옆자리에 의자를 빼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시끄럽게 잡담을 나누는 네 명의 대원들. 어쩐 일인지 모두 얼굴에 반창고며 여기저기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모양새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시엘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막 자리에 앉으려던 그들은 뒤늦게 아시엘네를 발견했는지 순간 멈칫  하다 케빈이 친근하게 씨익 웃어보이며 앉아, 앉아 하고 손짓하자 마음놓고 자리에 앉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기사님."

머리에 붕대를 감고 왠지 허리 부근이 불편해보이는 대원이 아시엘의 옆에 앉으며 아까의 인사에 답했다.

"그나저나 그 붕대는 왠 거에요? 네 분 다."

"아아.. 어제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꽤 소란스러웠죠..어제 아무 소리도 못 들으셨습니까?"

아시엘의 물음에 답한 것은 그 대원이 아니라 에슈튼이었다. 어느 새 하녀가 가져다 준 스프에 빵을 찍으며 짧게 말한 그는 스프를 후룩, 마시고 제르닌과 케빈 그리고 카이스와 아시엘을 그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분명 일부러 떠 보는 거군. 네 사람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그들이 아니었다.

"침입자?"

케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을 뭘로 알아들었는지 썩어가는 표정의 에슈튼 대신 아시엘 옆의 남자가 대답했다.

"어젯밤 영상석실에 도적이 침입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다 이 꼴이죠."

"그래서, 잡았어요?"

"잡지는 못 했지만 보기 좋게 쫒아냈답니다, 꼬마 기사님. 뭘 훔쳐간 것도 없는 것 같더라구요."

잘난 체하며 가슴을 펴보이는 남자 앞에서 아시엘은 속으로 하하.. 하고 웃었다. 하긴 영상석이고 자료고 죄다 깨지고 찢어졌으니 뭐가 없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속을 알 리도 없고, 지금 자신의 상관의 표정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 제로 대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2인조였어요. 그 중 한 놈은 무려 검기를 쓰더라고요! 한 사람은 마법사였던 것 같고. 마법 때문에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제가 돌진해서 베어버렸습니다."

네놈이었군!! 순간 카이스와 케빈 그리고 제르닌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하지만 아시엘은 순진무구하게 웃으며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어디를 베었는데요?"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하도 어두워서 말이죠. 하하."

호탕하게 웃는 그. 아시엘은 흐음- 하고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벤 놈도 상처가 어딘지 모르니 들킬 일은 없겠다며 안심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옆의 남자가 그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쳤다.

"뭘 으스대냐 멍청아! 제일 먼저 나가떨어졌으면서. 기사님, 이놈 말 믿지 마십시오."

"야! 그래도 마법을 저지시킨건 나라고?"

"네가 그 때 제대로 처리했으면 그렘이 나가떨어질 일도 없얼을 거 아냐."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잠시 그들을 말려보려던 아시엘은 곧 포기하고 눈앞의 빵을 뜯기 시작했다.

마치 암컷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소란을 피우는 동물들같은 두 대원. 그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이미 신경을 끄고 식사 중인데- 그것보다 그 처리해야 했을 마법사가 그녀석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은 케빈은 한 마디를 던졌다.

"쫒아냈다, 라기보단 그냥 보기좋게 놓친 거 아냐?"

"ㅇ,ㅇ, 아니, 그 절대로 아닙니다!"

두 사람은 바락 소리를 지르다가 맞은편, 케빈의 옆에 앉아있던 대원에게 정강이가 걷어차였다.

"기사님들 앞에서 쪽팔린다, 진짜 좀! 앉아!"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그. 그리고 곧 2차전이 이어졌고 케빈 역시 그들에게서 관심을 꺼버리고 점점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에슈튼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그 침입자들이 누군지는 알아냈나?"

제르닌이 관심없다는 듯 지나가는 말처럼 묻자 에슈튼은 겨우 얼굴을 정리하고 대꾸했다.

"아직은요.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겠지요."

"그렇겠지. 그쪽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나?"

"예. 저희들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묘하게 가시가 돋친 음성. 제르닌은 피식-물론 에슈튼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게- 웃고는 다시 빵덩어리에 집중했다.

그 때. 우당탕탕하는 우렁찬 소리에 깜짝 놀라 아시엘은 고개를 들고 식당 입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예상대로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여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하며 정신없는 모습으로 일행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돌진해왔다.

"ㅂ,부대장님! 큰일났습니다!!"

"뭐야?"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에슈튼은 신뎡질적으로 다그쳐 물었다.

"어젯밤 지하감옥에도 침입자가 있었던 듯 합니다!"

쾅!! 에슈튼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세게 때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스프며 빵접시들이 격하게 흔들렸다.

"자세히 말 해!"

"ㄱ, 그러니까 오늘 아침, 죄수 배식을 위해서 들어갔던 대원 한 놈이 감옥 입구 쪽이 작살이 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황했는지 대원은 심하게 횡설수설했다. 물론 그럴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지난밤에 보초를 서던 두 명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앞장서!"

흉흉한 기세로 부대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대원은 얼굴이 새파래지며 앞장서려했다. 아시엘은 그들을 놓칠세라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기, 저도 함께 가도 돼나요?"

"네?"

어리벙벙한 얼굴로 되묻는 대원. 그에 반해서 에슈튼은 아시엘을 잡아먹을 듯 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경험도 없고 궁금하기도 해서 견학하고 싶어서요."

잘했어! 기사들은 한마음으로 외쳤다- 물론 속으로만-. 역시 상황판단은 연륜을 지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였다.

아시엘의 흔들림없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옆의 대원은 부대장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았다. 함께 가면 안됩니까, 라는 애달픈 메세지를 담은 눈빛으로.

결국 케빈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어제 봤다시피 이녀석이 많이 미숙하거든. 기사가 된지 이주일밖에 안 됬어. 현장감각도 익힐 겸 데려가주면 어때?"

에슈튼은 입을 꾹 다물고 케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거절헐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신바람이 나서,아니 정확히는 난 척 하며 식당을 나서는 부대장과 대원을 졸졸 따라가는 아시엘을 보며 남겨진 세 사람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거짓말은 아니지. 정말로 기사가 된 지 이주밖에 안 된 녀석이니까-경험도 없고. 그나저나 역시 아시엘이네."

"아마 우리가 미숙해서, 란 식으로 핑계를 댈 줄 예상했겠지. 그러니까 자신이 나선 거고."

케빈의 말을 이어 제르닌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의심 사지 않고 감옥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확연히 모자라고 힘 없어보이는 그가 제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아마도 치열할 오늘 하루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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