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42. 파헤치다(3)
뚜벅뚜벅. 좁은 계단에 4사람의 딱딱한 부츠소리가 울려퍼졌다.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아까 에슈튼에게 침입 사실을 알리려 달려왔던 대원이 아시엘에게 그렇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시엘은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정체불명의 마력은 점점 진해졌다. 그에 따라 불쾌감도 점점 심해졌다. 게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뇌의 깊은 곳을 쑤시는 듯 한 두통까지 엄습해 와 일단 넘어지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 만으로도 고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이 마력. 분명히 어디선가..'
이런 기운은 분명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주 옛날에, 먼 옛날에 어디선가 접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
'착각이 아니야.'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짚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졌다. 잠시 후, 그런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하나의 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타는 마을, 붉은 하늘에 피어오르는 검은연기와 피웅덩이, 어디에나 널려있는 시체.. 그리고 그 지옥 가운데에서 깔깔 웃고있는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
"아시엘 경!"
헨슨의 다급한 외침이 아시엘의 귀에 꽂혔다. 순식간에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지만-자신도 모르는 새 발을 헛디뎠는지 몸이 균형을 잃고 반쯤 기울어진 상태.
"어..?"
아시엘은 놀라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무슨 수를 쓰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계단을 구르기 일보 직전, 급히 팔을 뻗은 헨슨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시엘의 세상이 빙글, 돌았다. 몸이 푹신한 뱃살에 부딪히는 충격이 느껴졌고 다음 순간, 아시엘은 엉덩방아를 찧은 헨슨의 품에 안겨있었다.
"에.."
아시엘은 얼이 빠져 잠시 그대로 헨슨의 위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발딱 일어나 몇 걸음 물러섰다.
"죄,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으십니까?"
돌계단에 찧은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헨슨이 몸을 일으켰다. 아시엘은 걱정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 살짝 웃어보이고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 에슈튼과 이름 모를 대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발 밑이 미끄러워서 헛디뎠어요."
"괜찮습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에슈튼은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던 대원 역시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아시엘은 헨슨의 팔을 꼭 붙들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저..괜찮으십니까?"
헨슨은 팔의 온기를 의식하며 아시엘을 내려다보며 소곤소곤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떤 일에도 내색 않던 그가 자신에게 매달리자 상태가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한 것이다.
"멀쩡해요, 덕분에."
아시엘 역시 앞서가는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제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
"예?"
"아까 여기 들어올 때부터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살짝 어지러웠거든요.. 그런데 헨슨 씨가 잡았을 때부터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요. 더불어 내 마력도 모이지 않고.."
불쾌감 역시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닿자 땀이 식으며 기분이 좋아지는 듯 한 느낌.
그 말은 곧 어젯밤 아시엘의 말대로 대원들이 모두 마력을 흩어버리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말임과 동시에 루아 이클립스가 개입했다는 것이 된다.
아시엘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 관한 일은 빼더라도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와.. 그나저나 아주 박살을 내 놨던데요? 선배, 카이스."
현기증이 난다며 에슈튼보다 지하감옥을 빠져나온 아시엘이 알아낸 것을 간단하게 전한 후, 제르닌과 카이스에게 던진 첫 마디였다.
계단의 마지막 부분이 깨어져 있었고, 그리고 벽에 거대하게 남은 검상, 그리고 부러진 철창. 아시엘은 그게 단 일격에 생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영상석실을 초토화시킨 네녀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르닌이 무표정 일색으로 그렇게 대꾸하자 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방으로 돌아오며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된 영상석실을 본 것이다. 서가를 넘어뜨리라고 한 아시엘이나, 한술 더 떠 아예 그것의 아랫단을 베어 넘겨버린 케빈이나 과격한 건 똑같다고 생각하며 제르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서 영상석 확인이나 하자. 그래야 현장을 찾든 말든 하지.. 그리고 그 첫 발견자, 니엔이란 녀석도 잡아야 한다고?"
케빈이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듯 손뼉을 두어 번 치며 말했다.아시엘은 겉옷의 주머니를 뒤져 얼른 영상석을 꺼냈다.
곧 카이스에 의해 불이 꺼지고 문과 창문을 꼭꼭 닫아버린 방은 어두컴컴해졌다. 그 가운데에 아시엘은 영상석을 작동시켜 방의 한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우웅- 작은 돌에서 은은하게 스며나오던 푸른 빛이 점젇 더 진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화악 퍼지며 공중에 하나의 영상을 띄웠다.
가장 먼저 비춰지는 것은 허물어진 오래된 성벽과 흐르는 강물, 그리고 그 근처에 드문드문 심겨진 나무였다.
"강가..네요."
카이스의 중얼거림. 네 사람은 동시에 머릿속으로이곳의 지리를 떠올렸다. 옛날 이 제국이 존재하기 전에 세워졌었던 성벽 유적과 하천이 이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딱히 니엔이란 놈을 족치지 않아도 괜찮겠네. 현장을 알아보려고 한 거지?"
"그것도 그렇지만.. 어쨌든 계속 봐요."
케빈이 팔짱을 끼며 묻자 아시엘은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속 시원히 말하지 않는 그 모습에 케빈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곧 주변 광경을 한 번 비춘 영상의 각도가 낮아지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한 여성을 보였다.
가슴을 정통으로 찔려 피가 흥건해진 원피스를 입고 자신이 흘린 피웅덩이 가운데에 누워있는 붉은 머리의 피해자. 차마 눈도 감지 못했는지 빛을 잃어버린 그녀의 눈동자는 공허하게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앞에서 찔렸어. 강도나 그런 놈들은 아니겠군."
가만히 여자의 시신을 바라보던 제르닌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만약 뒤에서 습격당했다면 앞으로 고꾸라져 시신은 엎드린 채 발견되었을 터였다. 게다가 가슴 부근 외에는 눈에 띄는 상처도 없으니 그녀는 분명 방심한 채로 자신의 정면 가까이에 있던 사람에게 찔렸다는 사실을 그들은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짧은 침묵 후 제르닌에 이어서 케빈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 남자친구란 녀석이 의심스럽네.. 원래 죽일 작정으로 만났던지 아니면 '헤어지자'는 말에 우발적으로 저질렀던지.."
"아니면 애인을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났을 수도 있죠."
"뭐?"
제르닌과 케빈은 영상에서 눈을 떼고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냥 가정이에요. 뭐.. 그 남자친구가 죽였을 수도 있고, 방금 말 한대로 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치정싸움일 수도 있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속 시원히 말하지 않는 그 모습에 두 남자는 더더욱 의아해졌지만 그렇다고 재촉하지는 않았다. 카이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다시 여자의 시신에 주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빛이 살짝 사그라들었다가 비춰지는 공간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골목길의 한 구석인 듯 했다.
"슬럼가로군. 여기도 이 근처야.. 골목이 하도 많아서 어딘지 찾으려면 꽤 오래 걸리겠지만."
이번에는 케빈의 말이었다. 곧 영상이 빙글, 돌더니 또다시 시신을 비추었다.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친우의 머리를 위로하듯 가볍게 툭툭 두드려 준 카이스가 짧게 말했다.
"부패했군."
그의 말대로였다. 사망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시신은 머리와 팔 다리의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몸은 뼈와 반쯤 썩은 장기가 다 드러나 있었고 얼굴도 해골이 보일 만큼 삭아있었다.
"헨슨에게 듣기는 했지만 영 거북한데."
케빈조차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는 눈을 돌리지도 않고 정확히 시신의 심장 부근에 박혀 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박혀있는데, 혈흔은 없네."
"아까의 피해자와의 공통점은 없는 것 같군."
차분하게 케빈의 말에 대꾸한 제르닌은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꼼꼼하게 영상을 살폈다. 하지만 영상석이 그리 질 좋은 것은 아닌지라 세세한 구석은 부옇게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죽은 뒤에 칼을 꽂은 건가. 손잡이에도, 날에도 피가 튄 흔적은 보이지 않는군."
케빈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다면 역시 연쇄살인은 절대 아냐. 이 여자, 옷차림을 보아하니 부랑자같은데.. 분명 어디서 죽어 있는 거에다가 범인 놈이 수사에 혼란을 주려고 칼을 꽂았겠지."
-이렇게 쉽게 간파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말이야. 하는 뒷말을 그는 꿀꺽 삼켰다.
녹화된 것이 끝났는지 빛이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영상은 점점 흐릿해졌고 곧 스르륵, 스며들듯 영상석 속으로 사라졌다.
카이스는 다시 햇빛을 막아놓은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확 열어제꼈다. 순식간에 방 내부는 환한 아침햇볕으로 가득 찼다.
답답한 공기가 밖으로 나가고 신선한 산소가 바람과 함께 들어오자 제르닌은 후-하고 심호흡을 하고, 후배들을 바라보았다.
"다녀올테니, 너희는 여기 있어."
어딘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아시엘과 카이스는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런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제르닌은 케빈을 향해 말했다.
"첫번째 여자가 발견된 곳만 가도 괜찮을 것 같군. 3달이나 지났으니 별 소득은 없겠지만.."
두번째 시신은 아예 배제해도 상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제르닌의 말에 케빈역시 동의를 표했다. 잠시 동료들을 바라본 제르닌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한 뒤에 망설임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탁! 강한 손으로 창틀을 붙잡고 몸을 날려 옆의 가게 지붕을 밟은 그는 다시 한 번 뛰어내려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케빈 역시 두 사람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용의자가 경비대 내에 있는 이상 최대한 몰래 움직여야 했다. 잠시 경비대원이 눈치채지 않았는지 동태를 살피던 그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강가 쪽으로 가는 골목길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멀어져가는 선배들을 응시하던 두 사람은 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닫았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게."
카이스는 아시엘의 머리를 위로하듯 쓰다듬어주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런 친구를 사납게 노려보며 손을 치운 아시엘은 무어라 투덜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 때,
"뭐 하십니까?"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낯익지만 결코 반갑지는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잠그자 않았던가?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휙 제껴 그쪽을 바라보았다. 에슈튼. 그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로 아시엘과 카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