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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45화 (4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45.파헤치다(6)

'-그러니까, 헨슨 씨가 좀 도와주세요.'

뭐가 그러니까, 라는 겁니까. 듣고 있지 않을 상대에게 한껏 투덜거리면서도 헨슨은 터벅터벅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약 20분 전. 빵덩어리로 대충 점심식사를 때우고 다시 근무지로 돌아가려 했던 헨슨은 네 명의 기사들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영문도 모른 채 구석진 곳으로 질질 끌려들어가 가장 처음 들은 말은 '부탁이 있어요.' 란, 아시엘의 공손한 말.

황당해하는 그에게 백금발의 어린 기사가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린 지령은 '니엔을 정해진 장소까지 유인해 데리고 오는 것' 이었다.

엑?!? 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반항해 보았지만 그 뿐. 안 하면 죽일 기세로 흉흉하게 노려보는 카이스와 제르닌, 케빈 때문에 헨슨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아무튼 전부 다 아시엘 경한테 너무 무르다니까.'

투덜거려 봤자 이미 코가 꽤인 헨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 니엔은 아시엘과 케빈의 손에 박살난 영상석실의 조사를 맡고 경비대 내부에 있었다. 기사들이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얼씬도 안 하겠다 다짐했거늘.

새삼 서글퍼지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헨슨은 영상석실로 가는 걸음을 빨리 했다.

익숙한 복도로 들어서자 마자, 활짝 열린 문 틈으로 엉망이 된 영상석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틈을 살피고 있는 몇 명의 대원들도.

넘어져 있는 서가와 벽과 바닥에 뻥뻥 뚫린 구멍이 어제의 그 상황이 새삼 피부에 와닿아 헨슨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두 사람-아시엘과 케빈-에 의해 뻗어나간 동료들에게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넨 그는 문 바로 앞에서 쓰러진 서류함 하나를 밟고 영상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 니엔."

헨슨의 부름에 장갑을 끼고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있던 한 명의 대원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보다 확연히 창백해진 얼굴색에 혀를 찬 헨슨은 반 도막 난 서가를 넘고 대충 걸쳐진 작대기 하나를 밟고 니엔에게로 다가갔다.

"헨슨?"

의아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몇 걸음 다가오는 동료에 헨슨은 양심이 쿡쿡 쑤시는 것을 느꼈다. 아, 불쌍한 중생이여.

부디 이 심약한 녀석을 기사들이 살살 다뤄주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잠깐 나 좀 따라와봐. 부대장이 부른다." 란 말 따위를 하는 자신이 조금 싫어지는 헨슨이었다.

별 의심 없이 헨슨을 따라 나섰던 니엔은 점점 갈수록 짙어지는 불안감에 결국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헨슨. 정말로 에슈튼 님께 가는 거 맞아?"

"당연하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넌."

헨슨은 가슴에서 양심이 "이 미친놈아, 맞긴 몽둥이로 맞아?" 하며 마구 찔러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뭐, 나도 어쩔 수 없다고.. 기사님들도 사람이니까 모질게는 안 하시겠지.'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도 어쩐지 정말로 그들이 니엔을 부드럽게 대한다면 자신만 억울해 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구석으로 가. 그리고 여기 3층이잖아."

"그, 글쎄! 몰라, 나도."

모른다, 나는 몰라. 헨슨은 미친듯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니엔을 앞으로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전날 밤 자신이 잡혔던(?) 문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자신의 가련한 동료를 바라보았다.

"뭐야..?"

니엔은 갑자기 불안해져 친구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헨슨은 딱 한 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미안."

싱긋 웃으며 상큼하게 사과를 한 그는 다음 순간 파바바박!! 하고 달려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야, 야!! 헨슨! 잠깐만!!"

니엔은 다급하게 헨슨을 부르며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손은 허공만을 한차례 휘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놈이 언제부터 이리 재빨랐나, 싶을 정도의 속도로 헨슨은 점점 멀어져 이젠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뭐야.."

졸지에 혼자 남겨진 꼴이 되버린 니엔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대체 자신을 찾는다는 부대장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 전에 정말로 헨슨은 자신을 에슈튼에게 한내한 게 맞나?

갑자기 니엔은 초조해졌다. 그가 자신을 찾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혹시 그 일 때문인가."

"그 일이 뭔데?"

그 때. 들려올 리 없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헉..!"

니엔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홱 돌렸다. 하지만 고함을 지를 틈도 없이 그는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팔에 목을 붙들리고, 입이 막혔다.

"....웁..?"

당혹스러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수많은 물음표 뿐. 방금 전에 헨슨이 한 의미 모를 사과와 그의 수상항 행동들이 뇌리에 스쳐가 그는 마구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어마어마하게 억센 손들에 의해 질질 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끄아악!"

철푸덕.

나무바닥에 인정사정없이 패대기쳐진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제복을 입은 네 명의 기사들. 단박에 니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세, 셀레니스.."

아주 작은 소리가 그의 새파래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르닌과 귀가 예민한 아시엘에게만 들릴 정도.

아시엘은 빙긋 웃어 보이고는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사일런스."

보이지 않는 마나의 장벽이 방을 부드럽게 감쌌다.

니엔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입이 벌어지기는 하는데 계속 아, 아, 하는 소리만 날 뿐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쯧, 진정 좀 해. 잠깐 얘기나 하자는 거니까."

결국 케빈이 혀를 차며 여전히 바닥에 퍼질러져 있는 니엔을 억지로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덜덜덜덜. 그는 의자에 앉아서도 안절부절하며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떨었다. 자신들을 피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기사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봐, 정신 좀 차려봐."

"내가 죽이지 않았어요. 내가.."

케빈의 목소리에 니엔은 더더욱 덜덜 떨어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그들은 더더욱 황당해졌다. 그저 처음 발견한 경위 같은 것들을 물어보려 했을 뿐이었건만- 이 과민 반응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의 패닉 상태에서 나온 '죽이지 않았다'는 말은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것. 케빈, 제르닌 그리고 카이스와 눈빛을 교환한 아시엘은 니엔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말로, 당신이 죽이지 않았어요?"

와락!

아시엘이 일부러 말끝을 늘리며 또박또박 말하자, 니엔은 눈을 홉뜨고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

"아니라고 했잖아! 난 아니라고!"

창백했던 얼굴이 시뻘개지며  아시엘의 작은 몸을 마구 흔드는 그. 제르닌과 카이스, 케빈은 재빨리 검을 뽑아들려 했지만 아시엘은 손을 저어 그들을 저지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바짝 다가와있는 니엔의 얼굴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니엔 씨."

그는 이름을 부르는 것 이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고요한 붉은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차자 니엔은 순간적으로 치솟았던 열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아시엘의 옷깃을 꽉 잡고 있던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결국 소년을 던지듯 놔 버리고 니엔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제르닌은 그 힘에 비틀거리는 아시엘을 붙잡아 주었다.

"죄송합니다.. 그만 흥분해서."

"아니에요. 살짝 떠보기만 했는데 너무 격한 반응이라 좀 놀랐을 뿐이에요."

그 태연자약한 목소리에 니엔은 고개를 들어보였다. 그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떠봐..요?"

"네."

아시엘은 생긋 웃으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에 니엔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그럼 이야기 해 볼까요? 그 죽이지 않았다는 여자에 대해서요."

그 이상으로 발랄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처음보다 더더욱 창백해진 니엔은 물론이고 같은 편인 세 기사들조차 순간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는 그 '악마의 미소'.

찰칵.

마침 그 타이밍에 눈치를 살피며 살짝 방으로 들어왔던 헨슨은 그대로 살그머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미안.'

다시 한 번 속으로 사과하며 그는 아까 그랬던 것 처럼 뒤돌아 전속력으로 복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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