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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44화 (44/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44. 파헤치다(5)

잠깐의 침묵 후, 에슈튼이 입을 열었다.

"대장님, 말씀이십니까."

그의 얼굴은 또 한차례 일그러졌지만 그것을 신경 쓴다면 아시엘이 아니었다.

"네. 별 문제는 없겠죠?"

생긋. 아시엘은 여전히 사람 속 긁는 -하지만 평소에 보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뚫을 기세로 노려보던 에슈튼은 옆에서 쩔쩔매는 카이스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어디에 계신데요?"

아시엘이 꽤 집요하게 달라붙자 에슈튼의 표정은 더더욱 안 좋아졌다. 그의 갈색 눈에 깃들어 있는 것은 당혹감과 불안감. 그것을 정확하게 잡아낸 아시엘은 계속해서 에슈튼을 직시하며 모든 신경을 그를 향해 곤두세웠다.

또다시 몇 초간의 침묵. 마침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에슈튼은 인상을 팍 쓰고 차갑게 내뱉았다.

"저도 모릅니다."

쾅! 그리고 그 직후 문이 거세게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귀를 때리는 거친 소음에 어깨를 움찔한 아시엘은 잠시 에슈튼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성질이래."

카이스는 나라도 성질나겠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입 안으로 꿀꺽 삼키고 대신 눈치를 보며 그의 옆으로 살짝 다가갔다.

"아시엘."

"왜?"

고개를 살짝 틀어 카이스를 바라보는 아시엘은 방금의 살벌했던 대화에서 원하는 것을 건진 듯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 친구의 얼굴을 내려다 본 카이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넌 뭔가 알고 있지?"

"음.."

아시엘은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카이스에게서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하지만 대충 짚이는 데는 있어."

"뭔데?"

"미안하지만 가르쳐 줄 수 없어."

응? 단호한 그의 말에 카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라는 물음이 듬뿍 묻어나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아시엘은 피식 하고 힘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보지 마. 어차피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까."

결국 알게 될 때까지 말 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 입맛이 좀 썼지만 카이스는 더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똑똑 하고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소년은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창가로 쪼르르 달려가 커텐을 걷고 창문을 열어제꼈다.

"끄응차!"

그와 동시에 손 하나가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와 창틀을 붙잡았다. 그리고 곧 다른 쪽 팔도 들어오고 그 다음, 다리 한쪽을 창문에 걸친 채 반동을 이용해 펄쩍 뛰어오른 케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휴-!"

그가 방바닥에 퍼질러앉자 마자 제르닌도 낑낑거리며 힘겹게 창틀을 밟고 올라와 안으로 들어섰다.

아시엘은 3층까지 올라오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에게 재빨리 물 을 한 컵씩 건네주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고맙다는 듯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준 케빈은 물을 한꺼번에 입으로 털어넣고 입을 열었다.

"아, 살 것 같다. 별로 건질 것도 없더라고."

"그래요?"

살짝 실망한 듯 어깨를 떨어뜨리는 아시엘. 그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물을 들이키고 있던 제르닌은 컵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냈어."

"뭔데요?"

다시금 아시엘의 눈이 반짝거렸다. 제르닌은 그 모습이 웃긴지 드물게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건 당시, 현장에는 범인과 피해자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이 더 있었을 거다. 그 흔적을 발견했지."

"아!"

그는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더더욱 제르닌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알았어, 잠시만."

제르닌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종이 하나를 끌어다 곱게 펼치고 제복 앞주머니에서 펜 하나를 꺼내들어 슥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누워 있던 곳은 세모. 수풀은 대충 뭉글뭉글한 구름처럼 그리고 허물어진 성벽은 네모로 깔끔하게 표시한 후 펜 뚜껑을 탁, 하고 닫았다.

"대충 이런 모양이었다."

정면을 기준으로, 피해자의 뒤쪽에 성벽과 강이 있었고 그보다 조금 떨어진 오른쪽에 다른 사람이 숨어있었던 걸로 예상되는 수풀이 자리잡고 있었다.

"흐음..아."

아시엘의 옆에서 고개를 숙여 종이를 주의깊게 살피던 카이스는 문득 생각나는 사실에 허리를 펴고 옆에 주저앉아있는 케빈을 바라보았다.

"아까 에슈튼이 찾아왔었는데."

"뭐?!"

케빈은 후다닥 몸을 일으켜 놀란 눈으로 두 소년을 바라보았다. 제르닌 역시 마찬가지.

"뭐라고 하던데?"

"아니, 그냥.."

"선배님들 어디 갔냐고 묻던데요."

대충 얼버무리려는 아시엘의 말허리를 끊고 카이스가 끼어들었다. 옆에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는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그래서. 어떻게 했지?"

제르닌이 다그쳐 묻자 결국 아시엘이 어쩔 수 없이 아까의 상황을 간략하게 전하자 제르닌과 케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뭐, 잘했어..그나저나 경비대장을 못 만나게 한다고?"

"네."

케빈의 말에 아시엘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옆에서 제르닌이 턱을 쓸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기사의 권위까지 내세우면서 말 했는데도 그렇다면. 뭔가가 있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장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했던가 아니면 진짜로 찾아오지 못 할 상황일지도 모르죠."

그 찾아오지 못 할 상황이 정말로 출타 중이어서 그런 건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아시엘은 뒷말을 속으로 꿀꺽 삼키고 점점 가라앉아가는 분위기를 띄우려 사뭇 가볍게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건 나중에 알게 되겠죠. 범인 찾는데 관련이 있던지 없던지 말이에요."

배제해서도 안돼고, 파고들어서도 안 된다. 그 사실을 네 사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뭐, 일단 이건 밀어놓기로 하고. 문제는 그 사건현장에 있었던 제 3의 인물인데. 어쩌면 그쪽이 범인일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유일한 목격자 정도라거나."

케빈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화제를 바꿨다. 계속 침묵하고 있던 카이스도 슬쩍 끼어들었다.

"아니면 연인이라는 사람과 함께 범행을 저지른 공범일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제르닌. 하지만 곧 그들은 그렇게 추측만 무성히 늘어놔봤자 답은 나오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제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단 정리라도 해 볼까."

결국 한숨을 푹 내쉰 케빈이 약도를 그렸던 종이를 뒤집어 펜을 들어 여태까지 알아낸 것을 순서대로 쓰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레베카란 여자가 시신으로 발견됨.. 가슴에 칼이 꽂힌 채로."

케빈의 삐뚤삐뚤한 악필이 종이 위에 점점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10분 후, 누런빛깔이 나는 면 위는 틈이 없을 정도로 글씨가 가득 찼다.

1. 레베카가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됨. 가슴에 칼이 꽂혀있었음.

2. 완전히 부패된 여자의 시신이 골목에서 발견. 마찬가지로 칼이 꽂혀있음.

3.세달동안 사건 방치. 우리가 오기 직전 레베카의 친구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지만 누명으로 판단.

4.경비대의 불협조. 지하감옥의 수상한 마법. 레베카를 처음 발견한 자는 경비대원 니엔.

5.사건 현장에서 제 3의 인물이 있었던 흔적 발견.

"..이것뿐인가. 새삼 막막해지는군."

제르닌의 짧은 감상이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인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우울한 공기를 비집고 아시엘이 손가락을 꼽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니엔 씨를 만나야 해요. 물론 에슈튼 몰래. 그리고 지하감옥도 최대한 알아봐야 하고."

"맞아. 제일 급한 건 그쪽이지. 그런데 어떻게?"

케빈의 물음에, 아시엘은 대답 대신 씨익 입가에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세 사람은 엄습하는 불안감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 불안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미 막나가는 중인데요, 뭐. 새삼 경비대원 하나 더 족친다고 별 일이나 있겠어요?"

"..."

발랄하게 말하는 아시엘을 황당하게 바라보는 그들. 하지만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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