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47. 열쇠(2)
"에, 에슈튼 씨가요?"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한 아시엘은 니엔 쪽으로 불쑥 상체를 들이밀며 재우쳐 물었다. 니엔은갑자기 다가온 소년의 얼굴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예.. 너무 겁나서 쓰러져있는 레베카를 안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에슈튼 씨가 제 어깨를 짚더니 '이 피는 뭐냐' 고.."
차가운 불꽃이 일어나는 듯 한 아시엘의 눈을 피해 니엔은 살짝 물러섰다. 카이스는 친구의 어깨를 살짝 잡아 제자리에 바로 앉혔다.
"그래서요?"
"그 분이 절 다그치시더군요.. 네가 죽였나고. 그래서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했는데 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거라면서.."
하아. 약속이나 한 듯 네 기사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에슈튼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타이밍 잘 맞춰 온 호구 부하 하나를 월척이오, 하고 낚아 올린 것 아닌가. 이제야 마구 엉켜 있던 것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시엘은 두통을 가라앉히려 미간을 주물렀다.
"그럼 두 번째로 발견된 시신은요?"
"아뇨.. 그건 몰라요.. 진짜로!"
"진짜?"
케빈이 미심쩍다는 눈빛까지 보내자 그는 더더욱 창백해지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약간의 협박에 지레 겁먹고 할 말 못할 말 다 뱉어낸 바보같은 경비대원을 잠시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베테랑 기사, 제르닌은 골이 아픈지 뒷목을 잠시 쓰다듬다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렇다면 역시 수상한 건 에슈튼이군. 하지만 확실한 뭔가가 없어.."
"에슈튼 씨가 수상하다뇨! 그 분은 절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지만 하지만 곧 그는 아시엘이 수면마법의 시동어 '슬립'을 중얼거리자마자 의자에 뻗어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아시엘은 곧 자신의 금발을 마구 헤집으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일단 진범이 그놈이라면 일부러 니엔 씨가 약속시간에 늦게 일을 잔뜩 맏겨놓고 그 자리에 대신 나가 레베카씨를 죽였다. 그리고 숨어 있다가 니엔 씨가 오자 잽싸게 튀어나가서 헛소리를 주절거렸다는 거 아니에요."
이제 존칭이고 뭐고 없는 말투에 세 사람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시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척, 꼬았다.
"일단 아까부터 바깥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헨슨 씨부터 데려오죠. 신경쓰여 미치겠으니."
그 말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카이스는 자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벌컥 열고 알짱거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헨슨을 붙들었다.
"잠, 잠깐만요! 잘못했습니.."
헨슨은 까닭 모를 사과를 해대며 뻗댔지만 카이스의 엄청난 완력으로 안쪽으로 질질 끌려들어오고 말았다. 내부의 험악한 분위기에 살짝 찔끔한 그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다 의자에 늘어져 있는 니엔을 보고 질겁했다.
"이 녀석 왜 이럽니까? 혹시 고문이라도.."
어벙한 것은 경비대의 특성이라도 되는 걸까. 케빈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시끄러워서 재웠어, 아시엘이. 그것보다 헨슨."
재웠다는 말에 차마 무슨 말도 못하고 속으로 경악하던 헨슨은 느닷없는 부름에 예? 하고 자세를 바로했다.
"에슈튼 씨 좀 감시해 주세요. 들키지 않도록."
뒷말은 아시엘에게서 나왔다. 처음보는 그의 무표정에 헨슨은 몸을 살짝 긴장시켰다.
"부대장을.. 말입니까."
"네."
아시엘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호한 모습에 헨슨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그 말씀은, 에슈튼을 의심하신다는?"
"어. 그러니까 부탁해. 일이 좀 꼬여버렸거든.. 아직 확신은 없지만 혹시라도 도망치면 안되니까."
케빈의 말에 코가 단단히 꽤어버린 가련한 경비대원, 헨슨은 잠시 갈등하는 듯 침묵하다 결국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입술근육을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가야 합니까?"
"미안하지만 그렇게 부탁해요."
"미안하긴요. 뭐- 괜찮습니다."
헨슨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나가보겠다며 곯아떨어진 니엔을 들쳐맸다.
"이 녀석은 어쩔까요?"
"알아서 둘러대. 뭐 갑자기 과로로 뻗었다던지.. 아시엘, 저놈 언제쯤 되야 깨어나?"
케빈의 물음에 아시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한 세시간 뒤요. 헨슨 씨- 니엔 씨한테 말 한 마디만 전해주실래요?"
"네?"
아시엘은 잠시 흥분했던 마음을 다 가라앉혔는지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어난 뒤에 헛소리 지껄이고 다녔다간- 다시 잠든 후 눈을 떴을 땐 방이 아니라 땅 속일 거라고요."
"...."
그 살벌한 말에-물론 농담이겠지만- 헨슨은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탁. 그가 나간 후 기사들이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들어 방 안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
에슈튼- 상당히 수상한, 이 부실한 경비대의 부대장.
때마침 대장은 자리를 뜨고 없고 피해자는 스토커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두번째 시신은 아마 눈속임을 위한 것. 연쇄살인이라 판정되면 둘 중 하나의 피해자가 발견된 시간의 알리바이만 있다면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테지만 오히려 그것이 역효과를 내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
아시엘은 입 안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심증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3개월이나 지난 일이니 흉기로 쓰인 단검도 현장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잠깐.'
좀 치사한 방법이지만 증거가 없다면 만들면 된다. 아니, 스스로 만들게 하면 되는 것이다.
"저기요."
아시엘이 입을 열자 비슷한 생각을 하던 세 사람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처음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아마 헨슨을 끌어들이기 전- 경비대원 하나를 붙잡자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이었다.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