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50화 (5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0. 눈에는 눈(3)

에슈튼은 경비대의 나무복도를 전속력으로 달리며 혼자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방금 전 들린 어마어마한 폭음. 무언가가 폭발이라도 한 건가, 하고 바로 뛰어나갈 준비를 하던 그에게 헨슨이 달려와 침입자가 있다며 보고한 것이 바로 몇 분 전이었다.

쏜살같이 통로를 통과한 에슈튼은 다다다다 계단을 단숨에 내려가 중앙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서늘한 밤의 공기가 피부에 닿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워놓은 횃불에 선명하게 보이는, 하늘로 피어오르는 먼지.

폭발은 아니다, 라는 작은 안도감과 함께 그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코너를 돌고 박살 난 벽과 마주하는 순간 그 생각은 깔끔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

정말, 말 그대로 폭탄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견고했던 벽은 커다랗게 구멍이 생겨 내장을 내보이는 것 처럼 계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먼지와 사방에 흩어져 있는 파편들이 그 참상이 오래 전의 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에슈튼은 할 말을 잃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가 차서 화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들려온 한 대원의 부름이 그의 정신을 현실세계로 돌려놓았다.

"부, 부대장님!"

"뭔가!"

여기서 더 나빠질 상황이 뭐가 있단 말인가. 에슈튼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보고는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었다.

"죄수가 도망쳤습니다!"

"뭐? 그럼 이건-"

그는 말을 잇다 입을 다물어버리곤 짜증스럽게 걸리는 돌 하나를 걷어찼다. 도망이라니, 범인이 도망이라니! 그때, 뒤에서 대원들이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재빨리 고개를 돌린 에슈튼은 새로 나타난 이들을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확 띄는 하얀 제복의 기사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가까이 달려온 아시엘이 경악한 얼굴로 내뱉은 물음에 나와 있던 한 대원이 대답했다.

"감옥의 외벽이 무너지고 죄인이 탈출했습니다!"

"뭐라고? 탈출?"

어이없는 목소리로 되물은 것은 케빈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제르닌은 멍하니 서 있는 에슈튼을 밀치고 구멍이  난 벽으로 다가갔다.

"갇혀있던 자는 여인이라고 들었다. 여자 혼자서 이런 짓을 벌일 리도 없고.. 벽도 바깥에서 부서졌군. 조력자거 있다는 뜻이다. 수색은?"

제르닌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자신을 향하자 부대장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직입니다. 날이 어두워서.."

"그럼 램프라도 들고 뛰어야 할 거 아니에요! 혼자서 벽을 이정도로 부쉈다면 상당히 실력자일 텐데, 그걸 지금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두겠다는 말이에요?"

변명어린 그의 말에 버럭 소리치는 아시엘. 배알이 꼴리지만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어 에슈튼은 어느새 온 건지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던 헨슨에게 눈짓했다.

바로 알아들은 헨슨은 소음에 자다가 달려나온 대부분의 대원들에게 외쳤다.

"수색을 시작한다! 다들 램프 하나씩 들고 따라와!"

왜 네가 명령하냐, 뭐 이런 작은 반항도 없었다. 대원들은 일제히 우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랜턴과 무기를 챙겨나왔고 헨슨의 말에 따라 몇 조로 나뉘어 흩어졌다.

"우리도 근처를 돌아보지. 에슈튼, 넌 이곳에 있어라."

"예?"

제르닌의 말에 에슈튼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지만 이미 네 사람은 휙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에슈튼은 손을 뻗어 그들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곧바로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젠장, 제기랄!"

그는 세게 발을 굴렀다. 그제야 경비대 안에 남아있는 것은 자신 뿐이고, 순식간에 셀레니스 기사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망할.."

씨근덕거리며 이 자리에 없는 상대에 대한 화를 아낌없이 분출하던 그는 한쪽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원칙상 경비대 건물은 비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에슈튼은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어차피 내일이 되기 전에 탈옥한 범인은 잡힐 터였다. 그 조력자라는 놈이 신경쓰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하나를 데리고 멀리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에슈튼은 애서 끓어오르는 화를 삭히며 품을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여자는 사형당하고 자신은 완전히 손을 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그는 성냥을 그었다.

한 편. 수색팀을 최대한 분산시킨 헨슨은 골목길 구석에 챙겨두었던 꾸러미를 집어들고 어느 허름한 판잣집 으로 갔다.

"니엔. 니엔!"

그가 초조하게 속삭이듯 부르자 판잣집의 안쪽에서 기다리던 화답이 들려왔다.

"헨슨. 이쪽이야."

"아."

헨슨은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 안으로 살짝 들어가 삐걱거리는 문을 빠르게 닫았다. 안쪽은 보기보다 깨끗했다. 한구석에 쌓인 짚더미 위에는 니엔과 함께 도망쳤던 에나가 다소곳이 앉아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헨슨은 이런 일에 말려들게 된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기에 니엔과 그녀를 가운데로 불러모았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헨슨은 램프를 바닥에다 놓고 가지고 온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엄지손가락 만 한 약병과 약초, 불 꺼진 램프와 성냥 그리고 단도 하나였다.

짧은 시간 안에 구하느라 고생한 만큼 그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헨슨은 사뭇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잘 들어. 시간 없으니까 한 번만 설명할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니엔과 에나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고, 헨슨은 차근차근 최대한 빠르게 아시엘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갈 때 쯤, 두 사람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졌다.

"..그럼. 지금 기사님들은?"

"이 근처에서 대원들이 이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을거야. 에나양, 잠시 혼자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니엔의 물음에 간단히 대꾸한 헨슨은 에나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에나는 얼굴이 조금 창백해지긴 했지만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맡겨주신 일도.. 잘 할 수 있어요."

그런 그녀에게서는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헨슨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듯 한 번 웃어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조금 있다가 나와. 아마 아침엔 엄청난 쇼가 벌어지겠지."

"알았어."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니엔의 어깨를 격려하며 툭툭 친 헨슨은 램프를 끄고 그것을 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그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판잣집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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