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48. 눈에는 눈(1)
똑똑똑. 해질녘- 꽤 넓은 부대장 사무실에 무미건조한 노크음이 울렸다. 방 안에서 초조하게 왔다갔다 서성이는 것을 반복하던 에슈튼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고리가 소리 없이 돌아가고헨슨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절도 있게 경례를 하는 그에게 에슈튼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언짢은 기색이 잔뜩 묻어나는 그 목소리에 헨슨은 살짝 긴장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말 해!"
아니나다를까 터져나온 호통 소리. 헨슨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욕을 내뱉고는 고개를 들고 에슈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긴장하지 말자. 내 뒤에는 더 무서운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인광을 번뜩이는 하얀 제복의 기사들을 떠올리자 저 앞의 경비 부대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졌다. 조금 이상한 방법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헨슨은 드디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부대장님. 셀레니스 기사단이 오늘부로 조사를 종료하고 철수한다고 합니다."
"...뭐?"
귓등으로 대충 흘려듣던 에슈튼은 뜻밖의 소식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셀레니스 기사단이 조사를 종료하고 철수한다고 했습니다."
헨슨이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을 전하자 에슈튼의 눈이 경악으로 점점 커져갔다. 철수라니. 기사들 중 가장 만만해 보이던 아시엘과 살벌한 분위기를 냈던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그 때만 해도 물러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어보였던 그들이었건만 무슨 심경의 변화란 말인가.
에슈튼은 급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으며 다그쳤다.
"그, 그 분들이 뭐라 다른 말씀은 안 하셨나?"
"아뇨.. 그냥 이 곳에서의 파견 근무를 끝내고 복귀하신다고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헨슨에 부대장의 표정이 더더욱 혼란스럽게 변했다. 에슈튼은 애써 그것을 숨기며 물었다.
"언제 가신다고 하더냐."
"아마 내일 해 뜨자마자가 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음..."
고민에 찬 마음을 대변하듯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잠시 인상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고 있던 그는 앞에서 눈치를 보는 헨슨에게 훠이훠이 손을 저어보였다.
"용건 끝났으면 나가 봐."
"예."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헨슨은 한번 더 경례를 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마자 에슈튼은 자신의 업무용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커피라도 한 잔 했으면 싶었지만 항상 차 따위를 타 갖다바치던 니엔도 어디갔는지 없었다.
"하.. 무슨 꿍꿍이지?"
아니, 정말로 상부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왔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지만.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올렸다. 어차피 곧 저녁식사 시간이니 그 때 그들의 낌새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수밖에. 에슈튼은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또다시 울리는 노크 소리에 에슈튼은 들어오란 말 대신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손수 문을 열고 나갔다.
"아.."
설마 그쪽에서 먼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대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굳이 안으로 들어가 보고를 해야지만 나오는 오만한 상관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오히려 아무 말 없이 식당으로 앞서가는 모습에 대원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식당 내부는 밥을 먹으러 모여든 경비대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안을 잠시 쭉 둘러보던 에슈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제복의 기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좋은 저녁입니다."
"아아- 좋은 저녁."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자 케빈이 싱긋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간단한 목례로 감사인사를 한 그는 맞은편의 빈 의자에 앉았다.
에슈튼이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들은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는 듯 그에게서 관심을 꺼버렸다.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그렇게 얼마간 잡담을 나누다가 아시엘이 새로운 화제를 꺼내들었다.
" 아, 참. 아까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됬어요?"
"아까? 아- 영 허탕쳤어."
케빈이 안타깝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에슈튼은 조심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허탕이요?"
"그래. 도대체 이 곳 어디에 무구상이 있다는 건지.."
이번에는 제르닌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에 아시엘은 에슈튼을 살짝 쳐다보고-부대장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쉽다는 듯 미소지었다.
"에슈튼 씨랑 말싸움까지 했는데 말이에요. 죄송하게 됬네요."
잠시 멍하니 있던 에슈튼은 마지막 말이 자신에게 한 것임을 깨닫고는 허둥지둥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무례하게 대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시엘은 다시 생긋 미소짓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선배들과 친구에게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슈튼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분명 아까의 일을 말하는 거다. 그건 정말로 그저 단장의 심부름이었던 건가?'
긴가민가한 상황에 그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에슈튼이 빵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고민에 빠져 있는데 옆에 앉아있는 기사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그들을 배웅하려 에슈튼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제르닌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입을 열었다.
"대원에게 보고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현 시간부로 수사를 종료하고 내일 아침 복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예. 보고 받았습니다."
에슈튼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어깨를 두어 차례 두드려 준 제르닌은 곧바로 몸을 돌려 다른 기사들과 함께 식당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에슈튼은 망부석처럼 굳은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편.식당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아시엘은 부르르 떨며 팔을 감싸쥐었다.
"어쩐지.. 소름돋네요."
"동감이다. 그것보다 너도 대단하네. 그렇게 태연한 미소라니."
케빈이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놀리는 듯 한 선배의 어조에 아시엘은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누가 할 소릴. 아아- 좋은 저녁, 이라니.. 그런 낯간지러운 인사를 잘도 했네요."
"이 녀석!"
따악! 케빈은 아시엘의 머리에 딱밤을 먹였다. 튼튼하게 단련된 손이라 꽤나 아픈 듯 아시엘은 이마를 감싸쥐며 소리를 질렀다.
"왜 때려요!"
"내 맘이다. 왜?"
상당히 유치한 다툼을 이어가는 두 사람. 결국 보다못한 제르닌과 카이스가 그들을 떼어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얼른 가야 한다고."
"...."
카이스의 목소리에 아시엘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이상 반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작전을 냈던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빨리 들어가서 짐이나 꾸리자."
"네에-"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끼어드는 제르닌. 케빈과 아시엘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쨌든 이제 시작이었다. 자고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거기다 덤까지 씌워주면 완벽한 것이다.
아시엘의 눈이 잠시 반짝, 하고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